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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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가요]

음반이 담은 시대의 여운,
한국 근현대사 50장면 50곡

이준희 대중음악연구자

5. 순종 사망과 <내 고향을 이별하고>

1926년 4월 25일 오전 6시 10분, 한국 역사상 최후의 군주인 순종(純宗)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통상 조선의 제27대 마지막 왕으로 불리지만, 아울러 그는 1905년 11월 한일 간 조약 체결 이후 껍데기만 남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기도 했고, 1910년 9월부터는 일본제국의 일부가 된 조선의 첫 번째 이왕(李王)이기도 했다. 이왕 시절에는 흔히 ‘창덕궁 전하’로도 불렸다.

오래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식을 보지도 못했던 순종은, 1926년 3월 이후 병세가 눈에 띄게 악화했다. 창덕궁 이왕과 그 가족의 가무(家務)를 관리하던 이왕직(李王職)에서는 순종의 건강 상태를 수시로 정리해 발표했고, 언론에서도 그 내용을 받아 공개적으로 지면에 실었다. 『조선일보』 4월 24일 석간을 보면 사망 하루 전 순종의 수면 시간, 음식 섭취량, 체온, 맥박, 호흡, 심지어 오줌량까지 알 수 있다. 이름뿐인 왕이었다고는 해도, 그러한 정보 공개는 전에 없었던, 어쩌면 ‘근대적’인 변화이기도 했다.

사망 나흘 뒤인 4월 29일, 순종은 그때 비로소 순종이 되었다. 이왕직과 종친, 대한제국 시절 옛 신하들이 모여 논의한 뒤 사후에 붙이는 묘호(廟號)를 순종으로 정했다. 순종 국장의 발인일은 6월 10일이었는데, 이때도 7년 전 3·1운동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시위를 일으키고자 하는 계획이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 차례 학습(?)을 한 조선총독부에서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시위는, 준비 세력 일부가 사전에 체포되고 당일 거사도 신속히 진압되어 3·1운동과 같은 폭발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실권 없는 황제, 이름뿐인 왕으로 창덕궁에서 무기력한 나날을 보냈던 순종이 살아생전 거의 유일하게 즐겼던 취미는 당구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고종(高宗)이 이동백(李東伯) 등 명창의 판소리나 박춘재(朴春載)의 재담소리를 좋아했던 것과 달리, 순종이 음악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는 기록은 달리 찾을 수 없다. 창덕궁에서 음반을 구매했다는 내용이 1923년 5월 일본축음기상회 광고에 보이기는 하나, 음반을 사서 들은 사람은 이왕이 아닌 이왕비(李王妃), 즉 순종의 아내였다. 순종과 나이 차가 스무 살이었던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는 피아노 연주가 취미였다고 하며, 음반 구입도 그와 관련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음악을 딱히 즐기지 않은 순종이었음에도, 그에게 음반이 헌상되었다는 기록이 공교롭게 묘한 시점에서 또 확인된다. 1926년 4월 23, 24일 신문 기사에 따르면, 21일에 일본축음기상회 지점장이 유성기, 즉 축음기와 음반 스무 가지를 가지고 창덕궁으로 직접 갔다고 한다. 와병 중인 순종을 위해 준비한 음반이라 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혼미한 상태에 있었던 순종이 그것을 제대로 들었는지는 아무래도 의문이다. 헌상 음반의 곡목은 지금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녹음한 이들의 이름은 기사를 통해 확인되는데, 거기서 주목할 만한 이가 바로 테너 가수 안기영(安基永)이다.

일본축음기상회, 즉 일축(日蓄)에서 헌상한 음반의 다른 녹음자들은 가수 심수봉(沈守峰)의 고모인 심매향(沈梅香)을 비롯해 모두 전통음악이나 일본 유행가 번안곡을 연주한 기생이었지만, 안기영은 유일한 서양음악 전문가이자 남성 가수였다. 중국에서 유학하며 음악 활동을 하다가 1923년에 돌아와 국내 무대에도 서기 시작한 안기영은 1925년 일축에서 독창 여덟 곡, 합창 한 곡을 녹음했고, 10월부터 음반이 발매되기 시작했다. 순종에게 헌상된 음반은 아마 독창 여덟 곡 가운데 골라졌을 텐데, 유력한 후보작 중 하나가 지금도 들을 수 있는 <내 고향을 이별하고>다.

