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임헌영 소장과 함께하는 신입후원회원 온라인 만남
[초점] 임헌영 소장과 함께하는 신입후원회원 온라인 만남 • 김무성 회원사업부팀장 연구소 기획실 회원팀에서는 4월 28일(목) 저녁 8시에 온라인으로 후원회원과 만나는 자리를 준비했다. 코로나19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회원 소통과 만남의 기회를 꾸준히 만들어간다는 차원에서 기획되었다. 이번 행사는 신규후원회원과 지역후원회원을 대상으로 참석자를 모집하였으며 행사 당일에는 임헌영 소장과 연구소 상근자 등 23명이 참석했다. 행사는 연구소 소개 영상 감상 후 방학진 기획실장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임헌영 소장이 대선 이후 지친 마음에 대한 격려와 연구소 활동을 계속 지지해 달라는 인사말을 전했다. 그리고 신규후원회원인 고영신, 장묘천 회원은 인사와 연구소에 가입하게 된 동기를 말했다. 이후 방학진 기획실장이 연구소의 지난 성과와 소식을 간단하게 공유했다. 특히 연구소가 올해 초 펴낸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소개와 4월 25일(월) 수상한 2022년도 민간통일운동유공 대통령 표창 소식을 알렸다. 이날 행사에는 신규후원회원 외에도 김순흥 광주 지역위원장, 박종선 부천 지역위원장, 강호광 진주 지역위원장, 홍경표 대전지역위 사 무국장 등 지역의 후원회원들이 참석해서 안부와 인사를 전했다. 오랜만에 화상으로나마 얼굴을 보며 안부를 전하다 보니 반가움을 표현하며 빨리 코로나가 진정되어 수련회와 같은 대면 행사가 열리길 기대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또한 앞으로도 온라인 만남을 정기적으로 마련하자는 의견들이 모아져, 기획실 회원팀에서는 직접 만나기 어려웠던 지역후원회원과 신규후원회원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온라인 만남의 자리를 준비하고자 한다. 5월 제주도를 시작으로 온라인 후원회원 만남 행사가 본격 개최된다.
경학원 명륜당이 1937년 이후 혼례식장으로 변신한 까닭은?
[소장자료 톺아보기 37] 경학원 명륜당이 1937년 이후 혼례식장으로 변신한 까닭은? 정신작흥과 사회교화의 광풍 속에 탄생한 ‘의례준칙(儀禮準則)’ • 이순우 책임연구원 <매일신보> 1934년 11월 11일자에 수록된 ‘국민정신작흥에 관한 조서 환발기념식’의 장면들이다. 왼쪽 위의 사진은 조선신궁 광장에서 경성부 주최로 열린 기념식장이고, 오른쪽과 아래의 사진은 조선총독부 청사 앞에서 거행된 조서봉독식(詔書奉讀式)에 참석한 우가키 총독의 모습이다. 「의례준칙」 시행에 관한 총독유고와 관통첩은 바로 이날에 맞춰 <조선총독부관보>에 게재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짓고 조선통신사(朝鮮通信社)가 제작 배포한 <(조선총독부 제정의) 의례준칙과 그 해설> (1937)의 표지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조선총독부 제정의) 의례준칙과 그 해설> (1937)의 말미에 첨부되어 있는 ‘경학원 혼례식장도’의 모 습이다. 경학을 가르치고 문묘에 배례하는 공간이 느닷없이 결혼식장으로 변신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조선사회교화요람>(1937)에 수록된 「경학원사용규정」의 세부 조항이다. 여기에는 「의례준칙」에서 정한대로 혼례식의 절차를 준수하여 경학원에서 이를 거행할 때 지켜야할 절차와 사용조건 등을 담고 있다. <매일신보> 1937년 7월 4일자에는 경학원에 의례부(儀禮部)가 신설된 이후 최초로 거행된 결혼식에 관한 소식이 담겨 있다. 사진에 보이는 곳은 경학원 명륜당이며, 이날 예식을 올린 한 쌍은 중추원 참의 신석린의 사위와 딸이 되는 이들이었다. <매일신보> 1942년 9월 23일자에는 조선신궁 봉찬전에 개설된 결혼식장의 배치도가 소개되어 있다. 이 당시에는 경학원 명륜당과 같은 공간 뿐만이 아니라 신사 등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신전혼례식’이 크게 성행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경학원 문묘 신문(經學院 文廟
일제 때 ‘25주년’ 단위의 기념행사가 유달리 성행했던 이유는? 사반세기(四半世紀)라는 표현을 남겨놓은 그들의 언어습성
[식민지비망록 81] 일제 때 ‘25주년’ 단위의 기념행사가 유달리 성행했던 이유는? 사반세기(四半世紀)라는 표현을 남겨놓은 그들의 언어습성 이순우 책임연구원 세화(歲華, 세월)가 전(轉)하여 자(玆)에 소화 병자(昭和 丙子)의 신춘(新春)을 영(迎)함에 당(當)하여 공손(恭遜)히 동방(東方)을 배(拜)하고 황실(皇室)의 어미영(御彌榮, 고이야사카)을 봉축(奉祝)하여 성세(盛世)의 경(慶)을 봉송(奉頌)하는 바이다. 이토 슘보공(伊藤春畝公, 이토 히로부미 공작)의 시(詩)에 ‘부상근역일가춘(扶桑槿域一家春; 일본과 한국이 한집을 이뤄 봄이로다)’의 구(句)가 있어 과연(果然) 내선(內鮮)의 동융(同融)이 비년(比年) 익익심각(益益深刻)하여 일가집목(一家輯睦)의 환희(歡喜)가 창일(漲溢)하면서 다시 춘수(春首)가 회래(回來)하였으니 진실(眞實)로 이이연(怡怡然)하여 강산삼천리(江山三千里)의 신색(新色)을 찬미(讚美) 아니 할 수 없다. 금년(今年)은 아조선(我朝鮮)에 대(對)하여 특수(特殊)의 의의(意義)를 유(有)한 연(年)이다. 즉(即) 작추(昨秋) 10월(月) 총독부(總督府)에서는 시정 이십오주년 기념식전(始政 廿五周年 記念式典)을 거행(擧行)하였으므로써 통치사상(統治史上)의 일획기(一劃期)가 되는 대취지(大取旨)를 천하(天下)에 선(宣)하였다. 그리고 금년(今年)은 총독정치(總督政治)가 기 사명완성(其 使命完成)을 기(期)하여 진(進)할 소위(所謂) 제2 사반세기(第二 四半世紀)의 제1년(第一年)이어서 신행정(新行政)의 제일보(第一步)를 의미(意味)하는 연(年)이다. …… (하략) 이 내용은 <매일신보> 1936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이마이다 정무총감(今井田 政務總監)의 신년사 한 토막이다. 