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경학원 명륜당이 1937년 이후 혼례식장으로 변신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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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37]

경학원 명륜당이 1937년 이후 혼례식장으로 변신한 까닭은?
정신작흥과 사회교화의 광풍 속에 탄생한 ‘의례준칙(儀禮準則)’

• 이순우 책임연구원

 

<매일신보> 1934년 11월 11일자에 수록된 ‘국민정신작흥에 관한 조서 환발기념식’의 장면들이다. 왼쪽 위의 사진은 조선신궁 광장에서 경성부 주최로 열린 기념식장이고, 오른쪽과 아래의 사진은 조선총독부 청사 앞에서 거행된 조서봉독식(詔書奉讀式)에 참석한 우가키 총독의 모습이다. 「의례준칙」 시행에 관한 총독유고와 관통첩은 바로 이날에 맞춰 <조선총독부관보>에 게재되었다.

 

조선총독부가 짓고 조선통신사(朝鮮通信社)가 제작 배포한 <(조선총독부 제정의) 의례준칙과 그 해설> (1937)의 표지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조선총독부 제정의) 의례준칙과 그 해설> (1937)의 말미에 첨부되어 있는 ‘경학원 혼례식장도’의 모
습이다. 경학을 가르치고 문묘에 배례하는 공간이 느닷없이 결혼식장으로 변신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조선사회교화요람>(1937)에 수록된 「경학원사용규정」의 세부 조항이다. 여기에는 「의례준칙」에서 정한대로 혼례식의 절차를 준수하여 경학원에서 이를 거행할 때 지켜야할 절차와 사용조건 등을 담고 있다.

<매일신보> 1937년 7월 4일자에는 경학원에 의례부(儀禮部)가 신설된 이후 최초로 거행된 결혼식에 관한 소식이 담겨 있다. 사진에 보이는 곳은 경학원 명륜당이며, 이날 예식을 올린 한 쌍은 중추원 참의 신석린의 사위와 딸이 되는 이들이었다.

<매일신보> 1942년 9월 23일자에는 조선신궁 봉찬전에 개설된 결혼식장의 배치도가 소개되어 있다. 이 당시에는 경학원 명륜당과 같은 공간 뿐만이 아니라 신사 등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신전혼례식’이 크게 성행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경학원 문묘 신문(經學院 文廟 神門)’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일제패망기 무렵의 사진엽서이다.
이곳 대문에 ‘충효보국’과 ‘황도선양’이라고 쓴 구호판이 부착된 모습이 또렷하다. (개인소장자료)

조선총독부는 시정(始政) 이래 일한병합(日韓倂合)의 굉모(宏謨)에 준유(遵由)하여 강내(疆內) 민중(民衆)의 영원한 강복(康福)을 증진하기 위하여 민도(民度)를 고량(考量)하며 시세(時勢)의 진운(進運)에 순응하여 각반(各般)의 시설을 행한 지 자(玆)에 이십유사년(二十有四年)이라. 기간(其間) 사회(社會)에 진보(進步)와 민력(民力)의 신전(伸展)이 저대(著大)하며 특(特)히 자력갱생(自力更生) 농산어촌진흥(農山漁村振興)의 시설이 착착(着着) 기서(其緖)에 취(就)하여 도비(都鄙)를 통(通)하여 다만 물질방면(物質方面)뿐 아니라 인문교화방면(人文敎化方面)에도 역(亦) 기(其) 발달이 현저하여 민풍(民風)이 점차 혁신(革新)되고 있다 할지나 일반생활양식중(一般生活樣式中) 각종의례(各種儀禮)와 여(如)한 것에 지(至)하여는 구태(舊態)가 의연(依然)하여 오히려 개선(改善)할 여지(餘地)가 불소(不少)하다. (하략)

 