<내 고향을 이별하고>
정사인(鄭士仁) 작곡, 안기영 노래, 1925년 일축 K548

내 고향을 이별하고 타관에 와서 / 적적한 밤 홀로 앉아서 생각을 하니
답답한 마음을 아 누가 위로해 /
내 고향을 떠나올 때 우리 어머니 / 문 앞에서 내 손 붙잡고 잘 다녀오라
하시던 말씀 아 귀에 쟁쟁타

안기영이 1925년에 녹음한 다른 곡들은 찬송가이거나 <내 사랑아(Oh my Darling Clementine)> 같은 번안작이었지만, <내 고향을 이별하고>는 조선 양악의 선구자인 정사인이 작곡한 노래다. 조선 노래인 데에다 피아노 반주로 녹음되기도 했으므로, 순종은 듣지 않았다 하더라도 순정효황후는 어쩌면 관심을 가지고 들었을 수 있다. 당시 헌상 음반에 관한 다른 기록이나 유물은 아쉽게도 남아 있는 것이 없기는 하다.

<내 고향을 이별하고> 곡조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16년 10월에 홍난파(洪蘭坡)가 펴낸 『통속창가집』에 수록되었던 것은 확인되므로, 창작 시기는 그 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통속창가집』에는 <추색(秋色)>이라는 다른 제목으로 실렸고, 가사도 <내 고향을 이별하고>와 완전히 다르며, 작자 이름은 표기되지 않았다. <내 고향을 이별하고> 음반 역시 딱지에 작자 이름을 표기하지 않았으므로, 1910~20년대 기록만으로는 정사인 작곡이라 확정할 수 없는 면도 있다. 그러나 1935년 7월에 <내 고향>이라는 제목으로 발매된 테너 김영길(金永吉)의 음반에는 작곡자가 정사인으로 명기되어 있고, 정사인이 세상 떠나기 3 년 전인 1955년 3월 기사에서도 <내 고향을 이별하고>를 그의 작품으로 소개했다.

오늘날 북한에서도 <내 고향을 이별하고>는 <사향가>라는 제목으로 계속 불리고 있는 중요한 노래다. 특별히 존중받는 작품이 된 이유는 이른바 ‘불후의 고전적 명작’, 즉 김일성(金日成)이 직접 만든 곡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인데, 김일성이 태어났던 때는 1912년 4월이다. 김일성 작곡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네 살 무렵에 <내 고향을 이별하고> 곡조를 만들었던 셈이 되니, 실로 모차르트(Mozart)도 기가 막힐 이야기이긴 하다.

6. 윤심덕 자살과 <사의 찬미>

1926년 7월 16일 오전, 서양음악 가수로 당대 조선에서 첫손에 꼽혔던 소프라노 윤심덕(尹心悳)이 경성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동생인 피아노 연주가 윤성덕(尹聖悳)과 동행이었다. 자매는 부산에서 연락선으로 갈아탔고,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 뒤에는 다시 기차를 타고 오사카(大阪)로 향했다.

윤심덕이 동생과 함께 오사카로 간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동(日東)레코드에서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녹음을 마친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 동생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오사카 도착 이후 예정했던 20여 곡 녹음은 7월 하순에 무사히 마쳤지만, 이후 윤심덕의 행보는 처음 출발할 때 계획과 여러 가지로 다르게 이어졌다.

우선, 녹음 종료 이후에 갑자기 혼자 도쿄(東京)로 가서 극작가 김우진(金祐鎭)을 만났다. 김우진과 함께 오사카로 돌아온 뒤에는 또 일동레코드에 요청해서 노래 한 곡을 추가로 녹음했다. 그리고 마지막 녹음을 마친 뒤에는 동생 윤성덕이 미국으로 출발하는 것을 보지 않고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행 기차에 올랐다. 두 사람은 8월 3일 밤에 출발한 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향했으나, 끝내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다. 달빛도 없는 8월 4일 깊은 새벽에 두 사람의 자취가 바닷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 실종 소식은 8월 5일부터 보도되기 시작해 거의 한 달 동안 지면을 떠나지 않았다. 딱히 유서라 할 만한 것이 남지 않았고 시신도 찾지 못했지만, 동반 실종은 곧 동반 자살, 정사(情死)로 간주되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 시간을 보낸 곳이 일본이어서 그랬는지, 일본 언론의 관심도 상당했다. 조선이든 일본이든, 죽음으로 사랑을 이루고자 한 남녀의 정사에 대한 보도가 빈번했던 시절이다.

