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부산동부경찰서 앞에 터를 잡은 ‘부산진매축기념비(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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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3]

부산동부경찰서 앞에 터를 잡은 ‘부산진매축기념비(1939년)’
부산진(釜山鎭) 매립공사가 그토록 느릿느릿 진행된 까닭은?

이순우 특임연구원

경부선 KTX 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 부산지하철로 갈아타고 초량역과 부산진역(8번 출구 방향)을 경유하거나 직접 도보로 2킬로미터 남짓 북쪽을 향해 이동하면 그곳에서 ‘동구문화플랫폼’이라는 이름의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곳은 그 옛날 완행열차 ‘비둘기호’의 종착역으로 사용되던 경부선 ‘부산진역사’를 리모델링한 문화공간이다.

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1905년 1월 1일 경부철도 전통영업(全通營業; 남대문~초량 구간)이 개시될 때부터 존재했던 부산진역(釜山鎭驛)은 원래 지금의 자리보다 1리(哩, 마일) 즉, 1.6킬로미터 더 위쪽에 있었다. 그러다가 부산진 매축지가 새로 조성되자 이쪽으로 선로를 이설하고 역사(驛舍)를 신축 이전하여 영업을 재개한 것이 1920년 10월 15일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다시 눈길을 돌려 길 건너편 약간 대각선 방향으로 살펴보면 부산동부경찰서가 곧장 눈에 띈다. 바로 이곳에도 이 일대가 매립지를 기반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알려주는 일제 기념물이 하나 남아 있는데, 경찰서 정문 옆 북동쪽 모서리에 터를 잡고 있는 ‘부산진매축기념비(釜山鎭埋築記念碑, 1939년 4월 건립)’가 바로 그것이다.

부산진 매축공사를 맡았던 조선기업주식회사의 회사설립 관련사항이 들어 있는 『조선총독부관보』 1912년 10월 7일자의 등기내용이다. (왼쪽) 조선기업주식회사가 주주임시총회의 결의를 통해 해산하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조선총독부관보』 1923년 10월 3일자의 등기내용이다.

이비석을 보고 있노라면 무엇보다도 전면 좌측에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씀(朝鮮總督 南次郞書)’이라는 표시가 버젓이 남아 있는 것이 퍼뜩 눈에 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미나미 총독(南總督, 재임 1936.8.5 ~ 1942.5.29)이라고 하면 국체명징(國體明徵), 선만일여(鮮滿一如), 교학쇄신(敎學刷新), 농공병진(農工倂進), 서정쇄신(庶政刷新)이라는 통치의 5대강령(五大綱領)을 앞세워 내선일체, 국어상용(國語常用; 일본어상용), 황국신민서사, 창씨개명, 지원병제도를 비롯하여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위한 전시체제의 구축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무수한 고통과 핍박을 가했던 장본인이 아니던가 말이다.

이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비문의 내용을 보면 일찍이 1912년 이후 일본 나고야(名古屋)에 근거를 둔 조선기업주식회사(朝鮮起業株式會社)라는 것이 주축이 되어 부산진 앞바다의 매립에 착수한 연유와 공사의 경위 및 그 결과 등에 대한 구절이 축약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은 여기에 상당한 서술 오류가 눈에 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들이 조성한 매립지의 전체 면적이 “40여 만 평”이라 하였으나, 이것은 최초의 계획면적이었을 뿐이고 이 회사의 손으로 완성된 땅은 실상 그 절반에도 훨씬 미치질 못하였다. 그리고 “회사를 해산시킨 것은 실로 소화 12년(1937년) 4월 23일이었다”고 적은 대목 역시 전후 맥락을 잘못 서술한 구절로 보인다. 실제로 이 회사의 해산결의가 이뤄진 때는 1923년 8월 28일이었으며 그 이후 이익배당(利益配當)을 마치고 한동안 청산인(淸算人)을 둔 상태로 유지되었는데, “1937년 해산 …… 운운” 하는 부분은 아마도 그러한 청산절차가 완전히 마무리된 시점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닌가도 싶다.

