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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오래전 ‘이날’] 4월30일 ´고향의 봄´을 친일파가 만들었다고?

2018년 5월 2일 2230

[오래전 ‘이날’]은 1958년부터 2008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 합니다. ■2008년 4월30일 ‘고향의 봄’ 이원수·홍난파는 친일파?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지난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2018 남북정상회담 만찬에서 제주소년 오연준군(12)이 ‘고향의 봄’을 불렀습니다. ‘고향의 봄’은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 한국인의 정서가 깊이 배어있는 노래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김정숙 여사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리설주 여사는 흐뭇한 미소를 띤 채로 오군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김 여사는 ‘고향의 봄’을 따라부르기도 했습니다. 오군의 맑은 목소리로 울려퍼지는 ‘고향의 봄’은 한반도에 봄이 왔음을 체감케하는 따뜻한 봄바람 같았습니다. 그런데 10년 전 이날, 경향신문은 곧 출간 예정이었던 <친일인명사전>에 ‘고향의 봄’의 작사가 이원수가 포함됐다고 전했습니다. 전날 <친일인명사전>의 출간을 맡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회는 수록자 명단 4776명을 공개했습니다. 명단에는 작곡가 안익태, 무용가 최승희, ‘고향의 봄’ 이원수 등 저명한 문화 예술가 인사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원수는 1942년 조선금융조합 기관지 ‘반도의 빛’에 발표한 시 ‘지원병을 보내며’ 등 친일 색채가 농후한 작품을 남긴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아동문학가 동원 이원수가 ‘고향의 봄’을 쓴 것은 보통학교 학생이던 열다섯살 때였습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창원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을 담아 동시 ‘고향의 봄’을 썼는데요. 이 동시는 1926년 방정환이 출간한 잡지 <어린이>에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후 음악가 홍난파가 동시 ‘고향의 봄’에 곡을 붙여

[논평] 한반도 평화시대 개막을 환영한다

2018년 4월 30일 1696

한반도 평화시대 개막을 환영한다 1. 4월 27일 남북 정상이 ‘한반도 평화시대’ 개막을 선언하고, △남북관계의 전면적·획기적 발전 △군사적 긴장완화와 상호 불가침 합의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협의하고 「판문점선언」에 합의하였다. 남북 정상은 남과 북 사이에 합의했지만 실제로 이행하지 못하였던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남북이 한번 합의한 것은 반드시 이행해 나간다는 원칙”을 천명하였다. 4.27 「판문점선언」으로, 해방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입은 우리 민족은 이제 다시 새로운 평화와 번영, 통일의 시대를 가슴 벅차게 내다볼 수 있는 전환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2. 한국사회에서 통일운동의 진전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1960년 4월혁명 직후 분출된 분단체제의 고착화를 막기 위한 통일논의는 반공을 국시로 내건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압살되었다. 이후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탄압받던 통일운동은 87년 6월 항쟁의 열기에 힘입어 1988년부터 다시 분출되기 시작했다. 2000년 남북정상이 합의한 6·15 남북공동선언은, ‘국가연합 내지 낮은 단계의 연방이라는 중간과정을 거쳐서 통일로 간다.’는 통일방도를 제시한 통일 장전이었다. 이어 평화정착과 평화통일 노선을 한층 더 굳게 정착시키기 위해 2007년 10·4선언이 나왔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대결적 남북관계 정책을 폄으로써,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평화통일정책은 폐기되었고, 한반도에는 다시 냉전시대가 도래하였다.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별로 남북 간 민간차원의 교류운동으로 발전했으나, 이명박 정부는 냉전적 사고에 기초하여 민간교류마저도 철저히 차단

