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장항습지 지뢰폭발사고를 당한 김철기 회원, 어려운 역경을 딛고 생명・평화운동가로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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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4일 오후 5시 연구소 3층 회의실에서 김철기 회원, 민병래 회원, 방학진 기획실장,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등이 모여 김철기 회원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가졌다. 6월 4일 사고 이후 오랜 기간 치료와 재활 과정을 거쳐 씩씩한 모습으로 연구소를 찾은 김철기 회원을 보니 참으로 반가우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 2021년 12월 4일자 기사 「민병래의 사수만보 65화」 “내 발이 없네, 내 발이…” 발목지뢰로 오른발을 잃은 김철기를 전재한 것이다. 어려운 처지에도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준 김철기 회원과 기사 전재를 허락해준 민병래 회원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 편집자

지난 6월 4일 오전 9시 45분 펑 소리와 함께 작은 모래기둥이 솟구쳐 오르며 김철기의 몸은 뒤로 튕겨져 나갔다. 매캐한 먼지로 주변이 어지러웠다. 누군가 “철기씨, 이를 어째!” 하며 악을 썼다. 순간 정신을 차린 김철기는 몸을 일으켰는데 오른쪽 다리의 무릎 아래가 형체도 없이 바스라졌고 피범벅이 된 살점과 뼈가 너덜거렸다. 그는 소리쳤다, “내 발이 없네, 내 발이…”

함께 작업을 하던 동료들은 안절부절하며 김철기를 평평한 곳으로 옮겼다. 폭발로 살점과 핏줄이 엉겨 붙은 탓인지 피가 줄줄 흐르는 정도였다. 그들은 수건을 동여매 지혈을 하고 119에 출동을 요청했다. 한편 9사단 한강대대, 고양시 환경정책과, 한강유역환경청 등 여기저기에 연락을 했다. 근처에 있던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고양지부장 박평수는 오전 9시 47분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한강’의 조합원 김철기는 이날 장항습지에서 쓰레기를 치우다가 갈대밭에 있던 발목지뢰를 밟은 것이다. M14라 불리는 이 지뢰는 미군이 1950년대 초반부터 사용했는데 살짝만 밟아도 작은 폭풍을 일으키며 무릎 아래를 산산조각 낸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발목지뢰는 한국전쟁 후반기부터 도입되었는데 종전 후에는 DMZ 일대에 80만 발 이상을 뿌리듯 심었기에 아예 매설지도가 없다. 이 지뢰는 참치캔 정도의 크기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무게가 100g도 채 안 된다. 때문에 장마철이면 인제·양구지역이나 연천·철원지역에서 계곡을 따라 인근 마을이나 한강하구로 떠내려 온다. 

2020년 여름 큰 비가 내렸을 때 철원의 이길리 마을에선 논밭이나 골목길 여기저기에 지뢰가 널려 있어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고양시에서도 대덕생태공원, 행주산성 역사공원에서 발견되었고 김포대교 아래서는 70대주민이 김철기와 똑같은 사고를 당했다.

발목지뢰를 밟은 김철기가 이송되는 장면 사고는 올해 6월 4일 발생했다. ⓒ 일산소방서 제공

유엔과 국제적십자사는 전 세계 60여 개국에 1억개가 넘는 대인지뢰가 사용되고 있고 이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된 민간인이 해마다 수만 명이나 되며 특히 어린이들이 장난감 삼아 놀다가 많이 다쳤다고 밝혔다. 이런 까닭에 1997년 캐나다의 오타와에서는 대인지뢰의 사용·비축 및 폐기에 관한 국제협약이 체결되었다. 2013년까지 161개국이 서명했지만 우리는 남북 대치를 이유로 비준을 거부하고 있어 대인지뢰 제거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급대를 기다리는 동안 김철기는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한편 시간이 흐르면서 통증은 더욱 심해져 갔다. 그는 옆에서 돌보던 동료들을 붙잡고 “차라리 나를 죽여줘 더 이상 못 참겠어” 하면서 부르짖었다.

박평수 지부장은 울부짖는 김철기를 다른 조합원에게 맡기고 소방대원을 맞으러 통문 쪽으로 뛰어갔다. 2018년 7월까지 장항습지는 9사단 관할이었다. 이후 국가습지이기에 한강유역환경청으로 넘겨졌지만 통문 출입은 여전히 한강대대의 통제하에 있어 ‘한강’ 조합원들은 아침마다 비밀번호를 전달받고 들어 와 작업을 했다. 그래서 소방대원이 들어오려면 통문을 따줘야 하고 사고 지점까지 인도를 해야 했다.

