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식민지역사박물관, 교원연수 〈한일조약, 비틀린 한일관계의 원점을 보다〉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교원연수 〈한일조약, 비틀린 한일관계의 원점을 보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1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에 걸쳐 전국 초중고 교사를 대상으로 교원연수를 진행했다. 이번 교원연수 〈한일조약, 비틀린 한일관계의 원점을 보다〉는 2025년 한일협정 체결 60주년을 맞아 지난 60년, 길게는 100여 년의 한일 역사 갈등의 기원과 전개, 한일조약의 문제가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졌는지를 총 7강에 걸쳐 다루었다. 첫 강의는 〈유골 문제에서 야스쿠니 문제까지 – 인권과 평화의 길을 묻다〉를 주제로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맡았다.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부터 야스쿠니 유골 반환까지 강제동원 피해자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며, 국제 관계,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개인의 인권이 후순위가 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2강과 3강은 김민수 남산고 선생님과 이경훈 화홍고 선생님이 강제동원 문제, 역사 쟁점에 대해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칠지를 학교 현장에서 가르쳤던 사례를 중심으로 강의했다. 4강은 우쓰미 아이코 케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가 〈잘못 끼운 첫 단추-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전후보상문제〉를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우쓰미 아이코 교수의 강의와 더불어 1991년 NHK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조문상의 유서’를 감상하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사쿠라이 히토시 디렉터와 질의 응답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5강 김창록 경북대 교수의 〈한일조약, 무엇을 해결했나-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에서는 한일회담 외교문서를 분석하여 청구권 협정의 문제점을 알아보았는데, 강의가 끝나고도 질문이 이어질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교원연수는 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의 〈한일조약, 그 후-미해결 과제들과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과 김민철 경희대
반민특위기념사업회 창립대회
[초점] 반민특위기념사업회 창립대회 반민특위기념사업회 창립대회가 1월 8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렸다. 그동안 반민특위 관련 단체는 반민특위 위원과 조사관을 역임한 분들의 후손들로 구성된 ‘반민특위·국회프락치기억연대’라는 임의 단체로 있었다. 그러다 지난 해 6월 6일 ‘반민특위 강제해산 75년 기억행사’ 개최를 계기로 반민특위 명예회복의 기회가 마련되었다고 판단하고 법인 설립에 적극 나서기로 한 것이다. 여러 차례의 내부 논의 끝에 사단법인 설립을 결의하고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해 제1호로 친일부호 박흥식(화신백화점 사장)을 체포한 날인 1949년 1월 8일을 기억하기 위해 이날 창립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그동안 창립대회 준비에 앞장서며 반민특위기념사업회 사무총장에 임명된 이영국(반민특위 이봉식 조사관 아들, 전 휘문고 음악교사, 우리 연구소 서울남서지 부장 역임) 후원회원은 반민특위기념사업회 발기인으로 약 700명이 참가해 약 2,800만 원의 기금이 모금되었다고 보고했다. 이날 창립대회에서는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아들 김정륙 선생을 이사장으로 김웅진 제헌의원의 따님 김옥자 여사,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문국주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이사장, 이영국 사무총장이 이사로 선출되었고 법인 설립 이후 방학진 기획실장이 반민특위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합류할 예정이다. 창립대회는 음악대학 재학 중인 남민주·연우 자매의 축가와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의 특강으로 마무리했다. 앞으로 반민특위기념사업회는 국회 법인 등록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법인 설립 후에는 반민특위 관련 기념·교육사업과 학술회의는 물론 친일세력이 자행한 반민특위 와해공작과 국회프락치사건 진상규명 작업에도 힘쓸 예정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광복 80주년 새해 첫날 효창원 참배
