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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군국가요 40선〉 제작에 얽힌 사연을 듣다

2017년 3월 27일 1426

인터뷰 –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 이준희 부회장 정리 :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 인터뷰이는 〈군국가요 40선-일장기 그려놓고 성수만세 부르고〉 제작을 함께한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 부회장 이준희 씨다. 이 부회장은 한국 대중음악 전공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관련 논저를 발표해왔으며 <친일인명사전> 편찬과정에서 음악분야(군국가요) 편찬위원으로 참여했다. 또한 유정천리의 〈남인수 전집〉 〈이난영 전집〉 등 음반을 기획・제작했고, KBS 〈가요무대〉 등 방송 프로그램에 자문하고 있으며 대중음악 및 대중문화를 강의하는 겸임교수이기도 하다. – 편집부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 부회장 이준희 씨   문 : 이번에 발매된 〈군국가요 40선〉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옛가요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가 함께 기획, 제작했습니다. 먼저 유정천리에 대해 소개해주시죠. 답 :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는 2009년 11월 옛 가요를 사랑하는 사회인사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점차 일반인들도 참여하는 대중모임으로 발전했습니다. 유정천리는 뿔뿔이 흩어진 소중한 옛 가요를 하나 둘씩 찾아 모으고 정리해서 가수별 음반을 복각판 CD로 발간하는 일을 1차적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남인수전집〉(2012) 〈이난영전집〉(2016) 등 해마다 다수의 음반을 제작했고, 가요사 유적지 답사, 대중가수의 평전 및 대표곡집 발간, 노래비 건립, 축음기음반 감상회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회장은 영남대 국문과 이동순 교수(시인)입니다. 문 : 군국가요의 정의와 성격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답 : 군국가요는 1930~4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직간접적으로 부응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노래 가운데 상업적인 대중가요의 생산·유통 과정을 거쳐 유포된 것을 말합니다. 일각에서는 친일가요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는데,

[소사 22] ‘항심’을 지키기 위해 뛰어든 부업 전선

2017년 3월 27일 707

<맹자> 등문공편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 ‘무항산자 무항심’(無恒産者 無恒心)이 있습니다. 항산이 없는 자는 항심도 없다는 뜻으로 즉,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지조를 꺾은 사례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어느 단체든 창립 초기에는 그 기세와 의욕이 하늘을 찌르고 바다를 덮을 만합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것보다는 기르는 것이 더 어렵듯이 단체를 만들기는 쉬우나 유지하기는 훨씬 더 힘듭니다. 연구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창립 이후 오랫동안 회원들의 회비만으로는 한달치 월세도 충당할 수 없었던 극히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상근 연구원들과 활동가들이 어쩔 수 없이 부업 전선에 내몰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번 달에는 항심을 지키기 위해 항산에 나섰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993년 여름 연구소 소식지에 ‘김정문알로에’ 광고가 실립니다. 연구소 발기인 중 한 분이 평소 안면이 있는 김정문알로에 관계자에게 부탁하여 광고비를 2~3차례 받아 회보 발행비 등에 보탠 것입니다. 당시 회보는 발행부수도 미미하여 회사 입장에서는 광고효과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 후 연구소의 어려운 처지를 전해들은 몇몇 회원들이 연구소에 몇 가지 수익사업을 제안합니다. 이때부터 장사와 이재에는 문외한에다 잼병인 상근자들이 부업 전선에 뛰어들게 되는데 실제로 몇 달 만에 접은 사업도 있고 몇 년간 지속했던 사업도 있었습니다. 1995년경에 시작한 먹는 샘물 판매업은 연구소가 일종의 대리점 역할을 했고 당시 김재운 조직담당 상근자(현 서울동부지부장, 민주주의국민행동 사무국장)가

근현대사기념관 제98주년 3·1절 기념행사 개최

2017년 3월 27일 609

  근현대사기념관(관장 이준식)은 제98주년 3·1절을 맞아 지역 주민과 함께 ‘1919년 3월 1일, 그날의 꿈’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날 행사는 오전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상설 전시실 관람, 독립민주기념비 헌화, 대형 태극기에 손도장 찍기 체험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학예사와 강북구 역사동아리 청소년 도슨트의 전시 해설이 있었다. 강북구 역사동아리 청소년 도슨트로 활동하는 중학생 10명이 직접 작성한 원고를 토대로 해설하여 관람객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전시 해설은 오전 10시, 오후 2시 두 차례 예정되어 있었으나, 관람객들의 요청으로 오전, 오후 각 1회씩 추가하여 총 4회가 진행되었다.   상설전시실 관람 후 강의실에서 심산김창숙기념관의 후원을 받아 참가자 전원이 심산 김창숙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심산 무궁화’를 만들었다. 참가자들은 무궁화를 손에 들고 시민들의 모금으로 세워진 ‘독립민주기념비’에 무궁화를 헌화한 후 경건한 자세로 묵념하였다. 마지막으로 한국광복군이 서명한 태극기를 본떠 만든 가로 4m, 세로 3.5m의 대형 태극기에 참가자들이 손도장을 찍으며 대형 태극기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광복군의 기개를 되새길 수 있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이번 행사를 통해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유,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만세를 외쳤던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애국지사의 정신이 담긴 강북구 지역을 재조명하며 지역 주민과 함께 공감하는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날 관람 인원은 평소 주말 관람객의 2배를 넘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기념관의 역점사업인 청소년 도슨트 양성과정과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문의도 계속 들어오고 있다. ∷

