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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누리꾼 성금이 만든 ‘제2 반민특위’ 친일인명사전, 긴 산고 끝 드디어 첫선
3만 누리꾼 성금이 만든 ‘제2 반민특위’ 친일인명사전, 긴 산고 끝 드디어 첫선(오마이뉴스, 09.11.06)
근대 국문학을 ‘재인식’한다-한국일보(07.04.02)
근대 국문학을 ‘재인식’한다아버지의 부재, 광인·질병 담론 등 다양화“근대성에 대한 반성과 천착은 시대적 요구” 근대 소설의 개척자 김동인의 발언은 자못 시사적이다. “계급 문학이란 게 있다면, ‘계급 비평’도 ‘계급 음료수’도 있지 않겠느냐.” 김윤식ㆍ김현의 명저 <한국 문학사>는 그를 두고 “치기 어린 절규”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역사의 격랑과 맞부딪치며 변동의 골을 건너고 있는 21세기 문학은 근대 연구에 눈길을 주며, 영감의 근원을 찾고 있다.<염상섭 문학의 재인식>을 출발점으로 채만식ㆍ한설야ㆍ이태준 등 주요 작가와 친일 문학 문제 등 쟁점들을 조명, 현대 한국 문학의 뿌리를 찾아 간다. 문학과사상연구회가 1998년 시작해 현재 22권의 장서를 축적한 <연세근대한국학총서>(소명출판사) 시리즈가 그것이다. 근대 문학의 주요 작가들을 섭렵하는 ‘재인식’ 시리즈로 최근에는 차원현 경주대 한국어문어학과 교수가 <한국근대소설의 이념과 윤리>를 펴냈다. 연구회측은 “사회주의 몰락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등 당대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근대 계몽기 문학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며 “근대성 자체에 대한 반성과 천착은 시대적 요구”라고 말했다.최근 지령 32호를 기록한 민족문학사학회의 <민족 문학사 연구>도 기점을 근대 계몽기로 잡고, 국문학 재발견을 요청하고 있다. <신소설에 나타난 군인의 형상화 고찰> <1930년대 후반 한국 소설에 나타난 허무주의 연구> 등 근대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묻는 논문들을 비롯해 연극과의 관련에 대해서도 탐구, 현재적 의미를 묻고 있다. 인하대 국문과 김명인 교수는 한국 문학 100년사를 ‘가족’이라는 주제로 관통, 근대부터 나타난 ‘아버지 아들’이란 테마의 변동상에 주목했다.그는 식민지 고아 의식에 주목,
부산 노동자 항일의식 고취 운동 매진-부산일보(07.03.27)
부산 노동자 항일의식 고취 운동 매진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다리절며 불우한 삶 살아 26일 별세 애국지사 이광우 선생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10개월이나 당했던 애국지사 이광우 선생이 26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부산에서 태어난 이씨는 17세 때인 1942년 5월 경남토목건축협회에 근무하던 중 부산진 공립보통학교 6학년 동창생인 여경수씨 등 5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친우회를 조직했다. 일제가 중일전쟁,태평양전쟁 등을 도발하면서 강제 공출,징용 등으로 한국인을 극악하게 탄압하고 있던 때였다.친우회 총책을 맡은 이씨는 일본군 군수품 제조공장인 부산 범일동 소재 조선방직주식회사(일명 조방)를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일제 군사요지 시설 파괴와 군자금 모집도 계획했다.친우회는 조방 근로자들을 선동하기 위해 “일본은 망한다. 조선독립만세””우리가 일제에 핍박받고 있을 수 있느냐”는 내용의 항일 전단 200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방직 기숙사와 부산진시장 노점,부관연락선 부두 등지에 뿌리며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그러던 중 이듬해인 1943년 3월 그를 비롯한 친우회 동지들이 친일 경찰에 체포됐고 고춧가루고문,전기고문 등 가혹한 고문을 당하다 검찰에 회부됐다. 이 과정에서 여씨는 순국했다.이씨는 1945년 2월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광복이 되면서 출옥했다. 이씨는 당대 최고의 고문기술자였던 경남경찰부 고등과 외사주임 하판락에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게 됐다. 석방 후 불편한 몸으로 건설업을 하다 1970년대 몰아닥친 ‘오일파동’을 견디지 못해 사업을 접었고 고문 후유증까지 도져 이씨는 50대
위안부 결의안, 일본은 11곳 한국은 2곳뿐
위안부 결의안, 일본은 11곳 한국은 2곳뿐(오마이뉴스, 09.11.05)
“고백·성찰 위한 기록, 소모적 쟁점화 말아야”
“고백·성찰 위한 기록, 소모적 쟁점화 말아야”(경향신문, 09.11.05)
[단독]서울대 미대 ‘괘씸죄’ 대학원생 졸업자격 박탈 물의-쿠키뉴스(07.03.29)