여기에는 식민통치 사반세기(四半世紀), 즉 25년의 기간이 일단락되고 다시 새로운 ‘제2의 사반세기’가 시작되는 뜻 깊은 한 해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취지가 서술되어 있다. 본문의 내용에도 나와 있다시피 일제는 1935년 10월 1일의 시정기념일(始政記念日; 조선총독부 관제의 제정과 더불어 정식으로 출범한 날)을 맞이하여 성대한 기념식전을 마련하는 한편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정 25주년 기념사업’을 벌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1. 시정25주년 기념식(총독부 신청사 동쪽 광장) 2. 공적자, 효자, 절부, 의복(義僕)
최인경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단장에게서 동학·천도교 정신의 현재적 의미를 듣는다
[인터뷰] 최인경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단장에게서 동학·천도교 정신의 현재적 의미를 듣는다 인터뷰 : 이용창 연구실장 올해는 손병희 선생이 돌아가신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또 손병희선생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인 무게도 있기에 적지 않은 행사들이 여기저기서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3·1혁명으로 옥고를 치르다 병으로 출옥하셨고 곧바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독립운동사 쪽으로 보면 ‘순국’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고, 천도교단에서는 ‘순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교단이 아니라면 좀 더 다른 특정한 용어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동학’이 1905년 12월 1일에 ‘천도교’로 개칭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관 련 용어를 천도교로 통일하여 사용하였다. 연구소에서는 이와 같은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보자는 취지에서 지난 4월 14일,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최인경 단장을 모시고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연구소가 준비하고 있는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년 특별 전시’와 강연 등을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어볼 수 있었다. ● 100년 전 1922년은 임술년이더라고요. 5월 19일이 천도교 제3세 교조 의암 손병희(1861∼1922) 선생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100년 후인 올해 2022년은 임인년, ‘검은호랑이 해’라고 합니다. 동양에서는 간지를 써왔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여러 가지 희망을 담아 덕담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요. 검은 호랑이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주는 영험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이런 기운이 천도교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뻗쳤으면 합니다. 손병희 선생은 3·1혁명으로 ‘보안법·출판법 위반’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 후 상춘원에서 요양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올해 100주년을 맞이해서 관련 행사가 적지 않을
임청각에서 소중한 의미를 깨닫다
[후원회원 마당] 임청각에서 소중한 의미를 깨닫다 신윤정 구미지회 후원회원 지난해 10월 ‘왕산 허위 선생 추모식’에 석주 이상룡 선생 후손인 이혜정 여사님을 모시기 위해서 댁이 있는 경주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석주 선생의 증손부가 왕산 가문의 허은 여사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허은 여사의 따님인 이혜정 여사님을 뵙게 되다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을 떠나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내신 분입니다. 경주에서 구미로 가는 동안 이혜정 여사님은 석주 할아버지, 어머니 이야기, 고되고 어려웠던 형편을 말씀해 주시면서 어머니가 만주에서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만드신 국수도 알려주셨습니다. 생생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마음 한편에 석주 선생의 생가인 안동 임청각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이번에 ‘고택‧종갓집 활용 사업 – 임청각에서 나라사랑 정신을 배우다’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단번에 신청을 하게 되었고 아이들과 함께 참가했습니다. 5백 년 전통 고택에서의 하룻밤이라는 기대와 석주 가문의 정신이 깃든 곳이라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특히 일제가 집의 일부를 허물고 기찻길을 만들었다는 가슴 아픈 역사에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다행히 현재는 선로가 해체되고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안동문화지킴이 해설사 님과 후손과의 토크 콘서트를 통해 석주 선생의 업적을 잘 알 수 있었고, 특히 방 안에 비치된 책을 읽은 후 더욱 감명 깊게 다가왔습니다. 이 책은 바로 허은