조선인 최초의 종로경찰서장·황해도경찰부장, 윤종화 “일사순국一死殉國의 뜻을 뼈에 새겨 최선”

2017년 2월 22일 2352

고등관이라는 욕망의 열차 고위 행정공무원의 등용문인 행정고시, 판검사라도 될라치면 약관 20대에도 일약 ‘영감님’ 소리를 듣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사법고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외교관의 관문인 외무고시는 국가공무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출세의 지름길이다. 통상 이 세 개의 고급공무원을 뽑는 시험을 ‘고등고시(高等考試)’라고 부르는데, 그 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의 고등고시는 머리 좋고 출세욕에 불타는 식민지 청년에게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입신양명의 사다리였다. 물론 그것은 친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일제로서는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불가불 조선인의 힘을 빌어야 했고, 이 식민통치의 하수인에게 “너희도 충성을 다하면 출세할 수 있다”고 던져준 값비싼 고깃덩이의 하나가 고등문관시험 따위였던 것이다 고등문관시험(지금의 행정고시)에 합격한 조선인의 경우 3년 동안 고등관시보(高等官試補)를 거쳐 주임관(奏任官)이 된다. 요즘으로 치면 5급 사무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주임관급 이상을 고등관이라 불렀고, 6급 주사 이하는 판임관(判任官)이라 불렀다. 그런데 5급과 6급의 경계는 ‘명박산성’보다 높고 견고한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9급이나 7급으로 시작한 행정관료들의 경우 평생 근무해야 6급 주사로 끝났다. 특별한 예외가 아닌 한 5급 주임관은 될 수 없었다. 주임관을 시작으로 한 고등관의 세계는 고등고시 합격자들에게만 주어진 황금 사다리였던 것이다. 식민지의 머리 좋은 청년들 가운데 조국의 독립이야 어떻든 이 황금 사다리를 오르고자 몸부림치는 부류들이 있었고,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 군수를 거쳐 마침내 조선인 최초로 ‘공안 1번지’ 경성부(서울)

[초점] 교육현장에서도 탄핵당한 국정교과서

2017년 3월 27일 622

국정 역사교과서가 결국 교육현장에서도 거부당했다. 교육부가 당초 국정교과서를 보급하기로 계획했던 전국의 5,249개 중·고등학교 가운데 ‘연구학교’를 신청한 곳은 경북 경산시의 문명고등학교 한 곳이다. 경북 구미의 오상고는 연구학교 신청을 했다가 교사와 학생들의 반발이 커지자 하루 만에 철회했고, 경북 영주의 경북항공고는 학교운영위원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신청해 연구학교 지정 심의과정에서 탈락했다. 국정교과서를 사용할 연구학교 지정을 위해 ‘교원 승진 가산점’과 ‘1,000만원의 예산 지원’을 내걸었음에도 교육현장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것이다. 교육부는 앞서 전국 국립학교 12곳 교장들을 불러 간담회를 열며 독려했지만 신청한 학교는 없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국정 역사교과서 연구학교로 지정된 문명고는 재단과 교장이 교육주체의 의사를 무시하고 편법으로 연구학교 신청을 밀어붙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 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는 대책위를 구성하고 연구학교 철회를 요구하며 교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신입생이 입학을 포기했으며, 결국 입학식도 열리지 못했다. 역사 교사들은 국정교과서 사용을 거부했다.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국정교과서저지넷)는 2월 24일 논평을 통해 “문명고 사태는 교육부와 경북교육청, 문명고 재단이 결자해지하라”고 촉구했다. 이준식 교육부장관은 지난 2월 10일 연구학교 신청이 저조하자 신청 마감을 닷새 연장하고 급기야 “학교의 자율 선택을 방해하는 외부의 부당한 압력이 있을 경우 모든 법적 조치를 강구하겠다”는 협박성 담화문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국정교과서저지넷은 같은 날 서울 정부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교과서가 학교 현장에서 외면받는 까닭은 친일-독재를 미화하는 반헌법적인 내용을 담은 날림-불량 교과서이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교육부는 탄핵당한 ‘박근혜 교과서’에