원래 부산진 지선(地先; 경계수면) 매립공사의 시초는 대한제국 시기에 통감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1864~1935)라는 일본인이 1908년 11월 12일부로 부산진 해면매축의 권리[융희 2년 11월 12일 토(土) 제1929호 면허분]를 획득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에 나오는 스기야마는 범(凡)아시아주의를 표방하던 일본의 우익결사체 현양사(玄洋社)의 책사(策士)이면서 특히, 송병준과 이용구가 이끌었던 일진회(一進會)의 고문으로도 활동했던 이였다.

그의 수중에 있던 이 권리는 매립지가 완성되면 그 일부를 조선총독부가 철도용지(鐵道用地)로 매입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확약받은 상태에서 1912년 9월 10일에 설립된 조선기업주식회사(자본금 3백만 원)로 넘어갔고, 그러한 조건에 따라 비로소 매축공사가 착수되기에 이른다. 이 당시 매립공사는 하야카와구미(早川組)가 청부(請負)를 맡아 진행하였으며, 매립토(埋立土)의 조달은 조선총독부가 추진하던 항만설비공사과정에서 나온 준설토(浚渫土)와 더불어 고관(古館), 부산진(釜山鎭, 동서 양쪽), 마비현(馬飛峴)의 산자락을 토취장(土取場)으로 삼아 경철(輕鐵)과 도록코(トロッコ, 광석화차)로 운반한 토사(土砂)를 공급받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러한 공사진행의 결과에 대해서는 『조선공론(朝鮮公論)』 1916년 11월호에 수록된 「누차 오야 장관(大屋長官)을 논란(論難)하며 철도국(鐵道局)의 개혁(改革)을 촉구한다」 제하의 글(44~45쪽)에 다음과 같이 요약된 내용이 남아 있다.

…… 대정 원년(1912년) 11월로써 그 제1기 공사를 기공(起工)했다. 그리고 그 공사계획은 제1기 13만 5천 평(坪), 제2기 17만 평, 제3기 9만 5천 평의 3기(三期)로 나눠 제1기 계획은 대정 5년(1916년) 6월 준공, 제2기 계획은 동(同) 8년(1919년) 10월 준공, 제3기 계획은 동 10년(1921년)으로써 준공의 예정으로 착수되어, 이 가운데 제1기 공사는 준공과 동시에 조선철도국과의 예약(豫約)에 따라, 철도용지로서 동국(同局)에 매도하였고 제2기 이후의 매축지는 훗날 어떠한 공업용지(工業用地)로 이용시킬 기획(企劃)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런데 회사는 본년(本年) 4월 제1기 계획 13만 5천 평 가운데 가까스로 8만 평의 준공을 보게 되자 어쩐 일인지 창황(倉皇)하게 이를 철도국에 매도하였고, 상무취체역으로서 항상 부산 본사에 머물렀던 타카하시 카츠치카(高橋克親) 씨는 그 취인(取引, 거래)을 마치자마자 곧장 부산에서 철수하여 향리(鄕里) 나고야로 넘어갔으며 최근 오야 장관의 동상(東上)을 듣자 그 자취를 따라 도쿄로 올라갔다. (하략)

이와 같이 120만 원에 달하는 거액의 철도용지 매각대금이 유입됨에 따라 이 회사는 단기간에 막대한 이윤(利潤)을 실현하게 되었지만, 정작 문제는 그 다음의 공사가 전혀 착수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잔여구역에 대한 매립을 진행시키더라도 당장에 이 땅에 대한 새로운 수요처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이유였고,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더 나은 수익이 발생하는 다른 업종(가령, 금광 등)에 자본을 투자하는 것이 낫다는 나고야 자본세력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 식민지 조선에 2개 상주사단(常駐師團)의 증설계획과 맞물려 육군성(陸軍省)을 상대로 하여 일본군 상륙장 및 창고건설지(倉庫建設地) 등의 용도로 사전에 매각교섭을 벌였으나 모두 불발되자 더 이상의 매립공사는 전혀 진척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히려 조선기업주식회사는 노골적으로 이익회수만을 추구하는 길을 밟아 나갔는데, 이러한 작업은 대략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 바 있었다.