박평수가 통문에 다다랐을 때 마침 소방대원들이 도착했다. 하지만 지뢰가 터졌다는 말에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박평수는 “여기는 우리가 고양시와 한강유역청 의뢰를 받아 3년간 정화작업을 하면서 오갔던 길입니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밟은 대로만 따라오세요” 하며 소방대원들을 이끌었다.

소방대원이 도착하자 김철기는 들것에 실려 두 개의 갯골을 넘고 높낮이가 있는 언덕을 오르내렸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김철기는 이를 악물었다. 소방대원들이 소독제를 뿌리고 붕대로 감싸면서 상처를 건드린 탓인지 무릎 아래를 찢어발기고 쇠꼬챙이로 쑤시는 것 같았다. 

박평수는 거듭 소방대원들에게 요청했다. “경기북부권역 응급센터인 의정부성모병원으로 가야 하니, 헬기를 대기시켜야 한다. 곧바로 출발할 수 있게 통문에 모여 있는 군부대차량, 경찰차량을 정리해달라” 등등. 그렇게 해서 김철기가 의정부성모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게 낮 12시경, 길고 긴 2시간 15분이었다.

의족을 맞추고 재활에 나서다

8월 12일 아침, 퇴원한 날로부터 열흘 만에 김철기는 택시를 타고 처음으로 외출했다. 가는 곳은 신월동의 한 의족업체. 김철기는 카본 재질로 발목이 굽혀지고 재활에 따라 27도의 비탈길까지 오를 수 있는 의족을 맞췄고 이날이 처음 끼어보는 날이었다. 김철기가 사고를 당하자 고양 파주 지역의 시민단체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한림대학교 사학과 85학번인 그는 대학에 들어가 김병걸의 <친일문학작품선집>(실천문학사)을 읽고 큰 충격에 빠졌다. 이 책에는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모윤숙 등이 천황과 내선일체를 찬양하고 일본군대에 지원하라고 선동하는 글들이 담겨 있었다.

그때부터 김철기를 사로잡은 것은 친일청산. 자연스레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의 회원이 되었고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 지부의 대표를 맡았다. 김철기는 2011년 파주시에서 간도특설대 출신 친일파 백선엽의 동상을 임진각에 세우려 할 때 시민사회의 힘을 모아 이를 저지해냈다.

또 2020년부터는 장항습지의 정화사업에 참여했다. 장항습지는 고양시의 노력으로 2021년 봄 람사르습지에 등록될 정도로 보존가치가 높은 곳이다. 하지만 여러모로 사람 손이 절실했다. 우선 생태교란종인 가시박과 단풍잎 돼지풀이 문제였다. 가시박은 장항습지의 갯버들을 비롯한 버드나무를 넝쿨처럼 뒤덮어버려 말라 죽게 했다. 단풍잎 돼지풀은 1년생 풀인데도 조금만 놔두면 나무 수준으로 자라면서 알레르기를 일으켰다. 생태계를 지키려면 이들을 제거해야 했다.

또 상류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서해 바다를 만나면서 흐름이 느려져 온갖 쓰레기가 갯골과 갈대숲에 쌓였다. 페트병과 같은 생활쓰레기는 말할 것도 없고 밧줄과 그물같은 어구, 타이어나 냉장고 같은 폐기물도 있었다. 이를 김철기, 박평수 같은 한강의 조합원들이 시민들의 생태탐방로를 개척하면서 수거작업을 해 온 것이다.

그런 김철기였기에 고양YMCA·고양시공무원노조·고양YWCA 등 20개 가까운 단체는 ‘장항습지 지뢰폭발대책회의’를 만들고 그를 위한 모금 활동을 벌였다. 무려 3,000만 원이 넘는 성금이 걷혔고 덕분에 비급여의료비와 간병비, 의족비가 해결되었다.

김철기는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장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실에서 ⓒ 민병래

김철기는 의족업체에서 평행봉을 잡은 채 두 시간 정도 걷는 연습을 했다. 의족과 다리가 만나는 부위에 몸무게의 압박이 가해지니 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물집이 많이 잡혀 있었다.

김철기는 “혹시 덧나서 잘못되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1차 수술을 마친 후 소독을 할 때마다 의사의 표정은 어두웠다. 열흘쯤 되어 실밥을 뽑을 때 담당의사는 “살이 죽어가고 있어 2차 수술을 해야 합니다. 조금 더 끊어내야 하고 무릎 위까지 자를 수도 있습니다”라고 메마른 소리를 내뱉었다. 김철기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1차 수술 후 열흘 정도 중환자실에서 겪었던 아픔은 폭발을 당한 직후보다 더 컸다. 진통제를 놓아도 고통이 가라앉지 않아 거의 잠을 못 잤다. 그 과정을 다시 겪을 걸 생각하니 끔찍했다. 게다가 무릎이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재활의학과에서 말했는데 무릎마저 끊어낸다면 어찌하란 말인가?