<조선총독부관보> 1934년 11월 10일자에는 이런 구절로 시작되는 조선총독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의 유고(諭告) 한 토막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의 아래에는 이와 함께 정무총감(政務總監)의 명의로 된 「관통첩(官通牒) 제39호 의례준칙제정(儀禮準則制定)의 건(件)」이 나란히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일제가 구태의연한 생활의례를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자력갱생(自力更生)과 생활개선(生活改善)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도입했던 이른바 ‘의례준칙(儀禮準則)’이 공식적으로 첫 선을 보이는 순간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례준칙」이 처음 공포된 날인 1934년 11월 10일은 ‘국민정신작흥조서 환발기념일(國民精神作興詔書 渙發紀念日)’이기도 했다. <일본제국관보> 1923년 11월 10일자(호외)를 통해 처음 등장한 이 조서는 원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격렬하게 전개된 여러 정치 사조(思潮)의 분출과 격동에 대처하여 국민정신(國民精神)을 함양진작(涵養振作)할 것을 부르짖고, 특히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관동대지진) 직후의 사회적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온 것이며, 내용상으로는 부화방종(浮華放縱)과 경조궤격(輕佻詭激)을 떨쳐내고 질실강건(質實剛健)과 순후중정(醇厚中正)을 되살려 국가의 흥륭(興隆)과 민족의 안영(安榮), 사회의 복지(福祉)를 꾀한다는 것에 주안점이 있었다.
그 이후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등장을 둘러싼 내외의 위기(危機)와 동요(動搖)에 대해 국체명징(國體明徵), 경신숭조(敬神崇祖), 심전개발(心田開發) 등으로써 국민정신을 새롭게 작흥(作興)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1923년 당시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인식에 따라 이 조서의 의미와 위상이 다시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에서는 스스로 ‘민심작흥운동 총본영(總本營)’이 되어 1932년부터 해마다 조서환발기념일인 11월 10일을 기려 성대한 대조봉독식(大詔奉讀式)을 거행한 바 있었다.
그러니까 「의례준칙」의 공포일을 구태여 1934년 11월 10일에 맞춘 것은 큰 맥락에서 이것이 ‘국민정신작흥’을 실행하는 방법의 한 갈래였던 탓이기도 했던 것이다. ‘의례준칙’에서 담고 있는 주된 내용은 <조선일보> 1934년 11월 13일자에 수록된 「의례준칙(儀禮準則), 개정(改正)된 요점(要點)」 제하의 기사에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

 

조선 재래(朝鮮 在來)의 각종 의례를 개정하여 신시대(新時代)에 적합하도록 의례준칙을 제정 발표하는 동시에 거(去) 10일 총독유고(總督????告)가 발표되었다 함은 기보(旣報)와 같거니와 신준칙(新準則) 중 중요한 점을
거(擧)하면 다음과 같다.
◇ 결혼(結婚)
• 혼인연령(婚姻年齡): 남(男) 20세, 여(女) 17세 이상으로 함/ • 약혼(約婚); 사주(四柱)를 교환함/ • 연일(涓日); 신부가(新婦家)에서 혼례일을 복(卜)하여 신랑가(新郞家)에 통지함/ • 납폐(納幣): 청홍 이단(靑紅 二端)으로 함/ • 결혼식(結婚式): 신부가(新婦家), 신사(神社) 혹은 사원(寺院), 교회당(敎會堂)에서 행함/ •의식종료후(儀式終了後) 신랑가에서 혼례에 참렬한 근친자(近親者)만을 청하여 간단히 축연(祝宴)을 개최함.

◇ 상례(喪禮)
• 장일(葬日): 장식(葬式)은 특수한 사정이 없는 한 5일 이내에 이를 행함/ • 발인(發靷, 출관) 시각은 조조(早朝)로 하고 영구(靈柩)는 구식상여를 사용한 경우에는 호창(呼唱)을 폐하고 정숙을 지킬 것. 단(但), 자동차를 사용함도 무방함/ • 상기(喪期) 및 복기(服期): 상기중은 지애지통(至哀至痛)의 뜻을 가지고 특수한 사정이 없는 한 업무(業務)를 폐함/ • 복상기간(服喪期間)은 1개년, 100일, 50일, 30일의 사종(四種)으로 개폐 단축함.

◇ 제례(祭禮)
• 기제(忌祭): 기제는 조칭(祖稱)까지에 한하여 매년 기일에 행함/ • 묘제(墓祭): 한식(�⻝), 추석(秋夕), 중양(重陽)에 행함.

 

이러한 내용을 담은 「의례준칙」의 제정 이후에는 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한 각종 홍보책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조선총독부가 짓고 조선통신사가 제작 배포한 <(조선총독부 제정의) 의례준칙과 그 해설>(1937)이란 책자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 책의 말미에는 특이하게도 ‘경학원(經學院)의 혼례식장도(婚禮式場圖)’라는 그림 하나가 부록(附錄)으로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 나오는 ‘경학원’은 조선총독부가 기존의 성균관(成均館)을 재편하여 식민지배정책과 이념을 홍보하는 도구로 활용하고자 1911년 6월 15일에 제정한 조선총독부령 제73호 「경학원규정(經學院規程)」을 통해 전환 설립한 기관이었다. 이 규정에는 “경학원은 조선총독의 감독에 속하며, 경학(經學)의 강구(講究)를 하고 풍교덕화(風敎德化)를 비보(裨補)하는 것을 목적으로함”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어떠한 연유로 이곳에 혼례식장이 개설된 것인지를 찾아봤더니 <동아일보> 1937년 6월 3일자에 수록된 「결혼식장(結婚式場)으로 경학원(經學院)을 개방(開放)」 제하의 기사 하나가 포착된다.

