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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1 | |
[반민특위 피습 56주년] “친일파 석방거부 이승만 격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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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06월 07일 07:42: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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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6일 반민특위 피습 56주년을 맞아 반민특위 부위원장을 지낸 고 김상돈씨가 1957년 종합실화잡지 ‘진상(眞相)’ 12월호에 기고한 ‘반민특위 습격일 회고담’을 공개했다. 김부위원장은 제헌의원을 시작으로 3·4·5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서울특별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이대통령의 요청에 “(노덕술은) 악질적인 반민족 행동의 경험뿐인데 신생 대한민국에 그러한 경험의 기술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고 답했다”고 적었다. 그는 또 회고담에서 “이제 나는 내 맘대로 하겠다”며 이대통령이 화를 내고 돌아간 후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고 술회했다. 이어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무장한 수십명의 경찰관을 대동하고 을지로입구 반민특위본부에 나타났다. 민족의 기강을 세우려고 들어온 의용병과 같은 특경대 청년 20명은 피체 구금되었다”고 적었다. 그는 “그 결과 살아난 것은 악질 친일분자들이고 울분을 풀지 못한 것은 온 민족이었다. 나는 지금도 눈앞에 훤하다. 반민자의 수사가 한창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나의 아들, 나의 남편, 나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통곡하면서 호소하던 국민들의 모습이…. 아침에 출근하면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김부위원장은 이 글에서 이대통령에게 아부하는 친일파의 에피소드도 폭로했다. “이대통령이 낚시를 갔을 때 방귀를 뀌자 옆에 있던 경기도지사 이익흥(일제 고등계형사)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고 말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심희정기자 heejung@kyunghyang.com〉 |
기사 2 | |
[반민특위 피습 56주년] ‘이승만이 배후’ 선친께 들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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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06월 07일 07:42:3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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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6일은 친일파 처단을 위해 제헌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친일경찰에 의해 습격받은 날이다. 당시 반민특위 특경대원들은 ‘개’처럼 끌려가 헌병들에게 짓밟혔고, 민족진영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위원들도 비참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김씨는 “선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이승만 대통령 개입설을 주장했다. 김씨는 “그해 5월 하순 이대통령이 반민특위 관사를 찾아 김위원장에게 반민특위가 잡아넣은 악질 친일파 노덕술 등을 석방시키라고 압력을 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습격을 결심한 것 같다”고 전했다. 반민특위가 해체되자 친일파들은 반민특위 위원 및 특경대원들을 사상범으로 몰았다. 6·25 발발 한달도 안 돼 김씨의 부친은 납북됐고, 그는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다. 정씨는 “반민특위 식구 100여명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고, 가정이 파탄났다”며 “지금이라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고 보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위원장은 납북되기 이전 ‘국민 가슴속에 민족정기는 살아 있다’고 역설했는데 60년 만에 결국 제2의 반민특위가 부활했다”며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일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도록 진상규명위가 과거청산을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심희정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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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하의 이 회고담에 따르면 반민법은 애초부터 정부의 비협조 속에 예산도 지원받지 못했다. 당시 김부위원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위원들과의 대담을 원해 만나보니 ‘노덕술은 유능한 기술자이니 석방시켜달라’고 요청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서술했다.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장남 김정육씨(70)와 특위 조사관을 지낸 정철용씨(80)는 “‘제2의 반민특위’인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가 지난달 31일 부활했을 때 감격스러워 목이 메었다”고 말했다. 이날 반민특위 본부가 있던 현 국민은행 명동 본점을 찾은 정씨는 “국민의 환호 속에서 시작된 친일파 색출을 완성하지 못한 게 평생 한으로 남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