첫째, 1917년 12월 24일에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감자(減資)를 결의하여 자본금을 300만 원에서 200만 원으로 줄이는 방식으로 투자이익을 회수하였다.

둘째, 1923년 8월 28일에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조선기업주식회사의 ‘해산(解散)’을 결의하였다. 이 당시 청산인(淸算人)으로는 타카하시 카츠치카(高橋克親)가 선임된 바 있다.

셋째, 곧이어 이 회사는 1923년 10월 18일부로 부산진 지선(地先) 제2기 및 제3기 매립허가(213,962평)에 대해 “공사폐지의 지(旨)를 계출(屆出)”함으로써 자진하여 허가취소를 받아냈다.

여기에 더하여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던 제1기 공사의 잔여구역에 대한 매립 역시 아주 지지부진한 상태로 방치되다시피 하였는데, 그 사이에 공사완료의 유효기간이 도래할 때마다 이를 거듭 연장하거나 매립면허 자체도 효력 상실과 부활을 반복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관계 당국에서는 조선기업주식회사의 이러한 행태를 질타하는 동시에 매립의 완성을 위해 더욱 강경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한편, 『경성일보』 1928년 4월 20일자에 수록된 「시가(時價)로 어림잡아 대략 2백만 원(圓) (2), 부산진(釜山鎭)의 매축(埋築)에 얽힌 조선기업(朝鮮起業)의 방촌(方寸, 속마음)」 제하의 기사에는 부산진 매축공사와 관련하여 그동안의 진행상황을 정리한 내용이 이렇게 남아 있다.

…… 회사는 이 제1기 매립공사 13만 4천 평의 착공에 대해서는 우선 가장 유망하다고 여겨졌던 부산(釜山)에 접근한 방면으로부터 착공했던 것인데, 공사는 느릿느릿하여 진척되지 않아 대정 4년(1915년)부터 11년(1922년) 12월까지의 기간, 햇수로 8개년에 걸쳐 11만 628평을 완성시켰고, 여전히 2만 3,377평의 미준공지(未竣工地)를 남겨두고 있지만 일방(一方) 회사는 축차적으로 매축공사의 완성에 따라 본부(本府)로부터 소유권 부여(所有權 附與)를 신청하여 권리를 취득했던 바의 완성면적 11만여 평 가운데 약(約) 8만 평은 당초의 당국과의 조건에 따라 15원 30전의 할합(割合, 비율)으로 이를 철도용지(鐵道用地)로 매각하여 122만 4천 원을 수취(手取)하게 되자, 회사는 당시의 노은(勞銀, 품삯)이 싸고 경비를 공제하여 비상(非常)한 판익(判益)을 점(占)하자마자 곧장 대정 12년(1923년) 9월경이 되어 해산(解散)의 수속(手續)을 취하면서 타카하시 카츠치카(高橋克親) 씨는 청산인(淸算人)으로서 마지막 이익배당(利益配當)을 한 채로 조선기업회사의 조직은 말소(抹消)되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미완성의 토지로서 남겨진 5만 평의 토지는 시가지 구획할(市街地 區劃割), 도로(道路), 교량(橋梁), 하수구(下水溝) 등이 지금껏 미착수(未着手) 뿐만 아니라 성토(盛土)에 부적한 부분 등이 있어서 매립조건을 구비치 못한 탓에 융희(隆熙) 2년(1908년) 이래의 공사는 아직도 완성을 고하기에 이르지 못하였고 잔여의 미완성지는 권리부여(權利附與)를 보는 것에 이르지 못하여 허송세월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그사이에 처하여 당국은 도시계획상은 물론 교통시설 상으로 대지장(大支障)을 가져오고 있으므로 이러한 부도합(不都合, 불편함)에 대해 어떤 방법을 취하고, 회사는 여하한 방촌(方寸)을 나타낼지를 보는 것도 또한 흥미 있는 사실이다. (부산)

