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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 현지 보고

2022년 9월 28일 2382

[자료소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 현지 보고 해방 직후 조선 민중들은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소식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화북 지방에서 결성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의 근황과 활약상을 알고 싶어했으며 아울러 동 단체의 지도자들이 조속히 귀환하여 조국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힘써주기를 바랐다. 이번 호에는 먼저 <신조선보(新朝鮮報)>와 <중앙신문>에 실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 관련 기사를 싣는다. 기고자는 연안에서 활동하다 귀국했거나 8·15 해방으로 옥중에서 풀려난 관련자 3인인데 조선의용군 제2지대원 심운(沈雲)과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으로 유명한 김학철(金學鐵), 경성제대 조선문학 강사이자 경성콤그룹의 일원이었던 김태준(金台俊)이다. – 편집자 주 해외동포는 언제 오나? ― 연안독립동맹(延安獨立同盟)의 근황 8월 15일 이래 우리민족의 가장 관심되는 일은 다년간 국외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워온 모든 혁명전사와 혁명단체의 동향이다. 이제 본사는 연안서 돌아온 심운(沈雲) 씨의 담화를 얻어 독자의 궁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고자 한다.  심운 씨는 1935년에 상해 교통대학(交通大學)에 재학하는 일방, 당시 김원봉(金元鳳) 씨가 주재하던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원으로서 당무공작에 종사하였으며 그 뒤 1942년부터는 조선독립동맹 만리장성 북경지부 분맹원으로, 동당 직속의 조선의용군 제2지대에 소속되어 정치지도에 종사, 동년 말에 천진에 공작차로 잠입하였다.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바 되어 조선으로 압래(押來), 15년 구형에 8년 언도를 받아 투옥되었다가 8월 15일 후에 출옥한 혁명 전사의 한 분이다.  ◇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각지에 흩어져있던 조선 유학생과 망명청년들은 남경으로 모여들었다가 곧 한구로 가서 중앙육군군관학교에

프락치 김순호와 J에게 – 적당히 밥만 먹고 사시길

2022년 9월 28일 660

[후원회원 마당] 프락치 김순호와 J에게 – 적당히 밥만 먹고 사시길 임승관 전남동부지부장 김순호 경찰국장의 프락치 의혹 기사를 보고 잊혀진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프락치로 유혹 당한 일과 내게 정보원임을 고백하던 J의 이야기가…1997년 만 19살 여름. 학생운동으로 경찰에 쫓기던 3개월 중 어느 날. 부친의 지인이 “경찰정보원으로 이름을 올리면 처벌받지 않는다. 네가 원하면 연락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른바 프락치 작업. 집 앞엔 경찰이 상주했고 학교도 갈 수 없어 친척집을 전전했다. 막연함과 초조함, 배고픔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청춘의 혈기는 이런 제안이 오히려 치욕적으로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결국엔 경찰의 조사 후 기소되어 법원에서 징역형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 지금도 선명한 2가지 토막이야기가 있다. 경찰서에서 조사받던 중 경찰관이 시위 중 찍은 사진첩을 펼치며 아는 이의 이름을 적으라 했다. ‘모른다고 시치미 떼면 한 대 맞는거 아닌가’라는 얄팍하지만 진정 어린 근심으로 사진첩을 보는데 앞서 취조당한 학생들의 자취를 보니 뭉클하고 아렸다. 사진 속 얼굴에 선을 그어 이름을 적어놨는데 학생 대표들 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얼굴에 가명을 남겨 둔 것이다. 앞선 이들의 노력에 동참해 “적혀진 이름 말고는 몰라요” 했는데 다행히 큰 강요없이 지나갔다. 나는 사건이 종결되는 시점이 어서 취조가 덜했지만, 앞선 학생들에겐 얼마나 많은 폭력과 협박, 회유가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양심을 팔지 않은 그들이 있었다. 다음 토막은 강원도 철원군에서 군 복무중 재판받던 시기의 이야기다.

항일역사 토크콘서트 1강 후기

2022년 9월 28일 643

[후원회원 마당] 항일역사 토크콘서트 1강 후기 김나우 예일여고 2학년   항일 역사 토크콘서트 1강은 ‘규운 윤기섭’ 선생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그분의 생애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뤘습니다. 토크장 안으로 들어가니 공연석과 관객석의 거리가 멀지 않은 것을 보고, 관객과 함께 소통하는 형식으로 진행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토크 중간중간 저와 제 친구를 언급해주시며 참여를 유도해주셨고, 덕분에 정말 재밌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 우리나라의 역사, 그중에서도 특히나 항일역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어 중고등 역사교사를 꿈꾸는 저에겐 이번 강의가 정 말 유익하고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한국의 고등학생 아무나를 붙잡고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하나만 대보라고 하면 대부분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 매헌 윤봉길 의사 등을 말할 것입니다. 학생들이 바로바로 이분들의 이름을 댈 수 있는 것은 초등학생 때부터 받아온 역사교육을 통해 주입식으로 배우고 암기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관심이 많아서 자주 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독립을 위해, 조국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받쳐 한국 독립을 위해 애써주셨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항일역사라면 어느 정도 자신있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저는 ‘규운 윤기섭’ 선생의 이름을 이번 강의를 통해 처음 들었습니다. 많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내용만으로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껴지며 많은 사람들이 역사토크 콘서트와 같은

