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황금물결 출렁이는 빼앗긴 들
황금빛 들판으로 변해가는 수확의 계절 10월. 농촌은 한 해 농사의 결실에 힘든 줄도 모르고 일에 여념이 없을 시기다. 그러나 풍성한 들판을 보고도 웃지 못할 때가 있었다. 일제가 강제 병합한 1910년 이후 조선의 쌀 가격은 일본의 시장과 연동되어 일본이 쌀가격을 마음대로 책정하게 되었다. 지속되는 전쟁 속에 일본 국내에서 쌀 수요가 폭증하자, 일제는 1920년부터 1934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대대적인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했다. 산미증식계획의 명분으로 조선농촌의 경제적 향상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일본 국내의 쌀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을 식량기지화하는 것이었다. 일제가 역점을 둔 사업이 토지개량사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사업이 수리조합사업이었다. 쌀 증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리시설의 안정화와 경작지의 확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쌀 생산량이 증가하게 되면서 싼 가격에 일본으로 쌀 이출(移出)이 크게 늘어났다. 그 결과 조선은 극심한 식량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부 지주들은 배를 불리는 반면 대부분의 농민은 초근목피로 근근이 생활하였다. 부족한 조선인의 식량은 만주산 잡곡으로 보충하였지만,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식량문제가 점점 악화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수요를 억제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식량 절약 운동을 전개하여 조선인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빼앗긴 들에 봄이 올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티는 삶을 살았다. 불과 80여 년 전의 일이다. • 강동민 자료팀장
조선 전역의 신사(神社) 및 신사(神祠) 총목록(1)
[식민지 비망록 74] 조선 전역의 신사(神社) 및 신사(神祠) 총목록(1) 이순우 책임연구원 정리 지난달에 이곳 지면에 소개한 「식민지비망록 일흔 세 번째」 “식민통치기간에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일제 신사가 만들어졌을까?”라는 글을 통해 일제 때 무수하게 존재했던 일제 신사(神社, 진쟈)와 신사(神祠, 신시)의 조성배경과 허가추이, 그리고 지역적 분포에서 나타난 특징을 두루 살펴본 바 있다. 이때 신사조성 연혁의 기초자료로 삼기 위해 조선 전역의 신사목록을 함께 정리하였는데, 이번에 다시 그 내용을 두 차례에 걸쳐 일괄 공개하고자 한다.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 존재했던 신사의 총 숫자에 대해서는 보통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가 지은 <조선종전의 기록 ― 미소양군의 진주와 일본인의 인양(朝鮮終戰の 記錄 ― 米ソ兩軍の 進駐と 日本人の 引揚)>(1964), 108쪽에 수록된 것이 가장 유용한 근거자료로 사용된 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쉽게도 세부 목록 없이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부여신궁(扶餘神宮)을 포함하여 조선 전체의 각종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합쳐 모두 1,141개소(1945년 6월말 현재)가 존재했다는 집계표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관보>의 「휘보(彙報)」에 수록되는 ‘신사 창립 허가’와 ‘신사 설립 허가’의 내역을 전부 취합하더라도 그 숫자는 949개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다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의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에 정리된 신사 목록을 대조하여 누락분(49-3=46개소)을 가려내고 또한 <경기도보(京畿道報)>에서 확인한 사례(14개소)를 모두 합하더라도 1,009개소를 넘지 못한다. 요컨대 일제가 패망하던 바로 그 순간에 이 땅에는 모두 1,141개의 신사관련시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조선신궁과 부여신궁을 포함하여 모두 1,011개소만 그 구체적인 위치가 확인될 따름이고, 나머지
심산 김창숙 선생의 유품인 안경을 기증받아
