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 55]
구니키다 돗포와 『전시화보(戰時畵報)』
『전지사진첩(戰地寫眞帖) : 압록강전투』(2)
구니키다 돗포(國木田獨步, 1871~ 1908)는 치바현 출생으로 히로시마현과 야마구치현 등에서 자라났다. 아명은 가메키치(龜吉)이며 뒤에 데쓰오(哲夫)로 개명했다. 돗포(獨步)는 필명이며, 학력은 도쿄전문학교[현 와세다대학] 영어정치과를 중퇴했다.
1893년부터 일기 『거짓 없는 기록(欺かざるの記)』을 쓰기 시작해 사후에 출판되었다. 1893년 10월 개화기 작가인 야노 류케이(矢野龍溪)에게 소개받아 오이타현 쓰루야학관(鶴谷學館)의 영어 및 수학 교사로 부임했고 이듬해 8개월 만에 퇴직했다.
1894년 출판사 민우사(民友社)에 입사했다가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1890년에 창간한『국민신문(國民新聞)』의 기자가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위해위(威海衛) 전투에 국민신문 종군기자로서 일본해군 군함에 승선하여 전투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 남동생에게 부치는 서간체 형식으로 전쟁르포 ‘애제통신(愛弟通信)’을 연재해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떨쳤고, 사후에 동명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호치신문(報知新聞)』『민성신보(民聲新報)』 등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하다가 1903년 야노 류케이(矢野龍渓)가 창간한 보도사진 잡지 『동양화보(東洋畵報)』의 편집장으로 발탁되어 3월호부터 제작하였고 9월호부터는 제호가 『근사화보(近事畵報)』로 변경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개전하자 월 1회 발행을 3회로 늘리고 이름도 『전시화보(戰時畫報)』로 바꾸었다. 구니키다 돗포는 전쟁 상황을 자세히 알리기 위해 생생한 현장 사진의 게재와 판형 확대를 도모하는 등 편집자로서의 재능을 맘껏 발휘하였다. 또한 종군기자들의 독창적인 만화 그림도 실어 호평을 받았으며 전성기 때의 발행 부수가 월간 10만 부를 넘어서기도 했다.
러일전쟁 개전 초기 『전시화보』(1904.2. 창간)와 박문관(博文館)의 『일로전쟁사진화보(日露戰爭寫眞畫報)』(1904.4. 창간)가 발간되자 뒤이어 그림과 사진을 삽입한 화보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창간되었다. 수십 종의 화보잡지 중에서도 『전시화보』가 단연 두각을 나타낸 까닭은 글보다는 시각적인 측면을 중시하여 사진과 그림을 대폭 늘렸고, 철저한 사실성(寫實性)에 입각했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전통 화가들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상상 속의 전쟁화를 그려 커다란 비판을 받자, 돗포는 전쟁터에 사진사와 화가들을 직접 파견하여 실제 전투 상황을 촬영하고 그리도록 했다. 또한 ‘기고란’을 통해 아마추어라도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나 그린 그림을 잡지사에 제보케 하여 현장성과 속보성을 강화하였다. 사진이나 그림이 조악하더라도 실제 전시 상황을 묘사했다면 이를 받아들였고 다만 시간과 장소를 명확히 기록하게 하였다. 이는 돗포가 청일전쟁 당시 종군기자로서 겪었던 현장 체험에서 기인한 것이다.
1905년 5월 동해해전에서 일본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지자 돗포는 전후를 대비해 보도사진 잡지의 노하우를 살려 1906년 초두까지 새로운 잡지를 잇따라 기획, 창간했다. 아이들 대상의 『소년지식화보』·『소녀지식화보』, 비즈니스 잡지 『실업화보(實業畫報)』, 여성 대상의 『부인화보(婦人畫報)』(현재까지 간행중), 서양 명화를 소개하는 『서양근세명화집(西洋近世名畵集)』, 스포츠와 오락 잡지 『유락화보(遊樂畫報)』 등 다수의 잡지를 기획하여 12개나 되는 잡지의 편집장을 겸임했다. 하지만 러일전쟁이 끝난 후 원래대로 복원한 『근사화보』의 판매부수가 격감하자 새로 발행한 잡지들이 양호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잡지사 전체로서는 적자여서 결국 근사화보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 1905년부터 건강이 나빠진 구니키다 돗포는 제2소설집 『돗포집(獨步集)』을 출간하고, 1906년에 단편 「호외」를 발표했다. 잡지사를 그만둔 뒤 폐결핵이 악화되어 요양생활 중에 「궁사(窮死)」 「절조(節操)」(1907) 등을 발표하였고 1908년 3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전지사진첩 : 압록강전투』는 사진화보 붐이 크게 일었던 1904년 7월에 출간되었다. 돗포는 사진첩 제작을 위해 여러 명의 사진사를 근위보병사단에 파견하여 일본에서의 군대 승선(2월)부터 구련성 함락(5월)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빠짐없이 촬영하였다. 사진은 행군과 전투 장면, 전적지에서의 기념촬영이 주를 이루지만 이번에 소개하는 사진들에서 보듯이 일본군 병사들의 일상생활도 틈틈이 찍었고, 일본군 전사자도 필름에 담아 전쟁의 참상과 애환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 박광종 특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