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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헌법학자 한상희 “일본, 한국 활동가들 장시간 억류 심문…야만인들이나 할짓”
“2~3시간 공항 억류 조사 듣도 보도 못해, 표현의 자유 침해…UN 진정 사안”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3일 최근 일본 출입국당국이 한국인 활동가들만 공항에서 콕 찍어 장시간 억류 조사한 문제와 관련해 “야만인들이나 할 짓”이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이날 오후 <오마이뉴스> 전화 인터뷰에서 “10분, 20분도 아니고 2시간, 3시간 억류 조사를 한다는 게 있을 수 있느냐. 문명국이 아니라 국가라는 허울을 갖추고 있는 나라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을 일본 정부가 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이같이 밝혔다. “듣도 보도 못한 장시간 억류 조사…용납 불가”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기업을 향해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 사죄, 배상을 촉구해 온 한국 시민단체 활동가 등 4명이 이달 7일과 9일 잇따라 나리타·하네다 공항에서 약 2시간 억류 조사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한국인 평화 활동가 일부는 지난 6월 오키나와현의 한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과정에서 세관 심사를 포함해 약 3시간 억류 조사를 받으며 방문 목적, 일정, 숙소 등에 관한 상세한 질문을 받았는데, 이때 일본 측 관계자들이 “독도”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질문도 했다고 <오마이뉴스>에 증언한 바 있다. 지난 7월 2일 <오키나와타임스>는 “한국인 장시간 심문 5~6월 10명.. 사상 신념 확인..최장 5시간 입국 거부도”라는 제목 아래, 한국인 입국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취지로 보도하기도 했다. 일부 활동가는 일본 출입국당국 관계자가 자신의 사진을 손에
[경인일보] ‘경기도 대표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사위 김석화씨
[인터뷰…공감] “부민관 의거 이끈 장인어른 존함 달고, 베를린 마라톤 뛸 것” 대일항쟁기 마지막 의열 무장 항일독립운동인 ‘부민관 의거’를 주도했던 조문기 선생은 경기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다. 1926년 경기도 수원군 매송면(현 화성시 매송면)에서 태어난 그는 광복을 약 3주 앞두고 친일파 박춘금이 주최한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가 열린 부민관에 폭탄을 터트렸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18세였다. 광복 이후에도 조 선생의 생(生)은 뜨거웠다. 광복회 경기도지부장을 3번이나 역임했고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으며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힘썼다.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을 남긴 조 선생은 누구보다 강직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런 조 선생의 곁에는 그를 묵묵히 지키는 가족이 늘 함께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그를 존경하고 위했던 사위 김석화(73) 씨도 그중 한 명이다. 김씨는 1980년 28살의 나이로 조 선생의 외동딸 조정화씨와 결혼하며, 조 선생과 연을 맺었다. ■ “그렇게 대단한 분인 줄 몰랐죠.” 김씨는 조 선생이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모른 상태로 ‘연모하는 여성’의 아버지로서 처음 만났다. 김씨는 그때를 떠올리며 “첫 인상이 근엄하시고, 말씀이 없으셨다. 몇 가지 핵심적인 것만 물으시곤, 본인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아 독립운동가셨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 말했다. 아내인 정화씨도 아버지인 조 선생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씨는 직접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책과 신문 기사 등을 찾아보며 조 선생의 독립운동 자료를 수집했다. 직접 조 선생에게 물어보면서 공부한
[오마이뉴스] 광복 80주년 기념 음반 ‘해방의 노래’ 발매