[초점] 심산 김창숙 선생의 유품인 안경을 기증받아 • 방학진 기획실장 성균관대학교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인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의 안경을 손녀인 김주 여사와 외손주 김태욱님이 8월 27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김태욱님은 효창 독립커피를 기획한 연구소 후원회원이기도 하다. 김창숙선생의 안경테는 망실된지 오래되어 안경알만 김주 여사가 보관해 오던 것을 연구소가 전문업체에 의뢰하여 당시 안경테로 복원을 마친 것이다. 김주 여사는 “테가 망가져 버려 알만 남긴채 참 오랫동안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사하면서 안경알이 나왔다”면서 “기증처로 성균관대학교와 심산김창숙기념사업회를 생각하기도 했으나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심산 선생의 뜻을 잘 이어갈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날 안경을 기증받은 윤경로 식민지역사박물관장은 “심산은 선비의식을 끝까지 지키신 분”이라며 “그분의 한 몸과 같았던 안경을 우리 박물관에 보관함으로써 그 정신을 잘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기증식에는 성균관대 민주동문회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기증자료
[기증자료] •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 6월 21일, 이춘상기념사업회는 서화가 여태명 교수의 글씨 1점을 기증했다. 글씨의 내용은 “너는 환자들에게 못된 짓을 많이 하였으니 내 칼을 받아라!”로 이춘상 의사가 소록도 갱생원 원장 스오 마사스에를 처단하면서 외친 말이다. 이춘상 의사는 1916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40년 소록도갱생원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로 당시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인 갱생원 원장 스오를 처단하여 소록도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1943년 2월 19일 대구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 안미정 자료실 주임연구원 • 8월 17일, 중국 광동지부(지부장 김유)에서 <정률성 평전> 등 관련 도서 12권을 기증했다. • 9월 1일, 이건제 후원회원이 <함석헌 전집>, <우남노선> 등 도서 60권을 기증했다. • 9월 6일, 서승(일본 리츠메이칸대학 법학과 특임교수, 우석대학교 석좌교수, 동아시아평화연구소 소장) 후원회원이 평생을 수집한 도서 약 300박스를 기증했다. 1945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서승 교수는 도쿄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하던 중 1971년 4월 보안사에 불법 체포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당국의 공작에 맞섰고, 고문 수사를 받던 중 분신을 시도하 여 온몸에 중화상을 입었다.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동생 준식과 함께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0년 2월 28일 석방될 때까지 ‘비전향장기수’로 19년간 갇혀 있었고 석방 이후에는 리츠메이칸 대학 법학부 교수로 일하며 고문 반대운동 등 인권 운동을 벌였다.
2021년 근현대사기념관 학술회의 〈신간회, 식민지 조선의 ‘정치’와 운동〉 개최
[초점] 2021년 근현대사기념관 학술회의 〈신간회, 식민지 조선의 ‘정치’와 운동〉 개최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9월 3일 금요일,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며, 강북구와 한국역사연구회가 후원하는 2021년 근현대사기념관 학술회의 <신간회, 식민지 조선의 ‘정치’와 운동>을 개최하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신간회 해소 9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신간회의 ‘정치’운동과 조선총독의 정책에 대한 연구, 1920년대 좌우통합의 독립운동과 일제하 합법적 정치운동의 의미, 신간회에 참여하였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분석함으로써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의 동향에 대해 조명하는 자리였다. 학술회의는 임헌영소장의 개회사와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를 시작으로 Ⅰ부에서 주제발표 및 토론, Ⅱ부 종합토론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신간회, 식민지 조선의 ‘정치’와 운동> 학술회의 Ⅰ부는 심철기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실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제1주제 「일본 정당정치기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와 신간회」는 광운대학교 전상숙 교수가 발표하였다.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신간회가 일제하 ‘문화정치’시기 합법적 정치운동 단체로 결성될 수 있었던 ‘정치참여의 공간’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고 그것이 식민지시기 일본의 조선지배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분석하였다. 토론자 김민철 경희대학교 교수는 ‘정치’를 근대국민국가를 전제로 하는 좁은 인식에서 벗어나 광의의 개념으로 확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어서 제2주제 「신간회의 ‘민족동권’운동과 식민지배 체제의 균열적 성격」은 순천대학교 윤효정 교수가 발표하였다. 발표자는 재만동포운동으로 대표되는 신간회의 ‘민족동권’운동은 직접적인 식민지배 체제를 전복하고자 했던 반제투쟁은 아니었지만,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를 균열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반(反)식민주의적이었다고 분석하였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발표자가
