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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경기도 대표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사위 김석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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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부민관 의거 이끈 장인어른 존함 달고, 베를린 마라톤 뛸 것”

대일항쟁기 마지막 의열 무장 항일독립운동인 ‘부민관 의거’를 주도했던 조문기 선생은 경기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다. 1926년 경기도 수원군 매송면(현 화성시 매송면)에서 태어난 그는 광복을 약 3주 앞두고 친일파 박춘금이 주최한 ‘아시아 민족 분격대회’가 열린 부민관에 폭탄을 터트렸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18세였다. 광복 이후에도 조 선생의 생(生)은 뜨거웠다. 광복회 경기도지부장을 3번이나 역임했고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으며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힘썼다.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을 남긴 조 선생은 누구보다 강직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런 조 선생의 곁에는 그를 묵묵히 지키는 가족이 늘 함께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그를 존경하고 위했던 사위 김석화(73) 씨도 그중 한 명이다. 김씨는 1980년 28살의 나이로 조 선생의 외동딸 조정화씨와 결혼하며, 조 선생과 연을 맺었다.

■ “그렇게 대단한 분인 줄 몰랐죠.”

김석화씨가 화성독립운동기념관에 마련된 ‘조문기 선생 특별전시관’에서 조 선생이 생전 입었던 옷을 가리키고 있다. /김태강기자 think@kyeongin.com

김씨는 조 선생이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모른 상태로 ‘연모하는 여성’의 아버지로서 처음 만났다. 김씨는 그때를 떠올리며 “첫 인상이 근엄하시고, 말씀이 없으셨다. 몇 가지 핵심적인 것만 물으시곤, 본인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아 독립운동가셨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 말했다.

아내인 정화씨도 아버지인 조 선생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씨는 직접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책과 신문 기사 등을 찾아보며 조 선생의 독립운동 자료를 수집했다. 직접 조 선생에게 물어보면서 공부한 그는 어느덧 아내보다 조 선생에 대해 더 잘 아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김씨는 “처음에는 (조 선생의 독립운동을) 조그맣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인가 방송에 부민관 의거가 소개됐는데, 그때 장인어른께서 하신 독립운동이 대일항쟁기 마지막 의열 투쟁이란 사실을 알고 놀랐다. 그 이후로 내가 더 찾아봤다. 직접 찾아볼수록 대단하신 분이란 걸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조 선생은 독립운동 얘기를 김씨에게 먼저 꺼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조 선생은 생전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고 해왔다. 통일을 위해 목숨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 이유다. 이러한 죄책감으로 조 선생은 보훈 신청을 줄곧 거부했다. 그런 조 선생의 보훈 신청을 한 것도 김씨였다.

“장모님이 고생을 많이 했다”던 김씨는 “먹고 사는 게 어려워 농사 지으면서 생계를 유지하셨다. 어느 날 장인어른 이름으로 보훈처에서 서훈을 신청하라고 편지가 와 있어 장모님께 여쭤보니, 장인어른께서 신청을 안 하고 계신다고 하더라. 그래서 장모님한테 ‘제가 가서 할 테니 말씀하시지 말고 계시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서류를 들고 가서 신청했다. 그 뒤로 장인어른께 구박받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짓 했다고. 나한테 6~7개월 동안 인사도 안 받고 말씀도 안하시더라”고 떠올렸다.

‘독립운동가’ 모른채 연인 아버지로 첫만남
찾아볼수록 대단함 깨달아… 부담보다 자부심 커
생전 친일인명사전 편찬 온힘, 공개전 소천 아쉬움
마라톤 매료 20년… 일흔 넘었지만 매일 10㎞ 완주
광복 80周, 조 선생·2년전 떠난 아내 이름 유니폼
베를린 마라톤 완주 꿈… “태극기도 크게 달고파”

■ 조문기의 생, 이를 지켜온 김석화의 길

조문기 선생과 김석화씨. /김석화씨 제공

광복 이후 조 선생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역임하며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매진했다. 슬프게도 조 선생은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공개되기 1년여 전 유명을 달리했다. 김씨는 “(친일인명사전을) 보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조 선생은 슬하에 딸 정화씨 1명을 뒀다. 그래서일까. 김씨는 마치 ‘아들’처럼 조 선생을 챙겼다.