용상龍床에 오른 순직경찰의 영혼들

2017년 2월 22일 1680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30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일제강점기 순직경찰과 소방관들의 초혼제(혼령을 위로하는 제사) 명부인 <순직경찰·소방직원초혼향사록殉職警察·消防職員招魂享祀錄<(이하<향사록>)이다. 순직경찰 중 일부는 지난 호의 소개자료 서울종로경찰서 사진첩의 「순직자의 늠름한 모습」에서 소개된 바 있다. 의열단원 김상옥이 쏜 총에 맞고 즉사한 순사부장 다무라와 보합단원에게 죽은 곤도와 이정선인데 이들도 <향사록>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순직자’를 단순히 기념사진첩에 수록하여 ‘귀감’으로 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순직경찰관초혼제’를 열고 성대한 제사를 지내어 그들을 기리고 조선인들로 하여금 제물을 바치게 함으로써 체제에 순응시키고자 했다. 1937년 5월 1일자로 작성된 <향사록>에 수록된 순직경찰과 소방직원은 총 315명으로 경찰은 1910년 8월 10일부터 1937년 2월 3일까지 281명, 소방원은 1919년 9월 5일부터 1936년 8월 28일까지 34명이 기재되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이 순직연월일, 관직·씨명, 출신지·생년월일, 순직 이유와 장소로 구성되어 있다. 순직연월일 : 대정8년(1919년) 3월 28일, 관직씨명 :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 순직 이유 : 경기도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소요사건이 있을 때 폭동진압 중 돌에 맞아 중상을 입고 사망 이처럼 ‘순직경찰관초혼제’의 향사 대상은 불령선인이나 소요사건의 폭도에게 죽은 자, 이른바 ‘비적匪賊’에게 죽은 자들인데 뒤집어 말하면 항일 투사들에게 죽은 순사들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제사를 지낸 장소가 하필이면 조선왕조의 정전(正殿 : 국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국가적인 행사가 치러지던 곳)인 경복궁 근정전이고, 순직경찰을 위한 제단을 임금의 자리 즉 용상에다 설치했다는 것이다. 제1회 순직경찰관초혼제는 1921년 4월 26일 남산공원 앞의

추적발굴 – 이준 열사의 안국동 집터

2017년 2월 22일 2210

1907년 6월 25일은 고종황제의 특사인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등 세 사람이 제2차 만국평화회의(1907.6.15~10.18)에 참석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날이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던 이들의 계획은 서구열강의 외면과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한 채 수포로 끝났고, 특사 가운데 한 사람인 이준은 울분에 겨워 여러 날에 걸쳐 단식하던 도중에 그해 7월 14일 머나먼 이국의 호텔 방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들의 의거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여파는 가혹했다. 무엇보다도 고종은 황태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윤허한 것을 빌미로 퇴위를 당하였고, 곧이어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과 군대해산이 강요됨에 따라 대한제국의 국권은 회복불능의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또한 세 특사에 대해서는 ‘위칭밀사(僞稱密使, 거짓되이 밀사로 자칭)’하였다는 이유로 궐석재판을 통해 교형(絞刑)과 종신징역(終身懲役)의 판결이 가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헤이그특사사건’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면 이른바 ‘밀사’의 신분인 탓에 그런지는 몰라도 몇 가지 관련사항들이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은 부분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이들이 지닌 위임장과 황제친서의 전달 경위와 장소 등과 같은 사항들이 그것이다. 이 당시 이상설은 만주에서 활동중이었고 이위종은 러시아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황제의 밀명을 전달받고 위임장과 친서를 수령하는 일은 오롯이 국내에 남아 있던 이준의 몫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황제의 신임장을 수여받은 곳은 어디였을까? 이 점에 있어서 흔히 경운궁 중명전이 언급되고 있으나 이에 관한 근거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유자후(柳子厚, 이준의 사위)의<이준선생전>(동방문화사,1947)에는그 장소를이준의자택으로지목하는구절이 등장한다. 해아밀사(海牙密使) 특파밀칙(特派密勅)의 하부(下付)인