유정천리와 민족문제연구소 합작… 서른일곱 곡 담았다 광복 80주년이 되는 올해, 역사적 의미가 남다른 뜻깊은 음반 하나가 제작되었다. 1945년 가을부터 1949년 연말까지 해방 직후 분위기를 담아 만들어진 노래들 중, SP음반으로 발매된 스무 곡과 악보로 남아 있는 열일곱 곡을 한데 모은 CD <해방의 노래>다.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와 민족문제연구소가 힘을 모은 두 번째 작품으로, 두 단체는 지난 2017년에 해방 전 군국가요 모음집도 함께 제작한 바 있다. <해방의 노래>는 CD 한 장과 USB 한 개로 구성되었으며, SP음반을 복각한 곡들은 CD와 USB에 모두 수록되었고, 악보를 바탕으로 재연한 곡들은 USB에만 수록되었다. 재연 작업은 악보 제작 프로그램을 이용해 음악 파일을 추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원래 악보의 기록 범위를 넘지 않도록 추가 편곡은 하지 않았다. 선정된 서른일곱 곡에는 모두 해방 직후의 다양한 정경이 담겨 있고, 부분적으로는 해방과 함께 닥친 분단의 흔적도 있다. 노래를 만든 작사가나 작곡가, 녹음에 참여한 가수나 연주가로 <해방의 노래>에 등장하는 인물 쉰여섯 명 가운데 월북이나 납북으로 규정되어 오랫동안 금기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 최소한 열여섯 명에 달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역사의 흔적을 살필 수 있다. 또 쉰여섯 명 중 열네 명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등재 인물이기도 하며, 등재는 되지 않았더라도 군국가요 같은 친일적 작품 활동이 확인되는 경우는 거의 절반 가까이에 이른다. 해방이 음반 표제이긴 하나, 해방뿐만 아니라 그 전후로
[오마이뉴스] [단독] 일본, 한국인들 장시간 억류하고 “독도 시위 참여했나” 추궁
6월 오키나와 찾은 한국인 활동가 2명 증언… “테러범 취급, 신념 사상 관련 질문도” 나리타·하네다 공항에서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현의 공항에서도 다수 한국인들이 지난 6월 일본 입국 전 출입국 당국에 장시간 억류돼 조사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억류 조사를 받은 한국인 일부는 당시 일본 출입국 관계자로부터 “독도 관련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느냐” “한일 관계 관련 모임이나 시위에 참여한 적 있느냐”는 추궁을 받으며, 허위 답변 시 입국을 불허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고 <오마이뉴스>에 증언했다. 11일 취재를 종합하면, 익명을 요청한 한국인 A씨는 일행 7명과 함께 지난 6월 오키나와현 한 공항을 통해 일본에 입국하려 했다. 여객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장으로 이동해 일행 한 명이 자신의 순서가 돼 여권을 제시하자, 당국 관계자는 A씨를 포함해 일행 중 4명을 별도 조사실로 데려갔다. 이들 4명은 함께 비행기 표를 구매했다고 한다. 일본 출입국 관계자는 A씨 등에게 질문하며 방문 목적, 일정, 숙소 등을 자세히 캐물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 당국 관계자로부터 “독도 관련 시위에 참여 한 적 있느냐” “한일 관계 관련 모임이나 시위에 참여한 적 있느냐”는 취지의 질문을 받았다고 A씨는 <오마이뉴스>에 밝혔다. 당시 조사 과정에서 일본 당국 관계자는 입국 심사대가 아닌 별도 심문 공간에서 지문을 날인하게 하고 여권 또한 다시 복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약 3시간에 걸친 조사와 검사 뒤에야 이들은 입국이 허용됐다. 같은
[오마이뉴스] “빨리 시집 보내라”는 경고, 목숨 건 행동이었던 이유
[김종성의 히,스토리] 영암군이 공개한 1938년 판결문, 위안부 실상 알리다 처벌받은 주민들 전남 영암군이 지난 10일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이웃 주민에게 전달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주민 관련 판결문 2건을 공개했다. 이 사례에 나타나는 1938년의 분위기는 위안부 강제동원과 관련된 당시의 흉흉한 민심을 반영한다. 중일전쟁 발발 1년 뒤에 나온 그해 10월 7일 자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 판결문 속에 영암군 주민인 영막동(寧莫同)과 송명심이 등장한다. 판결문에 따르면, 나이 40세인 영막동은 그해 8월 5일 영암군 동북쪽인 화순군에 다녀왔다. 영암군과 화순군 사이에 나주시가 있다. 영막동은 나주를 지나던 중 그곳 도로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두 사람은 영막동에게 ‘요즘 결혼 건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는 말을 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들은 “황군의 위문을 위해 12세 이상 40세 이하의 처녀와 과부를 모집하여 만주로 보내기 때문에 금년 농번기 후는 결혼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는 말을 했다. 사흘 뒤인 8월 8일, 도포면에 사는 영막동은 덕진면에 거주하는 43세 농민 송명심을 찾아갔다. 영막동은 나주에서 들은 소문을 전하면서 ‘육군에서 출정 병사의 위문을 위하여 부녀자를 징발하여 전쟁터로 보낸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7일 뒤인 8월 15일, 송명심의 거주지인 덕진면 장선리의 구장(이장)이 12세 이상 40세 이하 여성의 숫자를 조사했다. 그 시각에 들일을 하고 있었던 송명심은 저녁에 귀가해 이 사실을 전해듣고 깜짝 놀랐다. 15세 된 딸인 이삼녀(李三女)의 이름이 구장이 작성한 명부에
[노컷뉴스] ‘독립 만세’ 함께 외친 두 소녀, 항일과 친일로 엇갈린 운명