[초점] 광복 80주년 새해 첫날 효창원 참배 우리 연구소 서울지역위원회(위원장 권위상)와 청년백범(대표 조선동), 국회의원 김용만 의원은 광복 80주년 새해 첫날 오전 11시에 효창원을 참배했다. ‘새해 첫날 효창원 참배’는 청년백범이 30년 전부터 이어온 소박한 행사로 이날은 독립운동가 후손, 회원 등 약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정요인 묘역, 삼의사 묘역, 김구 선생 묘역을 차례로 참배했다. 참가자 중 한명은 태극기가 극우 세력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안타까움에 ‘데니 태극기’를 들고 행사에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임정요인 묘역에서 올드랭 사인 곡조의 애국가 제창을 시작으로 행사를 시작했다. 삼삼오오 가족, 지인들이 함께 온 참가자들의 간단한 자기소개에 이어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되어 계신 동암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선생이 감사 인사를 했다. 삼의사 묘역에 이어 김구 선생 묘소에서는 청년백범 회원이 나누어 김구 선생의 〈내가 원하는 나라〉를 읽었고 끝으로 김구 선생 증손자인 김용만 의원이 12.3 내란 당일 일화 등과 함께 새해 인사를 했다. 방학진 기획실장의 해설로 효창원 참배를 마친 참가자들은 효창원 인근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당초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참가하여 3개의 식당에서 각각 식사했으며 식비는 차영조 선생과 청년백범이 일괄 결제했다. 식사를 마친 참가자들은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방문하여 김승은 학예실장의 안내로 기획·상설 전시를 관람했으며 이어서 윤경로 식민지역사박물관장이 새해 인사를 했다. 차영조 선생은 “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아버지인 동암 차리석 선생의 순국 80주기이기도 한데, 민족문제연구소가 앞장서 준비해 평소보다
[신년사] 평등의 상징인 응원봉을 들고 함께 나아갑니다
[신년사] 평등의 상징인 응원봉을 들고 함께 나아갑시다 함세웅 이사장 연구소 회원과 가족 모든 분들께 새해 인사를 드리며 영육간 건강을 기원합니다. 저는 새해 첫날의 강론을 회원들과 함께 나누며 다시 묵상합니다. 올해는 을사년 뱀의 해입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하라”는 성경 말씀을 체화하며 온 겨레 만민을 위한 <역사기도>를 올립니다. 이이화 선생님은 우리 겨레의 현실을 <역사전쟁>라고 명명하셨습니다. 전쟁 중에는 누구나 다 정성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립니다. 올해가 바로 기도와 기억의 해입니다. 1905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을사늑약의 120주년 1945년, 일본 침략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지만 사실 미국과 소련의 점령으로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의 아픔 80주년 1965년, 비굴한 독재자 박정희의 한일굴욕외교 6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 세 주제와 사건을 마음에 깊이 되새기며 올해를 우리 연구소 회원들은 온 겨레와 함께 참으로 환골탈태, 재생의 해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곧 민족사의 괴물이며 암 덩이인 윤석열을 파면합니다. 3년 남짓한 윤석열의 기간은 우리 민족사의 오욕을 압축한 고난과 시련의 시기였습니다. 아니, 이런 인간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 회의와 함께, “있지! 바로 우리 눈앞에 있잖아!”하며 기막혀했습니다. 이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등 과거 파렴치한 모든 인물과 사건을 압축한 우리 시대의 흉물입니다. 이 괴물들을 우리는 차례차례 정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괴물과 함께 친일, 친미, 반민족 매국노들, 곧 국민의 힘, 부패 정치인들, 거짓 목사, 거짓
『소년세계』 제11권 제1호(1905년 1월) 신년대부록