비운의 여장군 김명시

2017년 2월 22일 7988

환호 속에 귀국한 여류 혁명가 이역만리에서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투사로서 장군 칭호를 받은 이들이 드물지는 않다. 그런데 그중 이채롭게도 ‘여장군’ 칭호를 얻은 이가 있으니 바로 해방 당시 38세 한창 나이였던 여장부 김명시(金命時)이다. 김명시는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 혐의로 7년간 복역한 뒤 1939년 중국으로 건너가 해방 직전까지 무정 장군 직속하의 조선의용군에 소속되어 최전방에서 여성 부대원을 이끌고 선전선동과 초모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12월 중순 서울에 개선한 그는 기자회견을 열어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현황을 설명하고 “조선사람은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 다 통일전선에 참가하여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며 자주독립을 위한 좌우 협력을 강조하였다. 이 기자회견 내용은 <중앙신문><독립신보><동아일보>와샌프란시스코에서간행되던 <국민보>에까지 실려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여장군 김명시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특히 우익신문이던 <동아일보>가 김명시를 조선의‘잔다르크’로까지 치켜세운것은 당시 그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는지 가늠케 한다. <독립신보>1946년11월21일자에는「여류혁명가를찾아서⑦ 20년간투쟁생활,태중(胎中)에도 감옥살이, 김명시 여사편」이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다. 유영준(劉英俊), 정칠성(丁七星), 박진홍(朴鎭洪), 유금봉(劉金鳳), 허하백(許河伯), 조원숙(趙元淑)에 이어서 여류혁명가로서 7번째로 인터뷰한 것이다. 약간 길지만 김명시의 항일 이력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모두 옮겨 싣는다.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이 대담해 보였다. “투쟁하신 이야기를 좀 들을까요”하고 물으니 “열아홉 살 때부터 오늘까지 21년간의 나의 투쟁이란 나 혼자로선 눈물겨운 적도 있습니다마는 결국 돌아보면 아무 얻은 것 하나 없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친일’ 이란 명칭을 바꿔야 하지 않나 생각되네요.

2017년 3월 27일 1203

이것이 궁금하다 1   문) ‘친일’ 이란 명칭을 바꿔야 하지 않나생각되네요. 친할 친(親), 날 일(日). 한자 문화권에서 문자만 보면 심각성을 전혀 가늠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본의 옳은 문화를 소비하는 입장에서 친구 같은 일본의 모습에서 극우 잔당의 역사를 분리 명칭화 해야 한다고 봅니다. 친일파, 친일 잔당, 등 왜 간신과 같은 역적과 같은 사람들을 ‘친할 친’을 써야 하는지 납득이 되질 않네요. 좀 더 강력하고 한자문화권에서 알 수 있도록 명칭을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친일~친일~ 듣는 일본에선 ‘왜 우릴 좋아하는 사람들을 혐오하는지’라고 생각이 들듯합니다.   답) ‘친일’ ‘친일파’라는 용어가 그 자체로 역사성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기도 하고 타당한 측면이 있는 지적입니다.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자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는 친일파 외에도 매국노 반민족행위자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일제부역자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매국노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처럼 일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국권을 일제에 넘기는 데 협조한 무리들을 의미하며 주로 한말의 고관대작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강제병합 이후 이들 중 다수는 일제가 수여하는 조선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습니다. 반민족행위자나 민족반역자는 해방공간과 정부수립 이후 많이 사용되었으며 민족주의적 시각이 투영된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반민특위를 대표적 사례로 들수 있습니다. 부일협력자 일제부역자 등은 행위와 대상을 함께 담은 용어로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표현에 가깝습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부일협력자란 용어를 선호하 는 경향이 있지만 생계형 부역자나 소극적 협력자들까지 범주에 들어갈

몽양여운형기념관 사태에 관하여

2017년 2월 22일 1765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광화문에 100만 촛불 열기로 뜨겁던 12월 초순, 몽양기념관의 장원석 학예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양평군청이 몽양기념관 민간위탁운영자 모집 공고를 냈다는 것이다. 양평군청으로부터 2016년 한해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재계약 약속을 받았다고 들은 터라 재계약은 문제없을 거라고 안심하고 있었을 때였다. 몽양기념사업회가 지역주민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고 방문객수가 적다는 동네주민 다섯 명의 탄원서가 그동안 재계약하겠다는 약속을 파기한 이유였다. 불편한 접근성에도 매년 꾸준히 방문객이 늘고 있는데 갑자기 접수된 탄원서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했다. 몽양역사아카데미 회원들은 몽양의 뜻을 계승하며 꾸준히 몽양선양사업을 하고 있는 몽양기념사업회가 몽양기념관을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양평군청 앞에서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평군청은 신뢰를 저버리고 끝내 2016년 12월 29일 새로운 민간 위탁 운영자로 상명대학교 서울산학협력단과 신원1리 새마을회를 선정했다. 상명대 서울산학협력단과 신원1리 새마을회는 몽양 여운형 선생은 물론 독립운동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단체이다. 더구나 두 단체는 몽양 여운형 선생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과 관련된 곳이다. 상명대학교는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배상명이 설립한 학교이고, 새마을회는 만주군 중위 출신의 독재자 박정희가 남긴 유산이다. 이런 단체들에게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는 사업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몽양 여운형 선생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에서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것을 시작으로 우리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웠고,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좌우합작활동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