처자식이 있었던 김우진과 미혼 윤심덕이 정말 그토록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던 것은 또 아니다. 윤심덕이 돌연 김우진을 만나러 갔던 것도, 김우진이 굳이 윤심덕과 함께 연락선을 탔던 것도, 사랑이든 아니든 어떤 사이가 아니고서는 썩 자연스럽지가 않다. 죽은 척하고 종적을 감추었다거나 같이 죽기는 했지만 타살이라거나, 별다른 근거 없는 풍설이 많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죽음을 택했을 가능성은 높다.

윤심덕이 유서처럼 남긴 마지막 노래 <사(死)의 찬미>는 그래서 중요하다. 8월 1일 오전 10시 좀 넘어서 <사의 찬미>를 녹음할 때 윤심덕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고 한다. 그 때문에 첫 녹음은 불량으로 폐기하고, 두 번째 시도에서 겨우 녹음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다음날 떠난다는 인사를 하러 일동레코드에 갔을 때, 윤심덕은 <사의 찬미>를 가장 먼저 음반으로 만들어 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의 찬미>는 정말 유서처럼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쓴 것으로도 보인다.

<사의 찬미>
윤심덕 작사(?), 이오시프 이바노비치 작곡, 윤심덕 노래, 1926년 일동 2249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 너 속혔음을 네가 아느냐 /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음반이나 가사지에 작사자 표기가 전혀 없으므로, <사의 찬미> 가사를 누가 썼는지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1926년 8월 신문 보도 가운데 윤심덕의 자작이라는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윤심덕이 가사를 쓴 다른 예가 확인되지 않았기에, 김우진이나 또 다른 사람이 <사의 찬미> 작사자일 수 있다는 추정이 예전에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윤심덕이 1926년 2월에 첫 음반으로 발표한 <어여쁜 색시>가 그의 자작 가사임이 최근 확인되었으므로, <사의 찬미> 가사 또한 윤심덕이 지었을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졌다. 1920년 6월 잡지 <개벽>에 실린 임장화(林長和)의 시 <사의 찬미>가, 어쩌면 윤심덕이 <사의 찬미>를 쓰는 데에 참고가 되었을 수도 있다.

<사의 찬미>는 루마니아 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기악곡인 중 두 대목을 따서 이어 만든 곡조에 가사를 붙인 노래다. 1902년 일본에서 먼저 그 곡조로 <ドナウ川の漣(도나우강의 잔물결)> 노래가 만들어졌고, 1920년대 전반에는 또 그 번안곡으로 <다늅강>이라는 조선어 노래도 등장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의 찬미>는 기악곡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바로 가사를 붙인 것이 아니라 번안곡 <다늅강>을 완전히 개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윤심덕이 일동레코드에 특별히 부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동레코드가 윤심덕의 죽음을 음반 판매의 호재로 판단했기 때문인지, 여하튼 <사의 찬미> 음반은 녹음 이후 한 달도 되지 않은 8월 하순에 발매되었다. 일본보다 며칠 늦기는 했지만, 조선에서도 8월이 가기 전에 <사의 찬미>를 들을 수 있었다. 이례적으로 신속한 발매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확실히 뜨거웠고, 조선과 일본에서 6년 동안 판매된 <사의 찬미> 음반은 만 3천 장 이상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세상이 부정하는 사랑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 예술 때문이었는지, 윤심덕이 느낀 절망과 결심한 죽음의 실상은 여전히 흐릿하게 남아 있다. 그래도, 지난 한 세기 동안 그의 죽음과 그가 남긴 노래 <사의 찬미>가 다양한 예술 창작의 원천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왔음은 분명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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