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영암군이 공개한 1938년 판결문, 위안부 실상 알리다 처벌받은 주민들

전남 영암군이 지난 10일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이웃 주민에게 전달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주민 관련 판결문 2건을 공개했다. 이 사례에 나타나는 1938년의 분위기는 위안부 강제동원과 관련된 당시의 흉흉한 민심을 반영한다.
중일전쟁 발발 1년 뒤에 나온 그해 10월 7일 자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 판결문 속에 영암군 주민인 영막동(寧莫同)과 송명심이 등장한다. 판결문에 따르면, 나이 40세인 영막동은 그해 8월 5일 영암군 동북쪽인 화순군에 다녀왔다.
영암군과 화순군 사이에 나주시가 있다. 영막동은 나주를 지나던 중 그곳 도로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두 사람은 영막동에게 ‘요즘 결혼 건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는 말을 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들은 “황군의 위문을 위해 12세 이상 40세 이하의 처녀와 과부를 모집하여 만주로 보내기 때문에 금년 농번기 후는 결혼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는 말을 했다.
사흘 뒤인 8월 8일, 도포면에 사는 영막동은 덕진면에 거주하는 43세 농민 송명심을 찾아갔다. 영막동은 나주에서 들은 소문을 전하면서 ‘육군에서 출정 병사의 위문을 위하여 부녀자를 징발하여 전쟁터로 보낸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7일 뒤인 8월 15일, 송명심의 거주지인 덕진면 장선리의 구장(이장)이 12세 이상 40세 이하 여성의 숫자를 조사했다. 그 시각에 들일을 하고 있었던 송명심은 저녁에 귀가해 이 사실을 전해듣고 깜짝 놀랐다. 15세 된 딸인 이삼녀(李三女)의 이름이 구장이 작성한 명부에 포함됐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송명심은 동네 주민인 이인화가 구장에게 자기 딸의 존재를 알려줬음을 알게 됐다. 그는 한 주일 전에 영막동에게서 들은 말을 어제 들은 말로 착각하면서 이인화에게 이렇게 항의했다.
“어제 영막동에게 황군의 위문을 위하여 12세 이상 40세 이하의 처녀와 과부를 모집하여 만주로 보낸다고 들었는데, 구장의 조사도 이것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삼녀는 나이는 15세이나 체구가 왜소하여 10세라고 말하여도 사람들이 이를 믿는데, 너는 어찌하여 조사표에 기재하게 하였느냐.”
영막동은 위안부 강제동원의 실상을 모르는 송명심에게 소문을 들려주고, 송명심은 그 실상을 몰랐던 것으로 보이는 이인화에게 소문을 거론하면서 항의했다. 일제 법원은 영막동과 송명심의 행위가 군사에 관한 조언비어(유언비어) 유포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가짜뉴스 유포 행위로 규정된 셈이다. 일제 법원은 육군형법 제99조를 위반했다며 두 사람에게 금고 4개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영암군이 공개한 또 다른 사례는 위 사건보다 20일 늦게 선고된 1938년 10월 27일 자 장흥지청 판결문에 등장한다. 이 사건에 나오는 한만옥·이운선은 영막동·송명선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 소문을 들었다. 이 사례에서도 나주 사람이 발화자로 등장한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해 8월 9일 한만옥은 자기 집을 방문한 나주 사람 김유승으로부터 “나주 방면에서는 처녀를 중국에 있는 황군의 위문을 위하여 보내려고 모집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한만옥은 그날 오후 3시경 같은 마을에 사는 이운선(59)의 밭일을 해주러 갔다가 그 이야기를 밭 주인에게 해주었다.