김씨는 조 선생이 광복회 경기도지부장을 역임할 당시, 조 선생을 차로 모시고 다니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장모님이 지병으로 병원을 오갈 때 조 선생 내외와 동행한 것도 그였다. 김씨는 “여유가 없으니 큰 병원은 못 가고, 팔달산 밑에 있던 옛 도립병원을 자주 갔다. 그때마다 (진료 중인 장모님을 기다리느라) 병원에 장인어른과 같이 앉아 시간을 같이 보냈던 추억이 있다”고 회고했다.

김씨는 조 선생의 병 시중을 들기 위해 미국 유학 중 한국으로 돌아올 정도로 그를 챙겼다. 어린 두 딸의 유학까지 생각하고 먼저 나선 길이었지만, 조 선생의 간호를 위해 2년 6개월만에 귀국을 택했다. 김씨는 “장인어른이 아프다고 급히 연락이 와서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왔다. 장모님 혼자 병간호할 수 없으니 내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조 선생의 4~5년 투병 생활 중 마지막 2~3년 간호도 그의 몫이었다. 집안의 유일한 남성으로서 조 선생의 목욕도 김씨가 도맡았다. 줄곧 뜨거웠던 조문기의 생, 그 삶이 다해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김씨는 늘 곁에 있었다. 그는 “(조 선생이) 돌아가실 때 마음이 많이 안 좋았다. 겨레장으로 진행돼 1주일간 했는데, 내가 상주 노릇을 다 했다. 더 자주 찾아 뵙고 했어야 하는데. 못 가서 죄송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독립운동가의 사위로서 김씨는 부담감보다는 자부심이 컸다고 했다. 조 선생은 ‘친일 인사가 보기 싫다’며 정부 주관 행사에 참석하지 않으면서도, 김씨의 친구들 결혼식 주례는 세 차례나 섰다. 김씨의 기억에 조 선생은 손녀들하고도 잘 놀아주던, 유머를 겸비한 장인어른이자 할아버지였다. 김씨는 “그분 같은 사람이 몇 명만 더 있었어도 대한민국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조문기 선생의 사위 김석화씨는 장인어른을 떠올리며 “훌륭하신 독립운동가 사위라는 자부심이 컸다”고 회상했다. /김태강기자 think@kyeongin.com

어느덧 김씨의 나이도 70세를 넘겼다. 아내 정화씨는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 김씨의 목표는 다음 달 베를린국제마라톤대회에서 조문기 선생과 정화씨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뛰는 것이다.

김씨는 ‘마라톤광’이다. 2004년 회사 동료들과 함께 우연히 나간 마라톤 대회에서 유일하게 42.195㎞를 완주해내며 마라톤에 빠져들었다. 그 뒤로 20년간 김씨는 마라톤 풀 코스 350번, 울트라마라톤(50~200㎞) 20회 등 총 370번의 마라톤 완주를 기록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매일 10㎞를 넘게 달린다. 세계 6대 마라톤(도쿄, 보스턴, 런던, 베를린, 시카고, 뉴욕) 완주에 베를린만 남겨둔 김씨는 광복 80주년인 올해 조문기 선생과 아내 정화씨의 이름, 그리고 태극기가 그려진 유니폼을 입고 베를린을 뛸 계획을 세웠다. 어느 때보다도 의미 있는 길인 만큼, 남은 기간 열심히 연습해 좋은 기록으로 완주하는 게 목표다.

“원래 베를린 마라톤이 끝나고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을 하려고 했는데, 2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래서 아내와 장인어른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뛰려합니다. 광복 80주년인 만큼 태극기도 크게 달고 뛰고 싶어요. 꼭 완주하고 싶습니다.” 일흔 노인의 숨이 평생을 지킨 장인의 생처럼 뜨거웠다.

■김석화씨는?
▲1952년 수원 출생
▲1976년 중앙대학교 졸업
▲1980년 조문기 선생 딸 정화씨와 결혼
▲2022년 퇴직
▲2025년 베를린 국제 마라톤 참가(예정)

김태강 기자

<2025-08-13> 경인일보

☞기사원문: [인터뷰…공감] ‘경기도 대표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사위 김석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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