경기도박물관 특별전 〈항일과 친일 백년 전 그들의 선택〉 관람 후기

2022년 9월 28일 848

[박물관 답사기] 경기도박물관 특별전 〈항일과 친일 백년 전 그들의 선택〉 관람 후기 김혜영 선임연구원 지난 9월 14일 연구실 및 자료실 상근자들은 경기도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항일과 친일 백년 전 그들의 선택> 관람을 다녀왔습니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주최, 주관하고 우리 연구소가 후원 으로 참여한 이번 전시는 경기도의 독립운동과 친일파(親日派)에 대해서 조명하는 특별전입니다. 연구소와 밀접한 주제를 다루고 있고, 또 연구소에서 대여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어서인지 익숙하기도, 새롭기도 했습니다. 규모가 큰 박물관을 방문할 때면 매번 ‘우리 박물관도 이런 곳에서 전시가 이루어지면 좋겠다. 이런 전시 방법은 우리도 시도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번 관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물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무인티켓 발권기가 있습니다. 박물관은 무료지만 입장권을 출력해서 기념으로 소장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관람했던 곳의 표를 수집하고 있어서 꽤 괜찮은 서비스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입구 정면에는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종류가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실제 사용하기 좋은 물건들도 많아서 저는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있는 손수건을, 다른 분은 기념으로 간직할 수 있는 마그넷을 구매했습니다. 연구소가 운영하고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관람료를 받지 않는 대신 이런 기념품을 다양하게 만들어 판매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전은 캐나다 출신의 영국인기자 메켄지가 찍은 유명한 의병사진을 시작으로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대한제국의 비극, 그들의 선택’에서는 한말과 대한제국기에 펼쳐지는 일본제국주의 국권침탈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청일전쟁 다색판화도 자세한 설명과

SBS 뉴스, 연구소가 발굴·조사한 일제 잔재 연속 보도

2022년 9월 28일 859

[초점] SBS 뉴스, 연구소가 발굴·조사한 일제 잔재 연속 보도 SBS 뉴스는 8월 25일, 26일 이틀에 걸쳐 ‘전범기업 마크가 교표? 학교에 남은 일본 잔재’, ‘유관순 기념탑도 일제식, 곳곳에 남은 일본 잔재’ 보도를 내보냈다. 보도의 주요 내용은 전범기업 미쓰이(三井)의 로고를 학교 교표로 사용하고 있는 부천 삼정초등학교 사례를 비롯해 일장기와 욱일기 모양의 교표를 사용하고 있는 학교를 지적하였다. 또한 유관순, 손병희 등 독립운동가 관련 표석은 물론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송덕비, 충혼탑 모양도 일제의 묘비석 양식을 무비판적으로 따라서 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SBS의 보도는 연구소의 자료 제공과 자문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연구소는 2020년 경기도의 의뢰를 받아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을 수행하면서 경기도 소재 초·중·고등학교 약 2,400개의 교표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과정에서 부천 삼정초등학교 사례를 발견하였다. 또한 이순우 책임연 구원은 <민족사랑> 2021년 11월호에 ‘일제의 잔존 기념물 가운데 유독 사각뿔 모양이 많은 이유는? 사각주(四角柱)에 방추형(方錐形)인 일본군 묘비석 양식의 기원’이라는 글에서 1879년12월 26일에 제정된 일본 해군의 「하사졸묘표촌법(下士卒墓標寸法)의 건(件)」이라는문건이 사각기둥에 사각뿔 형태의 일본군 묘지석 양식의 기원임을 밝힌 바 있다. 방송 이후 연구소 부천지부는 교육청 등 지역의 관련단체들과 함께 부천 삼정초등학교 교표 개정을 위해 움직일 예정이라고 밝혀왔다.