[기사원문] 노컷뉴스(2025-08-13)☞ ‘독립 만세’ 함께 외친 두 소녀, 항일과 친일로 엇갈린 운명 광복80주년 기념 CBS 특별기획 [기억을 잇다-100년前 어린 영웅⑤] 역사책 베끼고 일왕 사진 눈 뚫고…항일 의식 키워 대항한 학생들 전주 3.13 만세운동 주도한 기전여학생들…검거된 ’13인 결사대’ “일본은 우릴 재판할 권리가 없다” 외친 임영신, 말년엔 ‘친일 변모’ ‘창씨개명·신사참배 거부’ 끝까지 소신 지킨 김인애…조용히 잊힌 삶 친일·독재 부역 승승장구 임영신, 굴하지 않은 김인애…오늘의 과제는 ▶ 글 싣는 순서 ① 독서도 ‘죄’였지만…총 대신 책 들고 일어선 항일 10대들 ② 시외버스에 항일벽보…’어린이’들의 기발했던 독립운동 ③ 10대의 마지막 봄, ‘독립 만세’ 외치다 팔과 눈을 잃었지만… ④ 손가락 신경 뽑히고 매질…’악질 왜놈 만행’ 치를 떤 학생들 ⑤ ‘독립 만세’ 함께 외친 두 소녀, 항일과 친일로 엇갈린 운명 (계속) 역사책 베껴 쓰고 일왕 사진에 구멍 낸 기전여학교 ‘공주회’ 당시 기전여학교에서는 일본인 교사 2명이 일본어와 일본 역사를 가르쳤고,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행사 때마다 일본 국가를 부르게 하고 일왕이 있는 쪽으로 절을 시키켰던 상황. 공주회가 중심이 된 학생들은 이를 거부하기로 한다. 이 직후 열린 행사에서 일본인 선생의 구령에 따라 일본 국가가 시작됐지만 대다수는 이를 따라 부르지 않았고 이어진 동방 요배에서도 학생들은 선 채로 버텼다. 이러한 일이 몇차례 반복되어 경찰까지 학교를 찾았지만 주동자를 찾지 못했다. 결국 학교는 조회 시간이나 행사
[보도자료] 민족문제연구소 중남미지부, 한인무관양성학교인 숭무학교 표지판 세워
☞ 다운로드: [보도자료] 250812 민족문제연구소 중남미지부 한인무관양성학교인 숭무학교 표지판 세워 8월 11일 민족문제연구소 중남미지부에서는 1909년 이근영(李根永)·양귀선·조병하·이순근 등이 멕시코 메리다(Merida) 중심지에 건립한 한인무관양성학교인 숭무학교에 표지판을 세웠다. 이는 1909년 11월 개교한 이래 107년 만이다. 숭무학교는 멕시코지역 국민회가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설립한 학교이다. 1905년 ‘황성신문’을 통해 멕시코로 이주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광고에 속아 멕시코로 이주한 천여 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땡볕에서의 가혹한 노동과 노예 취급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조국과 15,000km 떨어진 지구 반대편에서 낮에는 애니깽(에네켄) 농장에서 중노동을 하고, 저녁에는 무장항쟁으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기 위해 숭무학교를 세웠다. 또한 멕시코 이주 조선인들은 군사훈련 외에도 독립자금을 모아 도산 안창호 지사에게 전달하였다. 그들의 숭고한 업적과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광복 80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민족문제연구소 중남미지부에서는 그 정신을 기리고 후대에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숭무학교 표지판을 건립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중남미지부 정갑환 대표는 2022년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의 권유로 중남미지부를 개설하고 지부의 첫 번째 선결 과제로 숭무학교 표지판 부착을 목표로 하였다. 2024년 메리다 한인후손회 광복절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그들에게 숭무학교에 관해 물으니, 모두 그 역사적 실체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답하였다. 이후 한인회 부회장과 함께 장소를 답사하고 지금의 한인 후손 중 2세대 대다수가 지목한 메리다 시장의 한 건물을 지정하여 2025년 8월 11일, 메리다시청 주관으로 한인숭무학교
[한겨레] 광복 80돌 맞아 1940년대 ‘해방의 노래’ 37곡 담은 음반 발매
민족문제연구소·유정천리, ‘광복 80주년 기념: 해방의 노래’ 제작·보급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 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 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합하여/ 놈들에게 빼앗겼던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임화 작사·김순남 작곡 ‘해방의 노래’) 광복 80돌을 맞아 1940년대 해방의 감격을 담아 작곡되고 널리 불리던 노래들이 음반으로 새롭게 제작됐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는 ‘광복 80주년 기념: 해방의 노래’ 음반을 제작해 보급한다고 11일 밝혔다. 시디(CD)와 유에스비(USB)에 담긴 음원은 총 37곡으로, 해방 직후부터 1940년대 말까지 발매되었던 에스피(SP·축음기용) 음반을 복각한 20곡과 지금까지 남아있는 악보를 바탕으로 재연한 17곡을 수록했다. 1945년부터 1940년대 말까지 ‘해방 공간’에서 널리 불린 이른바 ‘해방 가요’를 다수 만든 월북 작곡가 김순남의 ‘농민가’ ‘독립의 아침’ ‘해방의 노래’ 등도 포함됐다. 분단 이후 좌익 계열의 해방 가요는 전승이 끊겼다가 해금 이후 조금씩 재조명됐다. 이 음반에 실린 노래를 연주하거나 창작한 음악인 56명 중 14명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를 비롯해 ‘희망 삼천리’를 부른 가수 남인수, 작곡가 박시춘·김해송 등이다. 일제 통치 아래 제국주의의 나팔수로 군국가요를 연주하거나 곡을 만들던 이들이 해방 뒤 애국자로 변신해 작사·작곡·연주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항일음악을 발굴한 학자들의 땀방울도 숨어있다. ‘자유의 노래’와 ‘농민의 노래’는 음악학자 고 노동은 교수가 수집한 악보를 토대로 새로 연주하고 녹음했다. 노 교수는 친일음악인들의 문제를 제기하고, 안중근 의사가 작사·작곡한
[한겨레] 우리를, 잊으셨나요?