일본 산업혁명유산 시설에 동원된 한국의 피해자 증언
[학술심포지엄 요지] 일본 산업혁명유산 시설에 동원된 한국의 피해자 증언 김승은 학예실장 지난 9월 18일,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주최한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묻다-7.22 유네스코 결정이란?”이라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제목에 나오는 “7.22 결정문”이란 제4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일본 정부가 ‘메이지 일본 산업 혁명 유산’에 관한 권고를 ‘완전히 이행하지 않은 것은 지극히 유감’이라며 채택한 결정문을 말한다. 이 결정에 앞서 유네스코와 이코모스(ICOMOS)는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하였다. 그리고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강제로 노역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해설이 충분하지 않다’,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적절한 전시가 없다’, ‘전체 역사에 관한 해설에 있어서도 비슷한 역사를 가진 다른 산업유산과 비교해 볼 때 강제 노역과 군사 목적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충분히 설명된 국제적 모범 사례에 미치지 못 하고 있다’, ‘(한·일 간에) 향후 대화가 중요하며 추구되어야 한다’라고 결론지었다. 일본 정부는 그 동안 ‘약속한 조치를 포함해 성실히 이행해 왔다’고 했지만 유네스코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따라서 이번 심포지엄은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를 유네스코 결정에 따라 개선하라고 촉구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이 심포지엄에서는 유네스코 결정문의 채택 배경과 의의, 산업유산정보센터의 문제점 등을 주제로 4개의 발표가 있었다. 그 가운데 김승은 학예실장이 발표한 ‘일본 산업혁명유산시설에 동원된 한국의 피해자 증언’을 요약해 소개한다. 이 발표문은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특별전을 위해 일본의 산업유산 시설에 동원된 피해자 구술 기록의 조사와 공개 과정에서 파악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기록의 현황과 문제점, 피해자 증언이 밝힌
추석에 떡을 금지한다 – 경고문
[소장자료 톺아보기 30] 추석에 떡을 금지한다 – 경고문 • 강동민 자료팀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 한여름의 땡볕을 이겨내고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수확의 계절인 가을. 달이 유난히도 밝은날에 우리는 풍요를 기리면서 햇곡으로 빚은 송편과 각종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이때는 오곡이 익는 계절로 모든 것이 풍성하고 즐거운 놀이로 밤낮을 보냈기 때문에 늘 이날처럼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빼앗긴 들에서 수확한 곡식으로는 풍성한 추석을 보내기 어려웠다. 1943년 9월 3일자 <경고문>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이 어떻게 추석을 보내야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경고문>은 1943년 추석을 맞이해 상주군 유도회와 상주군, 국민총력상주군연맹, 상주경찰서가 침략전쟁시기 전시생활 지침을 내린 문서이다. 5개의 문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경고문>은 1. 매일아침 궁성요배와 정오 묵도를 할 것, 2. 8월 15일 추석제사에는 절대로 떡을 장만하지 말 것, 3. 비용을 극도로 절약하고 관혼상제시 새 옷을 만들거나 떡을 절대 만들지 말 것, 4. 8월 15일, 기타 명절에는 새 옷을 절대로 만들어 입지 말 것, 5. 국민개로운동에 순응하여 부녀자의 옥외운동을 힘쓸 것(단, 몸뻬를 착용할 것) 등이 적혀 있다. ‘절미운동, 추석에 떡하지 맙시다’, <매일신보> 1939.9.25.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시국의 급박함’을 내세워 쌀을 아끼기 위해 추석에 떡을 하지 말 것을 선전하고 있다. 또한 경성부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등 각계 인사들의
식민통치기간에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일제 신사가 만들어졌을까? ‘1군 1신사(神社)’와 ‘1면 1신사(神祠)’의 건립을 강요하던 시절
