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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안중근 외교문건’ 내용과 입수 경로는
러 ‘안중근 외교문건’ 내용과 입수 경로는(연합뉴스, 10.09.30)
러, ‘안중근 외교문건’ 한국에 처음 전달(종합)
러, ‘안중근 외교문건’ 한국에 처음 전달(종합)(연합뉴스, 10.09.30)
[반민특위 피습 56주년] 친일파 석방거부 이승만 격노
[편집자주] 1949년 6월 6일은 이승만과 당시 중부 경찰서 윤기병 등 친일경찰 등이 친일파를 조사 처벌하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김상덕)를 습격해 강제 해산시킨 비운의 날이다. 연구소는 5월 31일 제2의 반민특위라 할 수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의 출범을 맞이하면서 1949년 당시 반민특위 습격에 대한 경찰측의 진상규명과 사죄 그리고 요원들에 대한 적절한 명예회복 조치를 기대하면서 경향신문과 공동으로 아래 기사를 기획하였다. 기사 1 [반민특위 피습 56주년] “친일파 석방거부 이승만 격노” 입력: 2005년 06월 07일 07:42:41 민족문제연구소는 6일 반민특위 피습 56주년을 맞아 반민특위 부위원장을 지낸 고 김상돈씨가 1957년 종합실화잡지 ‘진상(眞相)’ 12월호에 기고한 ‘반민특위 습격일 회고담’을 공개했다. 김부위원장은 제헌의원을 시작으로 3·4·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서울특별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하의 이 회고담에 따르면 반민법은 애초부터 정부의 비협조 속에 예산도 지원받지 못했다. 당시 김부위원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위원들과의 대담을 원해 만나보니 ‘노덕술은 유능한 기술자이니 석방시켜달라’고 요청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이대통령의 요청에 “(노덕술은) 악질적인 반민족 행동의 경험뿐인데 신생 대한민국에 그러한 경험의 기술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고 답했다”고 적었다. 그는 또 회고담에서 “이제 나는 내 맘대로 하겠다”며 이대통령이 화를 내고 돌아간 후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고 술회했다. 이어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무장한 수십명의 경찰관을 대동하고 을지로입구 반민특위본부에 나타났다. 민족의 기강을 세우려고 들어온 의용병과 같은 특경대 청년 20명은
아직도 이런 자들이 국립묘지에 누워있다니…
이규봉 대전지부장 ▲ 지난 1일 대전 국립현충원을 찾아 12·12 쿠데타 동지들의 묘소를 참배한 전두환씨와 지인들. ⓒ2005 심규상 2005년 현충일을 앞둔 지난 1일, 12·12 군사반란의 주역 전두환 전 대통령이 당시 반란을 함께 도모한 유학성 등을 참배하러 대전국립묘지를 방문했다. 이에 현충원장이 직접 집례관으로 나서 예정된 묘소마다 의장대, 헌화병, 나팔병을 배치하고 호위를 하였다 한다.유학성은 12.12 군사반란의 핵심인물로 군 형법상 반란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자이다. 옛말을 빌리면 역적인 것이다. 그런 역적의 묘에 역적 수괴가 참배를 하러 가니 정부 관리가 최고의 대우를 해 준 것이다.정상적인 국가라면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강제로 탈취하기 위하여 민간인을 학살하고 각종 부정과 비리, 고문 그리고 납치나 다름없는 조직적인 강제징집 등의 숱한 인권유린을 저지른 일당들은 진작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거나 감옥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은 비웃기나 하듯 여전히 호의호식하며 당당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일당들을 두둔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생겨나고 있다.이해가 되는가? 옛날 같으면 3족을 멸할 역적들이, 활개를 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군사반란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참배를 하니 정부관리가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다는 사실을.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것은 해방 후부터 반민족행위로 얼룩진 과거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되어져, 반민족행위자가 대우받고 애국지사들이 천대를 받아 왔기 때문이다. 국립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친일파 옹호·독재자” VS “설립자 기념해야”
“친일파 옹호·독재자” VS “설립자 기념해야”(아시아경제, 10.09.14)
스크린 속 과거, 시대를 읽는 눈
스크린 속 과거, 시대를 읽는 눈(경남도민일보, 10.09.30)
