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부민관 폭파 의거 80주년 특별전시 ‘조문기의 시한폭탄은 아직 터지지 않았다’ 개막
[초점] 부민관 폭파 의거 80주년 특별전시 ‘조문기의 시한폭탄은 아직 터지지 않았다’ 개막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은 4월 15일 부민관 폭파 의거 80주년 기념 특별전시 ‘조문기의 시한폭탄은 아직 터지지 않았다’의 개막식을 열었다. 이날 개막식 행사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윤경로 관장(전 한성대 총장)과 여러 상근자들을 비롯해 이학영 국회 부의장,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도 참석했다. 특히 조문기 지사의 사위인 김석화 님과 의거의 동지였던 유만수, 강윤국 지사의 아들인 유세종, 강경옥 님도 함께해 더욱 뜻깊은 자리였다. 윤경로 관장은 개막식 축사에서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사장이던 조문기 지사의 애국 의지 덕분”이었다면서 “생전에 독립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던 조문기 지사를 기리는 것은 친일청산을 너머 민주사회 건설과 남북통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우리 연구소 제2대 이사장이자, 1945년 7월 24일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폭파의거의 주역인 독립운동가 조문기의 삶과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총 3부로 구성된 전시는 화성에서 태어난 조문기의 어린 시절과 일본에서의 활동, 부민관 폭파 의거, 광복 이후 친일청산을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한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우리 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특별전에 조문기 지사가 직접 쓴 회고록 초고인 「조국(祖國)이 뭐길래」와 각종 원고와 서신, 연구소 소장자료인 「일한합병기념엽서」, 「부민관 사진엽서」 등 총 44건 320점을 대여했다. 이번 전시는 화성시 향남읍에 위치한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에서 오는 8월 31일까지 열린다. • 김현지 대외협력실 활동가
충남지역위원회, 충남 야5당 및 시민단체들과 함께 제106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 가져
[초점] 충남지역위원회, 충남 야5당 및 시민단체들과 함께 제106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 가져 우리 연구소 충남지역위원회(위원장 최기섭)는 천안민주단체연대회의,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야5당(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진보당·기본소득당·정의당) 충남도당과 함께 4월 11일 천안 남부오거리 석오 이동녕 선생 동상 앞에서 ‘제106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을 공동주최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100여 명이 참석했으며 윤경로 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은 개회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부인하는 세력들이 등장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이동녕 선생 고향인 천안에서 열리는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이 올바른 역사 인식과 자주독립 정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념식은 당초 이동녕기념관에서 개최 예정이었지만 기념관을 관리하는 천안시(시장 박상돈)는 “인근 마을 주민들 민원 발생 등으로 이동녕 선생 추모행사를 제외한 모든 외부 행사의 대관이 불가하다”고 통보하여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확인 결과 이미 여러 행사가 이동녕기념관에서 개최되고 있었다. 따라서 천안시의 불허 결정은 국민의힘 소속인 박상돈 시장의 방해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이에 대해 문진석 국회의원(민주당 충남도당 위원장)은 “내년부턴 기념관에서 행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기념식을 처음 제안한 충남지역위원회는 앞으로도 여러 역사 관련 행사를 지역의 정당·사회단체들이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충남지역위원회는 3월 25일 천안NGO센터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부천지역위원회, 부천항일운동기념비 제막식 거행
[초점] 부천지역위원회, 부천항일운동기념비 제막식 거행 우리 연구소 부천지역위원회(위원장 박종선)와 부천시민연합은 작년 6월부터 공동으로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 결과 부천의 3·1운동이 일어난 3월 24일에 맞춰 안중근공원에서 ‘부천항일운동기념비’ 제막식을 열었다. 제막식에는 두 단체 회원뿐만 아니라 조용익 부천시장, 김병전 부천시의회의장, 정인조 전 부천희망재단 이사장, 이재영 경기도의원, 황진희 경기도의원, 이종문 시의원, 김선화 시의원, 김명원 전 경기도의원, 백창환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장 등 많은 내빈들이 참석했다. 박종선 위원장은 기념사를 통해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부천의 자랑스런 항일독립운동을 알리는 기념비를 시민모금과 부천시의 관계부서 협조로 건립하게 되어 그 의미가 더욱 깊다고 말하며, 부천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념하자는 여론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2019년부터 진행되었는데 ‘부천항일운동기념비’로 6년만에 결실을 맺었다고 말했다. 또한 시민사회가 조례 제정, 항일독립운동 연구, 일제잔재 청산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부천시에 이를 기념하는 사업을 추진할 것을 제안했음에도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한 뒤, 이 기념비를 출발점으로 다양한 사업이 추진되길 바란다고 언급했다. 최재숙 부천시민연합 상임대표도 기념사를 통해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 되게 마련이라고 하며, 일제에 의해 고통받은 역사도 항거한 역사도 모두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래세대를 위해 부천의 항일독립운동을 알리고 동시에 역사정의를 위한 교육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용익 부천시장은 축사를 통해 3·1운동은 우리 헌법전문에 실려있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독립운동으로 부천시 차원에서도 이를 기념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할 것이며, 2년 진행되다
일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해 일제에 나라를 팔아넘긴 경술국적(庚戌國賊)