[식민지 비망록 73] 식민통치기간에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일제 신사가 만들어졌을까? ‘1군 1신사(神社)’와 ‘1면 1신사(神祠)’의 건립을 강요하던 시절 이순우 책임연구원 2020년 정초 무렵에 경기도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옛 남면사무소) 앞에 일제 때 만들어진 비석 하나가 남아 있다는 얘길 듣고 서둘러 그곳을 탐방하러 길을 나선 적이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곳은 분명 ‘남면(南面)’인데 그 위치가 정작 양주시의 제일 북쪽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알고 봤더니 원래 이 지역은 경기도 연천군에 속했으나 해방 이후 1945년 11월 3일에 이르러 군정청 법령 제22호 「북위 38도 이남에 연접한 군촌면읍시(郡村面邑市)의 관할구역 임시이전」에 따라 ‘파주군 남면’으로 조정되었다가 다시 1946년 2월 5일 ‘양주군’ 관할로 이관 처리된 내력을 지녔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 이곳은 어디까지나 연천군 남면이었던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에 남아 있는 ‘히라누마 젠쵸(윤선장) 송덕비’의 모습이다. 1940년 11월에 건립된 이 비석은 신산체육공원과 남면사무소의 구내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친일잔재논란과 관련하여 2019년에 철거되어 별도로 보관중인 상태이다. 아무튼 양주시 남면행정복지센터의 창고 옆쪽에서 바닥에 뉘어놓은 옛 비석 하나를 살펴보았더니 거기에는 “학무위원 겸 면협의회원 히라누마 젠쵸 송덕비(學務委員兼面協議會員 平沼善長頌德碑)”라는 글씨가 또렷하다. 이를 단서로 관련 자료를 뒤져보니 이 이름은 윤선장(尹善長, 1879~?)의 창씨명이며, 그가 연천군 남면 상수리 구장(1937.6)을 지냈다거나 양주세무서 관내 조선주 제조업자 총회에서 탁주 1등상을 수상(1937.10)했다거나 연천군 남면 면협의회원(1939.5)의 당선자라거나 하는 등의 경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비석의
잊혀진 ‘뭉우리돌’을 찾아 나선
[인터뷰] 잊혀진 ‘뭉우리돌’을 찾아 나선 -김동우 작가 인터뷰 : 방학진 기획실장 정리 : 김혜영 선임연구원 ‘뭉우리돌’의 사전적 의미는 ‘모난 데가 없이 둥글둥글하게 생긴 큼지막한 돌’이다. <백범일지>에서 차용한 이 단어는 독립운동 정신을 상징한다.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 선생은 일본 순사가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자신을 협박하자 이 말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며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했다. 올곧은 일에 생을 바치고자 했던 뭉우리돌들, 전 세계 곳곳에 굳건히 박혀 대한 독립을 일궈낸 뭉우리돌의 역사. 독립기념관 자료를 샅샅이 뒤져 주소 한 줄, 사진 한 장으로만 남은 국외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다니며 사라져가는 역사의 현장과 그곳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사진과 글로 남긴 김동우 작가를 만나보았다. 김동우 작가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신문사 기자로 일했으며 세계 60 여개국을 여행했다. 중국, 인도, 멕시코 등 10 여개국의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 200여 곳을 직접 방문, 카메라로 기록해 2019년 사진집 <뭉우리돌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그 후 독립운동사적지와 그곳에 사는 후손을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개인전과 단체전을 여러 차례 개최했다. 지난 5월 18일부터 강북구의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 특별 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를 열고 있으며, 최근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의 우리 독립운동 유적지를 다룬 <뭉우리돌의 바다>를 펴냈다. ●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기억, 잃어버린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후원회원 마당]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집는 듯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1년 365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구곡을 끊어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간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 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區) 안에 있다.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당시 코뮨 때에 희생된 5천여 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 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