 

공문(孔門)에 군자는 조단호부부(造端乎夫婦)라는 유명한 명제가 있으면서도 오늘의 결혼은 공자 맹자의 성인과 인연이 멀은 바 많더니 이제 경학원을 결혼식장으로 개방한다고 한다. 더구나 재래는 식장과 혼례용구를 빌리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으나 이제 경학원을 사용하면 단 10원으로 식복은 물론 학장도구까지 빌릴 수 있으며 웅대한 고전식의 엄숙한 건물과 환경 속에서 원앙의 짝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특별한 규정은 사용자는 의례준칙(儀禮準則)에 정한 혼례식에 의할 것과 신랑신부는 경학원 문묘(文廟)에 참배하여 이성지합(二性之合)을 두 성현에게 고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경학원 명륜당(經學院 明倫堂)을 혼례식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곳에는 의례부(儀禮部)가 신설되고 이에 수반하여 「경학원사용규정(經學院使用規程)」이 새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결과로 이곳에서는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실제로 첫 결혼식이 벌어졌다는 얘기가 들려왔는데, 알고 보니 그 주인공은 강원도지사, 충청남도지사,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 등을 지낸 신석린(申錫麟, 창씨명 平林麟四郞, 1865~1948)의 사위와 딸이었다.

<매일신보> 1937년 7월 4일자에 수록된 「경학원 개방후(經學院 開放後) 최초(最初)의 결혼식(結婚式), 사모관 대신 갓에 쪽도리 신부」 제하의 기사는 이날의 풍경을 이렇게 그렸다.

 

최근 동양도덕을 물리치고 서양풍조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게 되어 고래의 성현이 만들어놓은 의례(儀禮)가점차로 자취가 사라지려는 형편에 이르렀으므로 옛 도덕을 부흥케 하기 위하여 경학원(經學院)에서 의례부(儀禮部)를 신설하고 동원(同院)을 일반에 개방하여 결혼식장(結婚式場)으로 사용케 하는 동시에 그곳에서 식을 거행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취한 옛날 조선 고유의식으로 신랑은 반드시 사모관대를하고 신부는 활옷에 족두리를 쓰도록 하였는데 금번에 그 경학원에서 처음으로 결혼식을 거행한 사람이 있다. 그는 부내 명륜정(明倫町) 1정목 36번지 이철재(李哲載) 씨의 2남 이종국(李鍾國, 24) 군과 전 충남도지사(前忠南道知事) 신석린(申錫麟) 씨의 장녀 신태희(申泰喜, 21) 양으로 3일 오후 2시경부터 명륜당(明倫堂)에서 장엄한 식을 거행하였는데 주례(主禮)는 대제학 정봉시(大提學 鄭鳳時) 씨 대리로 부제학 유진찬(副提學 兪鎭贊)씨, 조례(助禮)는 김완진(金完鎭) 씨였으며 내빈으로는 관공리 유력자와 사회 각 방면의 명사들이 다수 참석하여 자못 성황을 이루었었다. (사진은 식장 전경)

 

그 이후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전시체제기의 와중에 물자절약과 의례간소화의 요구가 속출하게 되자 이러한 상황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43년 8월 24일자에 수록된 「경학원(經學院)의 결전체제(決戰體制), 결혼식장 삼종양식 제정(結婚式場 三種樣式 制定)」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부내 경학원(經學院)에서는 결혼양식을 간소히 하여 결전국민생활을 확립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전부터 동원(同院)의 일부를 결혼식장으로 개방하였는데 이번 동원규칙의 일부를 개정하여 종래 단 한 가지이던 결혼식의 의식 종류를 송(松), 죽(竹), 매(梅)의 세 가지로 하고 식장과 용구, 주례(主禮) 등을 각각 달리하여 널리 분에 맞는 의식을 이용하도록 하였다. 동학원에 결혼식장을 특설한 것은 지나사변부터의 일로서 사회교화와 생활개선을 목표로 총독부에서 제정한 의례준칙(儀禮準則)에 의한 의식을 채용한 결과, 간소한 가운데 정중하고 엄숙한 의식은 일반의 환영을 받아 지금은 하루에 5, 6쌍의 신청이 있는 성황이므로 이번에 확충하기로 된 것이다. 비용은 송이 50원, 죽과 매가 각각 30원, 20원인데 송은 당분간 취급하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일제패망기로 접어들수록 비단 ‘경학원’이라는 공간뿐만이 아니라 조선신궁 봉찬전(朝鮮神宮 奉贊殿)을 비롯하여 경성신사(京城神社)와 같은 곳에서 일본정신(日本精神)을 앞세워 거행되는 이른바 ‘신전결혼식(神前結婚式)’이 기승을 부렸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고 보니 이 대목에서 문득 예전에 우연히 마주쳤던 문묘 대문(文廟 大門)의 전경을 담은 사진엽서 하나가 새삼스레 떠오른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곳에는 대성전 대문(大成殿 大門) 앞에 제법 큼직하게 ‘충효보국(忠孝報國)’과 ‘황도선양(皇道宣揚)’이라고 쓴 구호판이 나란히 부착된 광경이 포착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황도유학(皇道儒學)의 본거지로 전락한 옛 성균관 일대의 위상과 실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 아닌가 싶어 자못 씁쓰레한 여운을 남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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