이와 관련하여 『조선총독부관보』에 게재된 ‘공유수면매립’과 관련한 처분사항을 취합해 보면, 조선기업주식회사의 부산진매축공사와 관련한 항목으로는 대략 다음의 것들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1928년 1월 23일, 부산진 지선 매립준공 연장허가, 면적 28,736.9평, 연장허가기간 1928년 8월 31일, 조선기업주식회사 청산인 토미타 쥬스케(富田重助), 대정 13년(1924년) 11월 18일 토(土) 제648호 면허효력부활분.
△1928년 9월 1일, 부산진 지선 매립면허 효력상실(기한내 미준공), 시가지 조성 목적, 면적 28,736.8평, 조선기업주식회사 청산인 타카하시 카츠치카(高橋克親), 융희 2년 11월 12일 면허분.
△1928년 10월 31일, 부산진 지선 매립면허 효력부활, 시가지 조성 목적, 면적 28,736.8평, 준공기간 1929년 5월 31일, 조선기업주식회사 청산인 타카하시 카츠치카, 융희 2년 11월 12일 면허(1928년 9월 1일 실효분).
△1929년 7월 18일, 부산진 지선 매립 준공인가, 시가지 조성 목적, 면적 민유(民有) 28.930평, 조선기업주식회사 청산인 타카하시 카츠치카, 융희 2년 11월 12일 토(土) 제1929호 면허분.
△1929년 8월 28일, 부산진 지선 매립 준공인가, 대지조성 목적, 면적 민유(民有) 21,119.5평 및 국유(國有) 200평, 조선기업주식회사 청산인 타카하시 카츠치카, 융희 2년 11월 12일 면허분.

부산진매축주식회사가 부산개항 50주년 기념일에 맞춰 사이토 총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는 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26년 11월 2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조선기업주식회사가 미완성인 채로 남겨놓았다가 허가취소절차까지 밝았던 잔여구역은 바로 이들에 의해 매립공사가 이뤄졌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기업주식회사는 부산진매축기념비에 새겨놓은 것처럼 40여 만 평의 매립지를 조성한 것이 아니고 — 1929년 8월에 2만여 평의 매립준공인가를 받을 것까지 다 합치더라도 — 대략 13만 평을 약간 넘는 정도의 공사실적만을 남긴 것으로 드러난다. 이에 따라 — 1923년 10월에 조선기업주식회사가 스스로 허가취소절차를 이미 완료했던 — 잔여구역에 대한 매립공사는 전혀 새로운 공사주체가 등장하여 1925년 8월 12일자로 발부된 별도의 공유수면 매립면허를 통해 재착수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관한 내용은 『조선총독부관보』 1925년 8월 27일자의 「조선공유수면매립령에 의한 처분사항」 항목에 게재되어 있는데, 여기에 기술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5년 8월 12일 토(土) 제248호 매립면허, 부산진 및 동래군 서면 지선(地先), 면적 342,585평(坪), 공장부지 및 시가지 조성 목적, 착수기간은 실시설계인가일로부터 6월 이내, 준공기간은 실시설계인가일로부터 5년 이내, 면허취득자 : 아사노 소이치로(淺野總一郞), 조선선거공업주식회사(朝鮮船渠工業株式會社), 코구치 케사키치(小口今朝吉), 나카무라 쥰사쿠(中村準策) 등 4인.