[보도자료] 박정희합성사진 조작관련 명예훼손 재판에서 연구소 최종승소

2018년 4월 20일 12062

방ㅇ경씨와 3년간에 걸친 재판 끝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최종승리했다. 대법원은 2018년 4월 12일, 조희대 대법관을 재판장으로 한 대법관 4명의 전원일치된 의견으로 방ㅇ경씨의 상고에 대해 기각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내려진 “500만원을 민족문제연구소에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이 확정되었다. 법원은 1심에 이어 2심과 3심까지 모두 연구소의 손을 들어주었다. 허위사실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현재 문퇴본(문재인정권 퇴진촉구 애국의병혁명본부)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방ㅇ경씨는 2014년 8월경부터 인터넷에 널리 유포된 박정희 합성사진을 연구소가 조작했다며 4년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소를 음해해왔다. 이에 연구소는 2016년 3월 방ㅇ경씨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방ㅇ경씨는 소송대리인으로 서석구 변호사(전 박근혜 변호인)를 선임했다. 변호인은 재판과정에서 연구소를 종북단체라고 지칭하며 “방ㅇ경씨의 행동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애국적 결단”이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1심에서 패소한 그들은 2심에서도 여전히 색깔론을 펼쳤지만 2심 재판부는 1심의 판결을 유지했다. 이후 대법원에 보낸 상고이유서에서도 연구소를 “대한민국에 적대하고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과 궤를 같이 하여 역사를 왜곡날조하는 단체에 불과” 하다고 주장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법원의 최종판결에 따라 방ㅇ경씨는 5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한편 이 사건에 대한 형사소송은 현재 진행중이며 5월에 첫 공판이 열릴 예정이다. 방ㅇ경씨는 얼마전 가수 겸 작곡가인 윤상씨를 비난하는 트위터를 날렸다가 망신을 당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다. 방ㅇ경씨는 “문보궐정권은 반 대한민국 세력들과 한편 먹는데 남북실무접촉 남수석대표로 윤상씨라면 김일성찬양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간첩 윤이상, 5·18광주폭동 핵심으로

민주주의 다시 쓰는 ‘4월 항쟁’…침묵에서 행동으로

2018년 4월 21일 2081

제주4·3사건, 4·16촛불혁명, 4·19혁명 등 ‘잔인한 4월’의 흔적들…”아팠지만, 평화와 인권 되새기는 미래가치로” 4월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아픈 달로 기억된다. 제주 4·3 사건을 시작으로 4·16 세월호 참사, 4·19 혁명까지 한국 근현대사 중 수많은 희생과 이에 따른 정치·사회적 변화가 가장 큰 폭으로 이뤄진 역사적 사건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월호 참사를 통한 촛불혁명이 가져온 변혁은 6·10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와 본질을 다시 각인했다는 점에서 시민혁명의 분수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혁명이나 항쟁으로 기억될 법한 ‘희생의 4월’은 그 잔인한 아픔의 기억에도 그간 침묵과 무관심 속에 간과되기 일쑤였다. 올해 4월은 그러나 허투루 조명되지 않았다. 지엽적 사건으로 방치하거나 독립된 개별 사건으로 치부하지 않고 공동의 슬픔을 통해 ‘기억될’ 역사로 함께 ‘행동’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촛불혁명을 통해 국민의 공감대가 ‘이게 나라냐’라는 키워드로 모이면서 역사 재조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은다. 박찬식 제주 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위원장은 “지금까지 국가가 인권과 법치 등 최소한의 근대국가로서 갖춰야 할 장치를 방기하며 국민을 대했던 역사에서 촛불혁명이 주는 의미가 컸다”며 “이를 통해 과거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고 성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70주년을 맞은 제주 4·3 사건은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3만 명의 주민이 희생당한 아픈 역사로 기억된다. 2003년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돼 2014년 4·3 희생자 추념일까지 지정됐지만, 지난 10년 사이 보수정권의 통수권자가

장완익 위원장 “1기 특조위 실수 되풀이하지 않아야”

2018년 4월 20일 1467

‘과거사 전문 변호사’로 꼽히는 장완익 변호사(사진)가 ‘살균제 사건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2기 특조위를 어떻게 이끌지 들어보았다. 장완익 ‘살균제 사건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회적 참사 특조위·2기 특조위)’ 위원장은 ‘과거사 전문 변호사’로 통한다. 2004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2006년부터 4년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겸 사무처장을 역임했다. ‘제주 4·3희생자 유족회’ 법률지원단을 비롯해 일본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을 이끌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활동을 시작한 건 2014년 대한변호사협회 세월호 참사 특별위원회 소속으로 ‘4·16 참사 진실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특별법(가족안)’을 만드는 데 참여하면서부터다.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 특조위·1기 특조위)’에서 비상임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박근혜 정부의 방해로 특조위가 무력화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위원 임명부터 시행령 제정, 예산 배정까지 어느 하나 수월한 과정이 없었다. 당시 여당 몫으로 특조위에 들어온 위원들이 해양수산부의 지침에 따라 활동하고 있는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정부의 조직적인 방해가 있었다는 사실은 최근 검찰 수사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검찰은 3월29일 세월호 특조위 활동을 방해한 혐의로 이병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기소했다. 세 사람은 앞서 구속된 김영석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윤학배 전 차관에게 세월호 특조위 활동을 방해하라고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새로 출범한 사회적 참사 특조위는 세월호뿐만 아니라 가습기 살균제

베트남 학살 생존자 “왜 한국군은 사과하지 않나요”