망명지사들 가족 방문기
[자료소개] 망명지사들 가족 방문기 <자유신문>은 1945년 10월 5~10일자에 ‘망명지사들 가족 방문기’라는 제목으로 임시정부 요인 엄항섭, 이시영, 조완구, 조소앙 네 분 가족의 인터뷰를 실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8월 10일 일본 항복 소식을 중국에 진주한 미군으로부터전달받은 9월 5일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경에서 비행기로 상해에 도착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자격 입국이냐 ‘개인’ 자격 입국이냐라는 문제로 미군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개인 자격 입국이란 미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11월 23일과 12월 1일 2진으로 나뉘어 고국의 땅을 밟게 되었다.-편집자 주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요인 귀국기념 사진. 첫줄 왼쪽부터 장건상.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조성환 하늘은 언제나 푸른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심회는 천변만화다. 어제까지 돌아올 기약이 없던 그리운 그이를 기억하는 눈에 비치는 그것이 비 머금은 잿빛 구름이었다면 희망과 기대에 소스라쳐 발자국 소리를 조심하는 오늘의 가슴에는 오직 붉게 하는 아침노을만이 빛날 것이다. 사십년 전 조국의 주초(柱礎)가 무너지자 조국 광복을 결심한 그들이 늙은 부모와 약한 처자를 버리고 만주로 시베리아로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로 상해로 피나는 걸음을 달릴 때에 한때는 모든 개인적 미련을 이를 깨닫고 끊었으리라. 그러나 십년 이십년 지지한 혁명의 험로를 걸어가는 그들의 마음이 갈수록 구국의 정열로 불탔으면서도 풍찬노숙의 견디기 어려운 생활이 남보다 먼저 머리 위에 백발을 더하였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괴롭지 않다. 고국산하에 던지고 온 친족의
우리 연구소, 2022년도 민간통일운동 유공 대통령 표창 수상
[초점] 우리 연구소, 2022년도 민간통일운동 유공 대통령 표창 수상 우리 연구소가 민간차원에서 통일운동 활성화와 통일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 포상제도는 2020년도부터 시행되었으며 평화통일 기반 구축과 통일역량 확충을 위해 제정되었다. 올해 ‘민간통일운동 유공 정부포상 전수식은 4월 25일 오후 3시 정부서울청사 통일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시상은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주관하였으며 방학진 기획실장이 연구소를 대표해 수상했다. 통일관련 시민강좌 개최와 <일맥상통 백두대간> 사진전의 전국 순회전시 등을 통해 통일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점이 이번 심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충청남도 친일잔재 기초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완성
[초점] ‘충청남도 친일잔재 기초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완성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연구소는 2021년 10월 20일부터 2022년 3월 31일까지 충청남도의 의뢰를 받아 진행한 ‘충청남도 친일잔재 기초조사 연구용역’(이하 연구용역)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번 연구용역은 조재곤 서강대교수가 책임연구자를 맡고 조세열, 이순우, 박광종, 방학진, 임무성, 김혜영 연구원이 참여하였으며박수현, 유은호, 이용창, 임선화 연구원은 자료의 조사·발굴과 보고서 작성 등에 힘을 보탰다. 특히 충남지역에서 활동하는 김학로, 양동진, 박종봉, 홍남화 후원회원이 현지네트워크위원으로 참여하여 현지 자료 발굴 및 확인, 사진 촬영 등에 큰 도움을 주었다. 연구용역은 짧은 기간임을 감안하여 친일과 관련된 인물, 기념물, 재산(토지) 세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같은 시기 충남에서 진행된 친일잔재 청산 사업(교육, 지명·도로명)까지 마무리된다면 충남친일잔재의 전모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연구용역은 7차에 걸친 연구원 전원회의, 세 차례의 현지보고회(충남도청) 및 협지답사, 현지네트위원과의 온라인 회의를 통해 450여 쪽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아울러 연구용역의 진행과 함께 ‘친일잔재연구위원회’가 결성, 시민들과 긴밀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으며 관련 성과가 아카이브(충남도 홈페이지)로 구성되는 등 사업의 성과가 시민들에게 적극 홍보되었다.