그는 2차 수술을 마치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무릎이 달려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미심쩍어 손으로 만져보기까지 했다. 그러니 잘린 부위에 물집이 잡혔을 때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물집은 며칠 동안 일어났다 터졌다를 반복하며 조금씩 굳은살이 잡혔다. 김철기는 매일 연습을 해야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의족을 바라보면 “오늘도 저 놈을 또 껴야 하나? 이렇게 고통스레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회의가 들었다.

또 생길 수 있는 지뢰사고 근본대책 있어야

김철기를 더욱 힘들게 한 건 경찰과 군이었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 후 일산동부경찰서로부터 피해자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수사를 마치고 뜻밖에도 고양시 환경정책과의 과장·팀장·주무관, 그리고 한강유역청의 직원 둘, 아울러 박평수 지부장을 ‘업무상과실치상’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2020년 여름 큰비가 왔을 때 한강유역환경청과 고양시는 지뢰가 떠내려왔을 수 있으니 예산을 지원하며 9사단에게 탐색을 요청했다. 군은 주요 탐방로가 될 지역과 농경지 선착장을 중심으로 수색했고 특이사항이 없다고 통보했다. 장항습지 정화활동은 군의 탐색을 믿고 진행한 것인 만큼 김철기는 “지뢰의 설치와 관리는 군대의 몫인데 일반 행정기관을 희생양으로 삼는 듯한 태도” 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김철기에게 힘이 되어준 게 주변의 격려와 응원. 얼굴도 모르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전국에서 격려 전화와 문자를 보내줬고 ‘한강’ 조합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다. 미국에서 살던 누나는 코로나19를 뚫고 달려왔다. ‘대책회의’에선 모금만이 아니라 경찰의 수사결과와 군의 미온적인 태도를 꾸짖고 나섰다.

지뢰평화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북이 매설한 지뢰 총량은 약 200만 개, 주로 전방에 집중되어 있지만 대공부대나 공군기지 주변에도 심어져 있어 후방 지역인 서울 우면산, 김포 장릉산, 여주의 신지리, 나주 금성산 같은 곳에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부산 중리산 같은 경우는 미군이 1956년에 미사일기지를 만들 때 기지를 보호한다며 아예 비행기로 지뢰 수만 발을 살포했다. 1993년 기지가 철거된 후 지뢰를 제거했지만 1998년에 산불이 났을 때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관이 남아있던 지뢰 폭발로 큰 부상을 입었다.

2015년 4월 ‘지뢰 피해자 보상 특별법’이 2년 한시법으로 통과되었는데 제대로 홍보가 안 되었음에도 보상신청을 한 민간인이 536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렇듯 전방만이 아니라 후방에서 많은 민간인이 지뢰피해를 당하지만 군 당군은 근본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장항습지 통문 앞에서 김철기. 정화활동을 하려면 두 개의 통문을 지나야 한다. ⓒ 민병래

민간인이 지뢰피해를 당하지만 군 당군은 근본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현재 국방부가 운용하는 지뢰제거부대가 1년에 수거하는 지뢰 수는 500개 미만. 국방부는 2018년 10월 유해발굴작업을 위해 DMZ 내 화살머리고지 남측 지역(0.16㎢)에서 지뢰 제거작업을 했다. 이때 20일이 걸렸는데 DMZ 전체 면적이 907㎢임을 감안하면 지뢰를 완전 제거하는데 수백, 수천 년이 걸리는 셈이다. 그래서 오타와협약에서는 지뢰제거를 국방부서에서만이 아니라 범정부차원에서 협력하고 광범위한 (군에서 전역한) 민간 전문가를 동원해 신속한 제거를 하라고 제안한다. ‘대책회의’는 국방부가 김철기 씨를 비롯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고 문재인 정부가 신속하게 오타와협정에 가입해 민간인 피해의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할 때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철기가 의족을 차고 열흘쯤 되었을 때 신기한 변화가 찾아왔다. 의족을 끼었는데 아프지 않고 몸에 착 붙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목발을 짚고 연습시간을 늘렸다. 비 오는 날은 한손에 우산을 들고 한쪽만 목발을 짚고 해봤다. 걷는 데 지장이 없었다. 다음 날은 아예 목발 없이 걸어봤다. 문제가 없었다. 그 다음 날부터는 다소 경사진 곳을 걸어봤다. 해낼 수 있었다.