[소장자료 톺아보기 69] 일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해 일제에 나라를 팔아넘긴 경술국적(庚戌國賊) 1910년 7월 23일 서울에 부임한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일본 수상으로부터 강제병합 조약 초안의 대강과 병합 후의 통치방침까지 지시받았다. 데라우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의 저항 언로를 막기 위해 『대한민보』와 『대한매일신보』 등을 발행금지시켰다. 7월 29일 이완용을 총리대신으로, 박제순을 내부대신으로 한 이완용 내각을 새로 조각하였다. 8월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과 조중응을 통감관저로 불러 강제병합조약의 초안을 보여주고 비밀리에 논의한 뒤, 8월 18일 대신들을 모아놓고 내각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났고 ‘경술국적’이라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시종무관장 이병무, 궁내부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황족대표 이재면(이희), 그리고 3·1운동 당시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작위를 박탈당한 중추원의장 김윤식이 조약에 찬성하였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 내각이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개최해 ‘한일병합’이란 안건을 통과시켰다. 곧바로 양국의 전권위원인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강제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민의 격렬한 반항을 염려하여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가둬놓은 뒤인 8월 29일 이를 반포하였다. 이른바 강제병합조약의 조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善策)이라고 확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민족사랑 202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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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관련 자료
[자료소개]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관련 자료 1925년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경과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925년 3월 13일 곽헌·최석순 등 10명의 의원이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상정했고, 3월 21일 탄핵 심판서가 제출되었다.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함”이라는 짧은 주문과 함께 세 가지 이유가 덧붙여졌다. 3월 23일 임시의정원이 이를 통과시켰다. 이승만 탄핵안이 통과된 그 자리에서 박은식이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12월말부터 개헌의 중심축에 서 있던 박은식은 3월 24일 제2대 임시대통령에 취임하고, 바로 새 내각을 구성했다.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제42호(1925.4.30)에 실린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 결의안」과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 심판서」, 그리고 이승만 탄핵의 시발점이 되었던 신채호 등 54인이 연서한 「(대미 위임통치청원) 성토문」(1921.4.19)이다. — 편집자 결의안 주문 1. 본원(本院: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임시헌법 제21조 제14항에 의하여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심판에 부치기를 결의함 이유 1. 헌법 제14조에 부기한 서약과 동 39조를 위반하였나니라. 증거 가. 민국 6년(1924) 12월 22일자로 전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발송한 대통령 공첩(公牒)에 의하면 “하와이[布哇] 교민의 인구세 중지한 것은 다 본통령(本統領: 이승만을 가리킴)의 지휘에 의하여 행한 바이니 위원이나 단장을 힐책할 것이 아닙니다”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본통령이 하와이 민단장과 부인회장에게 신칙(申飭)하여 상해로 납송할 공전(公錢)을 다 정지하고 더욱이 훈칙(訓飭)을 기다리라 하였나니”라고 하였음 설명 헌법 제14조에 부기한 선언문을 들면, “나는 일반 인민의 앞에서 성실한 심력(心力)으로 대한민국 임시대통령의 의무를 이행하여 민국
조선부로수용소(연합군포로수용소) 탐방기
[식민지 자료관 1] 조선부로수용소(연합군포로수용소) 탐방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이번 호부터 새로 꾸며지는 「식민지 자료관」은 일제침탈사와 관련한 숨은 자료를 발굴하여 소개하는 코너이며, 이순우 특임연구원의 기존 연재물인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과는 격월제로 게재될 예정이다. (편집자) 여기에 소개하는 ‘조선부로수용소(1942년 7월 5일 개설)’는 태평양전쟁의 확전 초기 단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거쳐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때 십만여 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력이 대거 포로로 전락하면서 생겨난 결과물이었다. 전투현장도 아니고 일본 본토도 아닌 곳에 난데없이 포로수용수가 설치된 것은 “반도인(半島人, 조선인)의 영미숭경관념(英米崇敬觀念)을 일소하고 필승의 신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매우 유효하므로 …… 영미부로(英米浮虜) 각 1천 명을 조선에 수용하고 싶다”는 조선군사령부의 요청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42년 8월 16일 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출발한 1천 명에 달하는 영국군 포로(호주군 100여 명 포함)가 3천 톤급 수송선 후쿠카이마루(福海丸)을 타고 1942년 9월 24일에 부산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고, 그 다음날인 9월 25일 경부철도를 통해 용산역에 당도하여 삼각지와 용산경찰서 앞을 지나 최종 목적지인 ‘조선부로수용소 본소(本所; 지금의 청파동 3가 100번지 신광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안착하였다. 이 가운데 일부 포로들은 영등포역에서 분할되어 상인천역을 경유하여 인천에 있는 ’조선부로수용소 분소(分所)‘에 배치되었다. 일제는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전쟁수행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일조하도록 하겠다는 계략에 따라 1943년 9월에는 함경남도 함흥에 흥남(興南) 캠프가 새로 설치되어 경성과 인천에서 선별된 230명의 포로들을 이곳으로 재배치한 적도 있었다.