이운선은 6일 뒤인 8월 15일에 이야기를 전파했다. 그날 같은 마을의 주류판매업자 김덕행의 집을 방문한 그는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딸을 가진 자는 빨리 시집을 보내라”며 “황군 위문을 위하여 당국에서 모집 중인데, 나주 방면에서는 이미 3, 4명의 쳐녀가 중국으로 보내졌다”고 말했다. 일제 법원은 육군형법 위반죄를 이유로 이운선에게 금고 6개월과 집행유예 3년, 한만옥에게 금고 4개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위안부 실상 알리기 활동은 사실상의 독립운동
일제는 전쟁 동원을 위해 한국인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한국인들의 입과 귀를 통제할 목적으로 일제강점기판 중앙정보부까지 창설했을 정도다.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004년 제40권에 실린 박수현 당시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의 논문 ‘중일전쟁기 유언비어와 조선인의 전쟁 인식’은 “일제는 전쟁 직후인 1937년 7월 22일 ‘국민정신을 앙양시키고 시국에 대한 인식을 강화함으로써 국민을 총집결시킨다’는 목적하에 조선중앙정보위원회를 설치하고 곧이어 전국 각도에도 정보위원회를 설치하였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중앙정보위원회 조직은 위원장에는 정무총감, 위원에는 총독부의 각 국장, 경기도지사, 임시위원에는 조선군 참모장, 해군 참모장, 조선헌병사령관 등 총독부와 육해군의 요직으로 구성되었으며, 산하에 실무기구인 간사회가 설치되어 주 1~2회 개최하였다. 이후 조선중앙정보위원회는 조선의 사상통제와 여론·선전 활동을 하는 핵심적인 기구로서 조선의 모든 언론 및 홍보기관을 철저히 통제하고 조직적으로 정보 수집, 여론 파악 및 조정, 불순분자의 동향 파악, 선전활동 등을 강화해 나갔다.”
조선중앙정보위원회뿐 아니라 일반 행정관청이나 경찰기구도 대중의 생각 및 의식을 통제하는 공작활동에 투입됐다. 이 같은 감시망이 촘촘했기 때문에 위안부 강제동원의 실상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일은 위험했다. 나주 사람들과 더불어 영막동·송명심·한만옥·이운선의 행위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위안부 실상 알리기 활동은 사실상의 독립운동이었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26권에 소개된 장인식은 바로 그 활동으로 인해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51세의 경남 밀양군 단장면 주민인 장인식은 1938년 3월 31일 단장면의 장호석 집에서 동네 주민 박금이에게 위안부 문제를 알렸다. 장인식은 “일본군을 위안하기 위해 16세 이상 20세까지 처녀와 16세 이상 30세까지의 과부를 강제적으로 동원해 전쟁터로 보내려고 한다는 사실, 동원된 여성을 전쟁터에서 낮에는 취사와 세탁 같은 일(에) 종사하도록 하고 밤에는 일본군과 성적 관계를 강제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면서 “이에 해당하는 자녀를 둔 자는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독립유공자공훈록>은 “장인식은 중일전쟁 직후 일제의 여성 강제동원에 대한 위험성을 알리는 활동을 했다가 1938년 5월 24일 체포됐다”며 그가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조언비어 유포죄로 금고 4개월형을 받았다고 알려준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에 대한민국은 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장인식에게서 끔찍한 소문을 들은 박금이는 집에 돌아가 남편 장봉학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이는 장봉학이 위안부 운동가가 되어 감옥에 들어가는 결과로 이어졌다. 위 공훈록은 장봉학 편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장봉학은 아내 박금이에게서 일본군 위안을 위해 여성을 강제로 동원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들었다. 이를 4월 9일 오후 6시경 양산군 영포리 조선지(朝鮮紙) 제조공장에서 강성옥과 김삼득에게 전달했다. 같은 날 오후 9시경 강성옥은 장봉학에게서 들은 얘기를 최영상 등에게도 전달했다.”
장봉학은 금고 4개월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에게도 2020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지금 일본 정부와 한일 극우세력은 가난한 여성들이 빈곤 때문에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을 뿐이라는 선전전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위안부가 대거 배출됐다면, 영막동·송명심·한만옥·이운선과 장인식·박금이·장봉학·강성옥 등의 목숨을 건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들은 한국 여성들이 군대 위안부로 강제동원되는 현실에 분개해 위험을 무릅쓰고 ‘조언비어’를 유포했다. 이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입을 연 것은 강압이나 감언이설 등의 방법으로 한국 여성들이 전쟁터로 끌려가는 현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종성 기자
<2025-08-11>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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