곧이어 1926년 10월 26일에는 이들 가운데 나카무라 쥰사쿠를 대표취체역으로 삼아 일본 도쿄에서 새로 조직한 부산진매축주식회사(釜山鎭埋築株式會社; 자본금 3백만 원)의 창립총회가 있었고, 특히 부산개항(釜山開港) 50주년 기념일에 해당하는 11월 1일에 맞춰 사이토 총독(齋藤總督)이 몸소 참석한 가운데 이들에 의해 성대한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하지만 당초 34만여 평이었던 계획면적은 실시설계 인가과정에서 지질(地質) 관계와 공사시행의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 31만여 평으로 축소 조정되었다. 그사이에 아사노 소이치로 외 3명에게 부여된 공유수면 매립면허(305,690평)는 1927년 6월 1일부로 부산진매축주식회사로 양도되는 과정이이어졌다. 그 이후 1934년 11월 21일에 이르러서는 제2호지에 해당하는 152,333평에 대해 이를 따로 떼어 이케다 사츄(池田佐忠) 외 1명에게 양도허가가 이뤄졌고, 다시 이 가운데 A구역(41,252평)에 대한 면허가 1936년 9월 10일부로 대동석유주식회사(大東石油株式會社)의 수중으로 넘겨진 것 으로 확인된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신문』 1936년 2월 26일자에 수록된 ‘부산개항 60주년 기념일’ 특집기사에 포함된 「서면 지선(西面 地先)의 매축, 부산진매축주식회사」 및 「아카사키만(赤崎灣) 수축사업」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이 지역의 매립공사 진행과정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 매립개소(埋立箇所)는 범일정(凡一町) 및 동래군(東萊郡) 서면 지선 공유수면(公有水面) 313,215평으로 그 가운데 제1호지(第一號地) 162,055평은 이미 준공하였고, 또 아카사키만(赤崎灣) 수축 제2기 계획은 전적으로 부산축항회사(釜山築港會社)에 이양(移讓), 잔부(殘部)를 현재 공사중이다.
…… 이케다(池田) 씨는 소화 9년(1934년) 부산진매축회사로부터 제2기 계획을 승계하였고, 총공비 약 백만 원, 총매축면적 12만여 평 내(內) 유효지(有效地) 약 10만 평, 철도연장 약 1마일, 안벽(岸壁) 연장 약 1,800칸(間) 외에 선류(船溜) 및 저목장(貯木場)으로 부족함이 없는 면적을 지닌다. 동년(同年) 4월 22일 기공식 뒤에 순조롭게 진척, 전공사(全工事)의 완성은 소화 12년(1937년) 3월 예정인데, 해저(海底)는 25척(尺) 내지 30척의 준설(浚渫)을 하여 5천 톤급(噸級) 선박의 착발(着發)을 자유롭게 할 계획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제1호지 162,055평이 이미 완공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상은 1935년 10월 3일부로 부산진매축주식회사가 38,827평에 대한 매립준공인가를 받았다는 사실만 확인될 따름이다. 그리고 잔여구역인 제1호지의 2(121,426평)에 대해서는 1941년의 시기에 이르도록 거듭하여 매립준공기간 연장허가를 받았다는 내역이 눈에 띄므로, 지금으로서는 정확한 완공시점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케다 사츄의 부산축항합자회사(釜山築港合資會社; 1938년에 주식회사로 전환) 쪽으로 넘어간 제2호지 매립공사는 1936년 7월 8일 이후 1937년 7월 16일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모두 88,509평에 달하는 면적이 매립준공인가를 받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들 지역은 준공인가 직후 경상남도 고시 제111호(1937년 7월 27일)를 통해 ‘적기통(赤崎通, 아카사키토리) 1정목(丁目), 2정목, 4정목, 5정목’이라는 새로운 정명(町名)을 부여받게 된다.

이상의 내용에 비춰보면, 부산진매축기념비의 비문에 새겨진 “40여만 평의 준성 …… 운운”하는 부분은 사실관계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구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부산진매축공사의 주체로 보더라도 조선기업주식회사 → 부산매축주식회사 → 부산축항주식회사의 순서로 거듭 바뀌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를테면, 저 자리에 남아 있는 ‘부산진매축기념비’는 식민통치권력과 결탁하여 가장 먼저 식민지 경영의 단물을 취하고 사라졌던 나고야 지역의 자본가세력이 자신들의 공적을 아주 심하게 뻥튀기하여 남겨놓은 일제 기념물의 하나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이면, 부산 지역에는 일제강점기에 이뤄진 항만매립공사와 관련한 일제 기념물이 한 군데 더 남아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지금은 엉뚱하게도 ‘충무공 이순신 영모비(忠武公李舜臣永慕碑; 1958년 4월 26일 제막)’로 둔갑하여 부산 대신공원 입구에 세워져 있는 비석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원래 1940년 12월 15일에 대정공원(大正公園; 지금의 부산광역시 서구청 자리 일대) 아래 로타리의 중심부에 건립된 ‘남항수축기념비(南港修築記念碑)’의 비면을 깎아내어 재활용한 것인데, 이 비석을 세운 당사자가 바로 ‘아카사키만’ 일대의 매립공사를 주도했던 이케다 사츄였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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