인생의 2막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의족을 끼기 전 독한 결심을 했다. 바로 술 담배를 끊는 일. 김철기는 ‘술의 신’을 모시고 살았다. 거의 하루도 술을 거른 날이 없었고 술친구가 없으면 집에서 소주 한두 병이라도 마시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발 하나를 잃고 보니 새벽에 화장실을 가는 게 큰일이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목발을 짚자니 화장실 물기가 겁났고, 기어가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불과 열 걸음도 안 되는 거리가 태산 같은 길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또 잠결에 오른쪽 종아리가 가려워 손을 뻗으면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환상통까지 나타난 것이다. 김철기는 장애를 안고 살아가려면 생활습관부터 변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덕분에 퇴원 이후부터 단 한 번도 입에 술을 대지 않았다.

친일청산에서 생명, 평화운동가로

그 어렵다는 금주를 해내고 걸음까지 내딛게 되니 새로운 인생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김철기는 그때부터 살아갈 방향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다. 그는 2019년 운영하던 자영업을 접고 장항습지 정화활동을 하며 받는 일당이나 이런저런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왔다. 현재 산재로 인정되어 하루 69,700원의 휴업급여를 2022년 1월 28일까지 받게 된다. 그 이후부터 생계는 불안하다. 장애를 안게 되었으니 육체노동은 쉽지 않을 것이다. 비 오는 날은 몸이 쑤시고 의족으로 걸으니 몸이 뒤틀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철기는 새로운 길을 가려 한다, 대학에 들어간 이래 근 30여 년을 친일청산에 몰두하면서 살았다면 이제는 분단극복과 생명 평화운동으로 걸어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잘려진 오른발이 분단의 상징이고 뒤뚱거리는 걸음걸이가 분단의 아픔을 생생하게 증언할 것이기 때문에..


<못 다한 이야기>
① 장항습지는 군사보호구역이면서 행정상으로는 고양시 소속이지만 국가습지이기에 한강유역환경청이 관리한다. 때문에 이 지역은 1군단 9사단, 고양시청, 한강유역환경청이 서로 얽혀 있다. 대표적인것이 통문 관리. 2018년 7월 장항습지지역이 9사단에서 한강유역청으로 관할이 넘어가면서 습지 입구에 있는 초소나 막사, 통문 같은 것은 소속 지역인 고양시로 인계가 되었다. 고양시는 통문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를 9사단에게 요청했고 이에 따라 국가습지를 관리하는 한강유역청도 통문 출입시에는 9사단 병사들로부터 비밀번호를 받아 출입을 했다. ‘한강’ 조합원들도 한강유역청 직원들이 9사단 병사로부터 통보받은 비밀번호를 알려주면 이를 가지고 열쇠를 열어 출입했던 것이다.

② 지뢰 폭발 사고 이후인 6월 23일 고양시 기후환경국장, 한강유역환경청 자연환경과장, 1군단 작전기획과장, 9사단 작전참모가 모여 ‘장항습지의 탐지와 안전에 관한 TF’가 구성되었다. 사고 이후 2차례 탐지했고 12월에 다시 3차 탐지가 계획되어 있다. 장항습지의 안전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이 TF의 역할은 막중하다.

③ 장항습지 정화활동은 사회적 협동조합 ‘한강’의 자원봉사로부터 시작되었다. 다른 단체들도 함께 참여하면서 이루어진 쓰레기 수거활동이 성과를 거두자 고양시와 한강유역환경청이 예산을 지원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④ 지뢰제거에 관한 다른 나라의 사례 중 타이완은 모범적이다. 타이완은 2006년 대인용무기규제법을만들었다. 이 법에 따르면 군대는 공개적으로 지뢰 매설지를 지역정부 및 지역주민에게 알려야 한다. 군대는 해체과정을 포함해서 진전상황을 의회에 보고해야만 한다. 이 법을 계기로 해안가를 철저하게 관리하며 민간인 피해에 대한 근본대책을 수립한 것이다.

⑤ 대책회의는 오는 12월 13일 ‘지뢰사고 그 이후 안전한 고양시 만들기’란 주제로 주민청구토론회를 연다. 조재국 평화나눔회 상임이사가 ‘한국의 지뢰현황과 지뢰사고 대책’이란 주제로 발표를 할 예정이고 고양시 지역 국회의원 이용우, 홍정민, 한준호가 참석한다.

⑥ 9사단 한강대대에서는 사고가 난 당일 오후 ‘한강’ 조합원들에게 아래와 같은 문자를 보냈다. “한강대대입니다. 작년 여름 강우로 인해 침수지역 지뢰유입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활동간 언제든지 지뢰가 발견될 수 있으니 항상 잘 살피신 후 작업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뢰 식별시 가까이 가시지 말고 아래 031-****-****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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