조선총독부 통계엽서

2022년 9월 28일 3032

[소장자료 톺아보기 41] 식민통치의 시각적 선전 – 조선총독부 통계엽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배의 치적을 드러내기 위해 매년 사회 전 분야를 조사하여 <통계연보> 를 발행했다. 통치 주체인 일본은 식민지 지배로 조선에 도로, 전기, 철도 등 근대적 시설이 마련되었고 토지조사사업, 임야조사사업 등을 실시하여 근대적 등기제도를 통한 토지 소유권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하였다. 숫자로 작성한 통계는 이러한 근대화 정책에 힘입어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지표인 셈이다. 조선총독부는 <통계연보> 작성에 그치지 않고 성장지표를 그래프를 통해 대중에게 선전하기 위해 통계엽서를 제작, 배포하였다. 시정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발행한 시정기념엽서 총 38매 중 7매가 농수산물의 증산과 기반시설 등의 통계를 비교한 근대화 관련 관제엽서로 조선의 산업화를 선전하고 있고, 이와 함께 ‘조선의 통계 朝鮮之統計’를 따로 제작하여 조선의 호구戶口, 무역, 재정, 농업, 광산, 수산, 교통, 교육, 토지의 증가를 그래프로 이미지화하여 발행하였다. 일제는 각종 시각 매체를 통해 통치정책을 홍보하였는데 식민지 정부인 조선총독부가 대량 생산한 엽서는 일반 대중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특성상 선전 효과가 컸으며 엽서라는 실용적 용도에 힘입어 보다 은밀하게 제국의 정책을 선전할 수 있는 도구였다. 엽서에 새겨진 성장지표는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해 조선인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논리였던 근대화 관련 이미지였다. 즉 근대화를 환상이 아닌 실제로서 증명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식민지배의 합리화, 조선 근대화의 선전 및 자원 수탈의 정당성을 굳혀나갔다. 일제

멀쩡했던 교가(校歌)와 교표(校標)가 무더기로 개정된 연유는?

2022년 9월 1일 1690

이순우 책임연구원 많은 사람들에게 좀 생소한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일제강점기의 상황에서도 ‘조선어장려시험(朝鮮語獎勵試驗)’이란 것이 한창 성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도 이른바 ‘내지인(內地人, 일본인)’ 관리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조선어 능력시험이 치러졌고 그 성적에 따라 장려수당(獎勵手當)까지 줬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의아한 일이라 생각지 않을 수 없겠다. 이러한 일의 연원을 찾아보니까 무엇보다도 1921년 3월 9일에 제정된 칙령 제34호 「조선총독부 및 그 소속관서 직원의 조선어장려수당에 관한 건(件)」이 눈에 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내지인’ 판임관(判任官) 이하의 직원으로서 조선어(朝鮮語)가 통하는 자에게는 조선총독(朝鮮總督)이 정하는 바에 따라 당분간 월액(月額) 50원(圓) 이내의 수당을 지급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21년 5월 6일에는 조선총독부 훈령 제28호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조선어장려규정」이 정식으로 제정되어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에 속한 ‘내지인’ 판임관, 판임관대우, 고원에 대해 조선어장려시험에 합격하거나 또는 시험위원의 전형(銓衡)을 거쳐 학력(學力)을 인정받은 경우 그 종별등급(種別等級)에 따라 정해준 조선어장려수당(갑종은 4년간, 을종은 2년간)을 지급받도록” 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갑종시험은 “조선어의 통역(通譯)에 차질이 없는 정도”의 수준을 나타내며, 을종시험은 “보통의 조선어를 이해할 정도”의 여부를 측정하는 것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조선총독부가 이처럼 조선어능력을 습득할 것을 일본인 관리들에게 적극 장려하고 이를 위해 특별수당까지 지급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점에 있어서는 일찍이 <매일신보> 1912년 5월 11일자에 수록된 「일선동화(日鮮同化)의 방법(方法)」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었던 것이 눈에 띈다. 야마가타 정무총감(山縣政務總監)은 각도청에

한국 경찰은 일제강점기, 독재 시기 민중의 편에 선 경찰 선배들을 사표로 삼아야

2022년 8월 31일 2948

방학진 기획실장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8월 16일 오후 1시 30분경 황운하 의원과 함께 3층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이 자리에 방학진 기획실장과 임무성 교육위원이 참석했다. 최근 행안부 내에 경찰국이 신설되어 경찰의 권력 시녀화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연구소 회원인 황운하 의원에게 검경 수사권 조정 등 사회적 현안과 경찰의 역사적 과오 반성 등 과거사 청산 문제에 대한 해법이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 의원님이 2005년도 10월 3일 회원 가입을 해주었어요. 벌써 17년 되었는데 그 당시가 경찰청 수사권 조정팀장이었을 때입니다. 당시 어떤 가입의 동기가 있었을까요? ○ 기억이 생생한데, 2005년에 제가 경찰청 수사권 조정팀장을 했었습니다. 수사권 조정업무라는 것은 크게 보면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검사 주도 형사사법 체계, 또는 검찰 주도 형사사법 체계는 일제 식민지배의 잔재입니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검사제도와 경찰제도가 들어온 것도 고종 임금 시절 조선의 식민지화를 준비하던 일제에 의해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식민지배가 본격화되면서 경찰이 식민지배의 도구화가 되고, 검사제도도 일본의 형사소송법 제도를 그대로 모방해서 적용하였는데, 그만 광복 후의 우리 형사사법체계의 근간이 돼버렸습니다. 사실 군국주의 시절 일본의 형사사법체계에서는 경찰의 권한도 강했지만, 검찰의 권한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경찰에게 영장 없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감옥에 넣을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소수의 검사가 경찰을 완전히 지휘할 수 있도록 해놨어요. 일왕의 입장에서는 검사만 장악하면 경찰까지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렇게 강한