2018년 4월 20일 1788

“50년이 지난 지금도 학살의 이유를 알지 못해” 21·22일 한국 정부 책임 묻는 ‘시민평화법정’ 열려 “남동생이 울컥울컥 피를 토해낼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베트남 퐁니·퐁넛 마을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씨(58)는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국군이 쏜 총에 남동생을 잃은 사연을 털어놨다. 응우옌티탄씨는 “왜 한국군은 여성과 어린아이뿐이었던 우리 가족에게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나요”라며 “어째서 한국군은 끔찍한 잘못을 저질러놓고 50년이 넘도록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나요”라고 호소했다. 그는 “죽은 남동생은 한국군이 쏜 총에 입이 다 날아갔다”고 말하면서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하미 마을 생존자인 동명이인 응우옌티탄씨(61)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한국군에 의해 각각 5명의 가족을 잃었다는 두 증언자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잔인한 학살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며 “한국 참전군인들의 사과를 받고 싶다. 최소한 사과가 있어야 용서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들은 21일부터 양일간 서울에서 열리는 시민평화법정에 참여한다. 시민평화법정은 베트남 학살 피해자가 원고가 되어 한국정부를 피고석에 앉히고 학살의 책임을 묻는 법정으로, 지난해 11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 한베평화재단 등 24개 시민단체가 주축이 돼 준비해왔다.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는 “베트남 중부 꽝남성에 위치한 퐁니·퐁넛 마을 및 하미 마을 학살 사건 모두 1968년에 일어나 올해 50주기를 맞은 사건”이라며 “50년이나 지연된 정의를 세우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퐁니·퐁넛 마을 출신 응우옌티탄은 “무섭고 떨리지만 이렇게 용기를

민족사랑 2018년 04월호

2018년 4월 18일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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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역사’ 시즌 2 – “파이팅은 일제 잔재인가”

2018년 4월 17일 1289

[바로듣기] ☞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2회 “파이팅은 일제 잔재인가” ☞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3회 임시정부와 3.1혁명 3편 – 임시정부는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나?” ☞ ‘내역사’ 시즌2: 비하인드히스토리 “경희대학교의 뿌리 신흥무관학교??” ☞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2회 임시정부와 3.1혁명 2편 – 3.1혁명의 이름없는 영웅들” ☞ ‘내역사’ 시즌2: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1회 식목일의 기원 ☞ ‘내역사’ 시즌2: 역전다방 1회 임시정부와 3.1혁명 1편 – “왜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인가”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보고서]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년 의의 및 기념사업 추진 방향 연구보고서

2018년 4월 17일 2460

[다운로드]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년 의의 및 기념사업 추진 방향 연구보고서

[여적] 광화문 해치의 제자리찾기

2018년 4월 12일 2987

“오백년 옛 대궐 경복궁 앞에 말없이 쭈그리고 앉아있는 해태(해치)를 보았으리라… 무슨 죄 있어 다리를 동이고 허리를 매어… 궁궐 한편 모퉁이에 결박 당하고 거적 쓴 채로 참혹하게 드러누웠더라.” 광화문 월대 앞에서 경복궁을 지키고 서있던 해치가 궁궐 한편에 쳐박혀있는 몰골을 전한 동아일보 1923년 10월 4일 기사다. 조선부업품공진회 개막에 발맞춰 개통된 전차와 관람객의 동선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광화문 앞의 해치가 철거·이전된 것이다. 거적때기에 쌓여 궁궐 안쪽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초라한 몰골은 식민지 조선의 딱한 처지를 웅변해주었다. 궁궐의 입출구를 구분짓는 월대 앞에 놓인 해치는 일종의 하마비 역할도 했다. 지금부터 궁궐권역이니 말에서 내리라는 표시였다. “1870년(고종 7년)대궐 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로 삼았고…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 말을 탈 수 없다”(<고종실록>)는 기사가 등장한다. 1924년 10월 조선총독부 정동 분실에서 일어난 불의 원인이 ‘해치상을 치워버린 탓’이라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이것이 찜찜했던지 일제는 쳐박아두었던 해치상을 조선총독부(중앙청) 뜰 앞에 옮겨놓았다. 지금 광화문 담장 밑에 바짝 붙은 채로 서있는 옹색한 해치상은 1968년 12월 광화문 복원 때 재이전한 것이다. 물론 제자리가 아니다. 광화문 해치는 흔히 ‘불(火)의 산인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고 궁문 앞에 세워놓은 흰돌의 물짐승’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규경(1788~?)이 “해치는 화수(火獸), 즉 불을 먹고 사는 짐승”(<오주연문장전산고>)이라 한데서 유래한 속설일 가능성이 크다. 해치는 또 예부터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수(神獸)로 알려져 왔다. 후한의 왕충(27~97?)은 “해치는 옥사를 다스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