희귀 반민특위 자료 공개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내려받기 최근 경찰은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역사바로잡기에 나서고 있다. 우리 경찰이 진정으로 부끄러운 과거와 단절하고 거듭나려 한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원죄가 있다. 해방된 조국의 국립경찰이 그 토대를 상당 부분 독립운동을 탄압한 일제경찰에 두고 있었으며, 이들이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친일세력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가기구에 대한 폭압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명백한 죄상이 바로 그것이다.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56년 전 6월 6일은 반민특위가 친일 경찰의 조직적 습격을 받고 사실상 무력화 된 날이다. 친일파와 이를 비호하는 세력에 의해 오욕의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가 봉쇄됨으로써, 이후 한국사회는 식민지시대를 극복하지 못한 채 온갖 부정적 유산을 고스란히 안고 가는 역사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 연구소는 이 날이 우리 현대사에 가지는 의미를 되새기는 뜻에서 반민특위와 관련된 당시 보도와 김상돈 부위원장의 증언 자료를 발굴 공개한다. – 연구소 자료실 – 반민특위 개요 1948년 8월 헌법 제101조에 의거하여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기초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을 공포하였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이 법의 시행을 위해 1949년 1월 8일에 발족한 특별기구이다. 반민특위는 국민적 여망을 배경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의욕적으로 조사활동을 진행하였으나,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 비호세력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국회프락치사건, 친일경찰들의 66 특위 습격사건을 겪으면서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특위 활동은 해산할 때 까지 총 682건을 조사 221건을 기소하는데
논쟁
논쟁_박정희 시대 임금과 노동생산성 문제 70년대 임금몫, 7.8% 포인트 하락…”임금상승 주장은 자료 오독” 2005년 05월 31일 정성진 경상대 박기성교수가 <교수신문> 제356호에서 주장한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1)임금을 평균노동생산성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2)임금은 한계노동생산성과 비교해야 하며, “1988-97년을 제외하고 임금은 한계노동생산성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에 1960-70년대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장상환교수가 주장하듯이 “초과착취 당한 것”이 아니라 “생산에 기여한 만큼” “임금”을 “지급”받았다. 이러한 박교수의 분석은 그가 지지하는 이영훈교수의 주장의 논거가 된 것인데, 이들은 모두 ‘박정희 시대’라고 불리는 1960-70년대가 수출주도 국가주도 초과착취 독재정치에 기초한 고도축적의 시기라는 통설을 뒤집으려 한다. 이교수와 박교수는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이 “초과착취”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1960-70년대 임금은 한계노동생산성과 거의 일치했다는 계량분석 결과를 제시한다. 박교수는 이에 근거하여 ‘박정희 시대’에 “노동시장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에 따라 작동하였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이들의 역사 다시 쓰기 시도가 성공했는가? 형편없이 실패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박정희 시대’는 이교수를 비롯한 ‘뉴라이트’들이 근래 다시 써온 조선후기나 식민지시대와 달라서 방대한 사료들, 아직도 살아있는 자료들 자신이 ‘역사 다시 쓰기’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실증사가로 알려진 이교수는 ‘박정희 시대’ 다시 쓰기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료가 아니라, 박교수의 계량분석 결과 ‘발견’된 사실에 의존하려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발견’된 사실, 혹은 확인되었다는 가설은, 실존하고 있는 방대한 자료들을 피해 갔다는 점에서, 또 박교수의 계량분석이 근거하고 있는 한계노동생산성
“제군들, 몸 다치지 마라” 총장님의 당부가 그립다
“제군들, 몸 다치지 마라” 총장님의 당부가 그립다(한겨레21, 10.09.17)
9월 30일…이완용은 웃고, 조선은 울었다!
9월 30일…이완용은 웃고, 조선은 울었다!(프레시안, 10.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