[소장자료 톺아보기 66] 러일전쟁 참전 육군 무장 이름 알아맞히기 현상 공모 『소년세계』 제11권 제1호(1905년 1월) 신년대부록 초·중등생을 대상으로 하는 아동잡지 『소년세계』는 러일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1905년 1월, 신년호 부록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한 일본 육군 지휘관의 사진 88장을 실은 대형 화보를 제공하였다. 한가운데는 오야마 이와오(大山巌) 육군총사령관을 배치하고 다음 동심원에는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郎) 총참모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구로키 다메모토(黒木爲楨) 오쿠 야스카타(奥保鞏)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 육군대장 등등 11명을 두었으며 나머지 76명의 육군 군인 사진은 16개의 줄에 맞추어 방사형으로 펼쳐놓았다. 전체적인 사진 배치를 볼 때 흰 바탕에 붉은 태양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욱일기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들 사진 안에는 1번에서 88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다. 사진 주위에는 빙 둘러서 글이 빽빽이 인쇄되어 있는데 이것은 메이지 일왕이 1904년 2월 10일 공포한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露國に對する宣戦の詔勅) 전문이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왕좌에 앉은 일본 천황인 본인은 이에 나의 충직하고 용감한 모든 신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라고 시작하는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의 요지는 러시아의 만주 병합이 한국의 독립유지와 극동평화를 침해하기에 일본이 러시아에 화평안을 여러 차례 제시했으나 러시아가 번번이 거절하자 항구적인 평화 회복을 위해 무력에 호소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대부록의 해답법에 관하여>(111쪽)에는 신년 대부록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대부록의 연대기(聯隊旗)에는 현재 유명한 육군 무장이 모두 88명이 나오는데 이들 무장은 여러분이 이상적인 인물로 평소에 쉽게 알 수 있기에 시험삼아 그가 누구인지 맞춰보기
민족사랑 202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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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79차 자료 기증, 임정 요인 조경한 선생의 귀중한 자료도 포함
[기증자료] 심정섭 지도위원 제79차 자료 기증, 임정 요인 조경한 선생의 귀중한 자료도 포함 지난 12월 10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이 제79차 소장자료를 기증하였다. 이번에는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관계 자료가 많아 연구소 조세열 상임이사를 비롯하여 자료실, 학예실, 기획실 책임자들이 광주의 자택을 방문하여 직접 수령하였다. 주요 자료는 심정섭 지도위원의 외조부인 백강 조경한 선생의 ‘임시정부선전위원회 위원 선임통지서’, ‘임시정부국무위원 당선통지서’와 서간, 유묵 등이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 주요 인물들의 사진과 유묵, 도서, 친일파의 유묵 등 총 111점을 기증하였다. 심정섭 지도위원의 자료 기증은 제80차를 목전에 두고 있다. 이에 자료를 선별하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기증자료 특별전시를 계획 중이다. • 강동민 자료실장
동지冬至에 만난 동지同志들
[후원회원마당] 동지冬至에 만난 동지同志들 – 남태령 대첩의 빛나는 밤 – 김수빈 후원회원 저녁 8시. 우린 명동에서 남태령으로 가는 4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12월 21일, 동지(冬至)였다. 이날은 나와 내 친구가 함께 시위를 3탕 뛴 날이었다. 오전 11시 대통령 관저 앞 시위, 오후 3시 광화문, 그리고 저녁 8시 이후 남태령에서의 밤샘 시위. 광화문 시위가 끝나고 다리와 목이 너무 아파 잠시 머물렀던 카페 안에서 남태령에 발이 묶인 전봉준투쟁단의 소식을 접했다. 친구가 “지금 남태령에 사람들 계속 모이고 있대. 이거 봐봐” 하며 보여준 사진에는 농민들의 트랙터와 경찰 버스가 어둠 속에서 대치하고 있고, 그 뒤로 빛나는 야광봉 대열이 늘어선 광경이 담겨있었다. 우리는 묵묵히 짐을 다시 챙겼다. 명동에서 남태령으로 가는 4호선 안에서 ‘2024년의 우금치, 남태령’으로 와 달라는 전봉준투쟁단의 다급한 호소문을 읽었다. 1894년의 우금치, 끝내 넘을 수 없었던 그 고개가 2024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유효하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라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고 오로지 백남기 농민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딱 광화문 집회까지만 예상하고 온 터라 밤을 새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핫팩도, 보조 배터리도, 담요도 없고 물도 부족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백남기 농민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경찰의 물대포로 돌아가신 농민 백남기. 그리고 무엇보다 ‘펄펄 타오르는 젊음’이 있었다. 가서 몸으로라도 때우자. 연설문을 준비해 놓고 너무 떨려 자유발언 신청조차 하지 못하는 쫄보인 내가,