광화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애국가와 신흥무관학교 교가가 울려 퍼진 이유
[돌려보기] 광화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애국가와 신흥무관학교 교가가 울려 퍼진 이유 이정윤 독립운동가 후손 지난 12월 3일, 대한민국 국군이 국민을 향해 무기를 겨누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윤석열은 국회의 입법독재에 대해 국민에게 호소하기 위한 계엄을 선포했다고 하지만,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대가 정권의 도구로 전락한 사건으로, 군이 국민을 억압하던 독재정권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이후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 질서를 훼손하고 내란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국가 주요 기관들이 혼란에 빠졌고, 국내외적으로도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정치적 압박이 거세졌다. 그러던 중, 법원은 절차적 문제와 구속 필요성에 대한 재검토 끝에 윤 대통령의 구속 취소를 결정했고, 검찰 또한 즉시 항고를 포기하면서 그는 52일 만인 3월 8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석방되었다고 해서 그가 무죄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 질서를 위반하고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했다는 혐의로 여전히 탄핵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헌법재판소에서는 그의 직권남용, 군을 동원한 불법적 조치, 계엄령 선포 과정에서의 법적 정당성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윤석열을 심판하는 것은 헌재만이 아니다. 매주 토요일,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주최하는 집회가 광화문에서 열리고 있다. 지금까지 14차에 걸쳐 열린 집회는 시민들의 민주주의 수호 의지를 보여주는 공간이 되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와 군 동원을 ‘헌정 질서 파괴’로 규정하며, 그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지킨 가치,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팔라우의 조선인들
[연구소 글방 20]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팔라우의 조선인들 김명환 연구실 학술팀장 대구 출신 ‘태구만’의 묘 1973년 10월 어업기지 업무파악을 위해 팔라우(Palau) 코로르(Koror)에 머물던 김찬구(金燦球)는 섬 동쪽 산기슭 우거진 잡초 속에 묻혀있던 쓸쓸한 묘지 하나를 발견했다. 기단 위에 세운 묘비에는 「고태구만지묘(故太具萬之墓)」라고 새겨져 있었다. 묘지의 주인인 태구만은 대구 출신으로 1939년 10월 11일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사망 당시 64세로, 그의 죽음을 애도한 조선인들이 “파라오선인친목회(パラオ鮮人親睦會)” 명의로 비석을 세운 것이었다. 64세면 적지 않은 나이였을텐데, 그는 어찌하여 이역만리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일까? 김찬구는 섬사람들로부터 “2차대전 때 징용 와서 일본인들에게 강제노동을 당하면서 고생하던 조선인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였다. 그가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이러하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조선인 20여 명이 끌려와 비행장을 닦기 시작했으며, 태구만도 그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일하던 태씨를 일본인 감독이 채찍으로 때려 기절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징용’되어 온 조선인들이 고통에 못 이겨 ‘아이고’ 소리를 냈던 것을 모르는 현지 사람이 없다고 했다. 김찬구의 전언은 전시총동원체제기 강제동원 되었던 조선인의 참상을 고스란히 전해준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찬구가 원주민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온전히 사실일까? 이야기해준 원주민으로서는 30년 전의 일이고, 또 모르는 사람의 고난을 지켜본 것일 뿐이었다. 혹시 기억의 착오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찬구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우리는 흘려들을 수만은 없다. ‘팔라우’라는 곳 팔라우는 낙원과 같은
후지코시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김명배 할아버지와 한일시민들의 연대
[기고] 후지코시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김명배 할아버지와 한일시민들의 연대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윤석열 내란 세력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선언한 2018년 강제동원 대법원판결을 무시하고 반헌법적이며 반역사적인 ‘제3자 변제’를 밀어붙였다. 고령의 피해자들에게 ‘부당한 선택’을 강요한 윤석열 정부의 폭거에 맞서 일본 전범 기업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지코시(不二越) 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해 온 연구소의 김영환 대외협력실장과 김세호 전략홍보팀장은 지난 3월 26일 일본 도야마(富山)에서 열린 후지코시 주주총회에 원고 김명배 할아버지를 모시고 참가하여 일본 시민, 재일동포들과 함께 후지코시가 대법원판결에 따라 하루빨리 사죄, 배상할 것을 요구하는 방일 항의 행동을 벌였다. 지난 3월 26일 일본 도야마현 도야마시에서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기계·부품회사 후지코시의 주주총회가 열렸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고 임영숙 씨의 남편 김명배 할아버지는 아내의 존엄과 인권의 회복을 위해 94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후지코시 주주총회를 찾았다. 이 자리에서 김명배 할아버지는 회사 측에 “일본 정부와 후지코시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배상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지만, 강제노동을 시키고 피해자들에게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은 채 ‘다 끝났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며 “후지코시는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을 이행해야 한다”고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 후지코시의 무책임한 태도를 강하게 질타했다. 김명배 할아버지의 아내 고 임영숙 할머니는 충청북도 충주에서 12살의 어린 나이에 근로정신대로 도야마로 끌려와 무기 부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