국세조사, 효율적인 식민통치와 전쟁수행을 위한 기초설계
[소장자료 톺아보기 36] 국세조사, 효율적인 식민통치와 전쟁수행을 위한 기초설계 전시체제기에는 병역법 실시와 배급통제를 위한 인구조사도 빈발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본제국은 때때로 일반 관공리(官公吏)들의 충군애국(忠君愛國)을 이끌어내는 수단의 하나로 국가적인 축전이나 큰 행정사업을 치른 다음에는 이와 관련된 기념장(記念章)을 제정하여 이를 수행했거나 관여했던 모든 이들에게 수여하곤 했다. 이러한 종류의 기념장 발행 연혁표를 살피다 보면, 이른바 ‘국세조사(國勢調査; 인구총조사, 詮察斯, census)’라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 포함된 것으로 1921년 6월 16일에 제정된 ‘제1회 국세조사기념장(대정 9년 10월 1일)’과 1932년 7월 16일에 제정된 ‘조선 소화 5년 국세조사기념장(소화 5년 10월 1일)’,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거의 10년의 격차를 두고 두 가지 다른 종류의 기념장이 존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것도 식민지 조선(朝鮮)만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기념장은 왜 만들어졌던 것일까? 1885년에 설립된 국제통계협회(國際統計協會, ISI)는 일찍이 구미 각국에서 근대적인 인구총조사가 확산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하여 이에 대한 국제표준화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1900년의 같은 날을 정하여 일제히 총조사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부분의 ‘문명국(文明國)’에서는 끝자리가 ‘0’인 해에 10년 주기로 국세조사를 벌이는 방식이 서서히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일본제국에서도 1902년 12월 1일에 법률 제49호 「국세조사(國勢調査)에 관(關)한 법률(法律)」을 제정하였는데, 여기에는 “10개년에 매1회 국세조사를 시행하며, 제1회 국세조사는 1905년에 실시하고, 다만 제2회에 한하여 만 5개년에 해당하는 때에, 다시 그 이후에는 10년마다 시행”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초 국세조사
소개공지(疎開空地), 미군 공습에 기겁한 일제의 방어수단 결국 패망 직전 서울의 도시공간을 할퀴어 놓다
[식민지 비망록] 소개공지(疎開空地), 미군 공습에 기겁한 일제의 방어수단 결국 패망 직전 서울의 도시공간을 할퀴어 놓다 이순우 책임연구원 벌써 40년도 더 넘은 시절의 얘기지만 시골촌놈이 어찌어찌 대학에 붙어 난생 처음 상경하면서 서울 큰고모댁에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그때 어리숙한 친정조카의 도회지 생활이 많이 걱정되셨는지 신학기 초에 큰고모께서 이런 말씀을 귀띔해주신 기억이 또렷하다. “야야, 서울에서 길을 익힐라카믄 일단 종로가 한가운데 있고, 그 아래로 청계천로―을지로―충무로―퇴계로의 순서대로 있으니까 그것만 잘 기억해도 길찾기에 많이 도움이 될끼다. 그라고 서쪽부터 1가, 2가, 3가, 이렇게 나간데이 ―.” 아니나 다를까 큰고모님의 ‘꿀팁’은 그 이후 서울살이의 실전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더구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 본디 서울내기 근처도 못가는 그 시골촌놈이 되려 서울의 옛길이나 역사공간에 대해 이런저런 글도 곧잘 쓰고 더러 현지답사의 길잡이노릇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모든 것이 기초 오리엔테이션을 잘 받은 덕분이 아닌가도 싶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서울도심의 ‘씨줄’을 이루는 동서방향의 대로에 대해서는 일제 때 ‘소화통(昭和通)’으로 뚫린 ‘퇴계로’ 정도를 제외하면 대개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던 옛길이 확장 개편된 것이므로 그 유래를 확인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날줄’을 이루며 남북방향으로 놓인 간선도로의 경우에는 언제 그 길이 생겨났는지를 확인하는 일조차 그리 간단치가 않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의 고지도를 살펴보면 서울 도성 안쪽으로 광통교를 넘나드는 남대문로의 경우라든가 육조앞길이나 동구내(洞口內, 동구안)처럼 각 궁궐 대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