독립운동의 흔적을 사진으로 담는 김동우 작가님의 강연을 듣고

2022년 9월 2일 1395

[후원회원 마당] 독립운동의 흔적을 사진으로 담는 김동우 작가님의 강연을 듣고 남경록 후원회원 갑작스레 폭우가 쏟아졌다. 지붕이 뚫어질것 같은 엄청난 빗소리. 왜 하필 민족문제연구소에 강의를 들으러 가는 날에?? 솔직히 5초 정도 망설였다. 갈까말까 하지만 그런 비를 이겨내고 남영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사진작가 김동우 님의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강의가 있는 날이다.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한 나는 그분이 출연하셨다던 ‘기아자동차 K9 CF’는 물론, ‘유키즈’라는 방송을 본 적도없다. 그래서 생소한 이름의 작가였다. 우리가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을 당시 세계각지에서 독립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지구 반대편인 멕시코, 쿠바 등지에 그 후손분들이 살아계신다는 것은 잘 몰랐었다. 김동우 작가님은 다니던 언론사를 그만두고 사비를 털어 멕시코, 쿠바, 인도, 중국, 미국, 일본 등에 가서 독립운동과 그 후손들의 흔적을 사진으로 담아왔다. 멕시코에서는 식당을 운영하여 독립운동에 거액을 기부한 김익주 선생, 지금은 엘 메르카도 시장이 되어버린 독립군을 훈련시켰던 숭무학교 터, 우리에게 낯선 나라인 쿠바에서는 독립운동을 하신 유명한 임천택 선생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응원하셨던 이윤상 선생. 미국에서 만난 안창호 선생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막내 아드님 이야기. 유관순 열사의 영어 선생인 프랭크 윌리엄 선생이 한국광복군과 멀고 먼 인도에서 만난 이야기. 중국의 독립군은신처인 동굴에 새겨져 있던 태극기와 4명의 독립군 이름. 그리고 안중근 의사가 ‘악의 축’을 저격한 하얼빈역의 1번 플랫폼 이야기. 일본에서 윤봉길 의사의 흔적을 촬영하기

나의 8·15 회고

2022년 9월 2일 1255

3천만이 한결같이 느낀 8·15의 감격은 또한 3천만이 제각기 별다르게 느낀 감격이기도 하다. 수만 리 이역에서 열혈의 전선에서 이날을 맞이한 이도 있으며 지옥의 철창 속에서 징용 일터에서 그 순간을 맞이한 이도 있고 온세상의 행복을 독차지한 듯한 기쁨과 용기와 정열로 맞이한 혁명기도 있는가 하면 눈앞이 캄캄하여 정신을 잃은 민족 반역자도 있다. 이제 세월은 흘러 만 1주년! 무지개 같은 희망도 아침이슬같이 사라져 차디찬 현실에 몸서리치는 사람, 천길만길의 몰락을 각오했었으나 두고 보니 그렇지 않다고 웃음 짓는 친일 반역배. 8·15 돌맞이의 기분도 역시 각인각색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조선민족 전체가 가장 양심적이었던 순간이 곧 1년 전 그날이 아니었던가? 성스럽기까지도 하던 8·15 그날의 회고를 오늘에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 아닐 것이다. – <자유신문> 편집자 드디어 옥문은 열리고 혁명동지들과 근로인 위한 새 설계 나의 8 ·15 회고(1) 전평(全評) 허성택(許成澤) 씨 나는 청주에 있는 사상범예방구금소에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일제 항복의 방송은 듣지도 못했다. 간수들이 모여서 수군거리는 중에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이제는 살았구나 했다. 왜적이 항복하되 9월이나 10월경 일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렇게 빨리 항복하리라고는 뜻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8월 17일 새벽 형무소 문앞에 몰려온 청주 시민들의 열광적 환호와 따뜻한 위로를 받으며 철창문을 나서던 그때의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훤하다. 일제의 강압에서 놓여 자유를 얻는다는 느낌, 자유를 얻는다는 느낌을 몸으로 직접적으로 체험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