목포 고하도 무화과밭에 남아있는 ‘육지면 발상지지 기념비(1936년)’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4] 목포 고하도 무화과밭에 남아있는 ‘육지면 발상지지 기념비(1936년)’ ‘남면북양(南棉北羊)’으로 상징되는 면화증산의 식민정책이 남긴 흔적 이순우 특임연구원 농촌진흥(農村振興), 자력갱생(自力更生), 민심작흥(民心作興), 심전개발(心田開發), 산금장려(産金獎勵), 북선개척(北鮮開拓), 전작장려(田作獎勵) ……. 이러한 것들은 제6대 조선총독을 지낸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 재임 1931.6.17~1936.8.5)의 통치시기에 그가 내세운 대표적인 금간판(金看板, motto)이다. 그리고 이 목록에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으로 ‘남면북양(南棉北羊)’이라는 용어가 있었다. 이는 면화증산(棉花增産, 면작증식)과 면양장려(緬羊獎勵)를 통해 목화와 양모의 자급자족을 꾀한 것으로, 여기에는 식민지 조선을 원료공급지(原料供給地) 그 자체로 여긴다는 기본적인 인식이 깔려 있었다. 우가키 총독의 부임 직후 만주사변(滿洲事變, 1931년 9월 18일 발생)으로 촉발된 비상시국이 전개되었으므로, 이 와중에 불안한 대외의존도의 심화를 방지하고 위급한 원료수급난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남면북양’을 산업정책의 골간으로 삼는 시기가 한동안 이어졌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36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우가키 전 총독 5년간 치적(宇垣 前總督 五年間 治績)(5) 면작증식장려(棉作增殖獎勵) 지방자치완성(地方自治完成)」 제하의 연재기사에는 우가키 재임 시기에 추진된 면화증산의 성과를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제3년(第三年, 소화 8년)] 면작장려(棉作獎勵)는 우가키 씨(宇垣氏)의 산업정책중(産業政策中) 또한 중요한 역할을 가진 것이니 소화 8년(1933년) 2월 발표된 면화증식계획(棉花增殖計劃)이 그것이다. 익(翌) 9년(1934년)에 수립한 면양증식계획(緬羊增殖計劃)과 병칭(倂稱)하여 유명한 소위(所謂) 남면북양책(南棉北羊策)이라는 것이다. 내선(內鮮)을 통(通)하여 방적업(紡績業)의 발달에 따라 면화수입은 연년(年年) 격증하여 소화 9년(1934년)에는 실(實)로 7억 3천만 원(圓)에 달하는 현상(現狀)이었으니 이의 자작자급(自作自給)을 도(圖)함은 국가적 견지로 끽긴(喫緊, 매우 긴요)한 일대사업(一大事業)이라고 착안(着眼)한 우가키
중일전쟁 시기 ‘한국청년’의 항일음악(1)
[연구소 글방 18] 중일전쟁 시기 ‘한국청년’의 항일음악(1) 이명숙 연구실장 2024년 12월 14일 국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까지 10여 일 이상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진행된 촛불집회에는 아이돌 응원봉과 K-pop으로 무장한 ‘청년여성’들이 대거 등장했다. 누구보다 신명나게 탄핵을 외치며 노래와 춤으로 광장을 가득 메운 이들 청년들을 보며 일제강점기 항일항쟁 어디든 존재했던 ‘청년’이 떠올랐다. 대일항쟁에서 매 순간 커다란 역할을 해냈던 청년 특히 중일전쟁 이후 항일 선전·예술 활동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냈던 청년들에 대해 써보려 한다. 그들의 활동 속에서 활용된 항일노래를 주로 다루고자 한다. 이들 청년은 스스로를 ‘한국청년’으로 명명하며 항일 역사로부터 자신들의 역할을 명백히 자각하고 있었는데, 김구 지도하에 결성된 한국국민당청년단(韓國國民黨靑年團, 1936.7. 결성)의 창립선언에 잘 표현되어 있다. “혁명은 반항이다. 투쟁이다. 그러므로 혁명은 철권(鐵拳)과 열혈(熱血)을 요구한다. 보라. 혁명의 성패가 오로지 청년에게 달렸다는 것을 호언(豪言)이라 할 수 없나니 3·1운동과 6·10운동, 광주학생운동, 그 외에 내외국의 위대한 혁명운동이 모두 이것을 여실히 증명하였다. 우리는 한국의 혁명청년이다.”라고 시작하는 창립선언 말미에 “일본제국주의를 우리의 철권으로 박멸하자! 내지(內地) 전야(戰野)로 들어가자!”라는 구호로써 ‘일제 박멸을 위한 전쟁’이 최종 목표임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선언 후 불과 1년 만인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는 곧바로 군무부 관할로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군사위원을 선임해 개전을 준비했다. ‘한국청년’들 또한 독립전쟁의 호기로 생각하며 임시정부 주위로 모여들었다. 이들 대다수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등에서 군사훈련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