이 순간 광복 80돌, 전국 ‘평화의 소녀상’을 만나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민들이 바삐 오가는 전남 곡성레저문화센터 앞, 보퉁이를 든 ‘평화의 소녀상’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며 고향을 떠나는 애절한 상황을 표현한 소녀상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길원옥 할머니의 글씨체로 쓴 글귀가 적혀 있다. “나를 잊으셨나요?”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전국 각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평화의 소녀상’을 둘러봤다. 학생들이 나무로 직접 만든 경남 산청 간디학교와 이옥선 할머니가 열여섯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 모습을 형상화한 광주 양림동 ‘펭귄마을’, 2015년 한-일 위안부 ‘졸속 합의서’를 밟고 당당하게 서 있는 전북 익산역, 강제징용 노동자상과 나란히 선 대전 만세로 광장 등 직접 만난 90개의 소녀상은 다양한 모습이었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 소녀상 155개가 있다. 세운 시기도, 모습도 다르지만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정확히 규명하며, 다시는 전쟁과 폭력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같은 열망을 담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2015년 한-일 위안부 ‘졸속 합의’, 2020년 정의기억연대 후원금 횡령, 윤석열 정부의 ‘굴욕 외교’ 등을 거치며 차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1992년부터 매주 수요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이어져 온 ‘정기 수요시위’는 피해자들의 존엄을 짓밟는 혐오 발언과 소음을 일삼는 방해꾼들이 생겨나며 참석 인원이 부쩍 줄었고, 그 가운데 자리 잡은 소녀상은 삼중으로 쳐진
[SBS] “야스쿠니 반대” 도쿄 집회…”시끄럽다” 우익들은 욕설
<앵커> 광복 80주년인 올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한일 합동 집회가 도쿄 도심에서 열렸습니다. 일본 시민단체와 한국인 희생자 유족들의 요구에도, 일본 유력 정치인들은 오는 15일 신사를 찾을 걸로 보입니다. 도쿄에서 문준모 특파원입니다. <기자> [야스쿠니 NO!] 일본이 종전 기념일로 부르는 8.15를 닷새 앞둔 어제 저녁,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이 우산을 쓰고 도쿄 거리로 나왔습니다. [야스쿠니 참배 절대 반대!] 시민들은 야스쿠니와 군국주의에 반대한다는 피켓을 들고 약 한 시간가량 시내를 행진했습니다. [야노 히데키/일본 활동가 : 야스쿠니는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신사입니다. 더군다나 A급 전범들도 합사되어 있는 곳이고요.] 지난 2006년에 시작해 올해 20주년을 맞은 이번 집회에는 일본 시민 200명과 야스쿠니에 합사된 한국인 희생자 유족들도 참석했습니다.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 지금 야스쿠니 신사에 2만 1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무단으로 합사돼 있습니다. 저희들이 20여 년 전부터 일본 시민들과 함께 침략 신사 야스쿠니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행진은 평화적으로 진행됐지만, 우익 단체들의 방해 시도는 올해도 이어졌습니다. 행렬 옆에서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시끄럽다고, 이 ○○들아.] 행렬에 뛰어들려는 시도를 일본 경찰들이 저지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습니다. 오는 15일에도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가 있을 예정인데, 최근 선거에서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확인된 만큼 참배 규모도 더 늘 수 있단 우려가 벌써부터 나옵니다. (영상취재 : 한철민, 영상편집 : 최혜영) 문준모 기자 <2025-08-11> SBS ☞기사원문: “야스쿠니 반대” 도쿄 집회…”시끄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