[단독]서울대 미대 ‘괘씸죄’ 대학원생 졸업자격 박탈 물의 [쿠키 사회]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 학칙에 어긋나는 내부규정을 근거로 대학원생의 석사학위 취득 자격을 박탈해 물의를 빚고 있다.미대측은 규정이 가혹하고 학칙을 훼손할 수 있다는 서울대 본부의 지적에 따라 지난해 9월 규정을 수정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피해 학생은 이미 제 때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된 뒤였다.2004학년도 2학기 서울대 미술대학원 서양화과에 입학한 금모(33)씨는 2006학년도 2학기 졸업 대상자 중 유일하게 석사학위 취득 자격을 얻지 못한 것으로 26일 확인됐다. 미대가 2005년 1월 전국 최초로 만든 ‘졸업 내규’에 걸렸기 때문이다.신설된 ‘졸업 내규’는 ‘실기 전공의 경우 매학기 말 작품평가회를 갖고 통산 2회 이상 통과하지 못하면 학위취득 자격이 정지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은 자격정지 기한이 없고 자격정지 처분을 해소할 방법이 봉쇄돼 있어 학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금씨는 2005년 1·2학기에 열린 작품평가 및 재심에서 유일하게 모두 떨어진 것이다.하지만 미대 학부 2000학번인 금씨는 김민수(46·디자인학부) 교수의 복직운동에 앞장섰던 이력 때문에 불이익을 당했다고 주장했다.금씨는 “일부 교수들이 작품평가 기준과 평가점수를 알려달라는 요구에 ‘교수들이 김 교수 문제로 너를 찍었다’, ‘논문자격 시험을 보나마나 떨어질 게 분명하다’고 수 차례 말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서울대 미대 초창기 원로 교수들의 친일행적을 거론했다는 이유 등으로 1998년 해직된 뒤 2005년 3월 복직했다.미대 관계자는 “규정이 허술했던 점은 있지만 특정 학생을 표적으로 삼은 건 아니다”면서도 “금씨가
‘우리학교’엔 ‘우리’가 있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민연수 간사 홋카이도 조선학교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아낸 다큐 ‘우리학교’가 전국 개봉관에서 절찬 상영중이다. 540여개에 이르던 조선학교가 80여개로 격감할만큼 일본 우익들의 탄압은 끈질기고 가혹했다. 다큐 ‘우리학교’는 그처럼 척박한 환경의 일본땅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조선학교 구성원들의 꿈과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여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문해보는 이들이 있다. 과거암울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운명의 선택을 강요당했던 그들, 해방 후 귀환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삶의 터전을 꾸려야 했던 우리 동포들과 그들의 후손들. 그 중에서도 이른바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 영화는 학교라는 공동체를 통해 재일조선인의 오늘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감독은 관찰자가 아닌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 그들의 삶 속으로 조용 히 걸어 들어간다. 학교를 구성하는 학생 교사 학부모의 일상 속에 드러나는,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는이들의 어려움과 갈등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의 자각과 긍지를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일본열도에서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는 홋카이도. 4월까지 눈을 치워야할 정도로 긴 겨울과 혹독한 추위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 민족에겐 일제하 징병과 징용 등 강제동원의 아픈 역사로 또 달리 기억되는유형의 땅이다. 관련기사 <우리학교>는 공교육에 관한 영화다(오마이뉴스, 07.04.21)[영화 가로지르기]‘우리학교’(경향신문, 07.04.19) 광대한 그 지역에, 하나밖에 없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조선학교’가 있다. ‘조선학교’는 흔히 ‘민족학교’라 불리기도 하는데, 해방 후 재일조선인 1세들이 일본 땅에서 살아갈
“친일재산 판 후손, 돈으로 반환” 판결
“친일재산 판 후손, 돈으로 반환” 판결(한국일보, 09.11.06)
친일파 후손들 ‘끈질긴 재산찾기’… 100% 패소에도 소송 해마다 증가
친일파 후손들 ‘끈질긴 재산찾기’… 100% 패소에도 소송 해마다 증가(국민일보, 09.11.05)
“위안부 관련 증거 자료 일본이 조직적으로 없앴을 것”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의 유일한 일본인 회원인 야시로 카츠미(일본 기후현)씨가 최근 아베 총리의 위안부 관련 망언에 대해 일본인들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아래와 같은 글을 보내왔다.<편집자 주> 안녕하세요. 아사히신문 2007년 3월 15일자 [독자의 소리]란에 아베 총리대신과는 정반대에 있는 일반시민의 의견이 실렸습니다. 이것을 읽고 한국인 여러분의 견해를 들려주세요. -야시로 카츠미- ‘위안부’ 증거 없는 것이 당연 오무라 게사요시(야마나시현 야마나시시, 79세) 종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아베 수상신의 발언이 내외에 파문을 넓히고 있다. 좁은 의미의 강제성을 문제 삼아 증거와 증인이 나오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지만 패전 당시의 옛 일본군의 엄격한 증거은멸공작에 종사했던 나로서는 증거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16세에 해군 소년병을 지원해 18세 여름에 항공대 고등과 연습생으로 패전을 맞았다. 실전부대가아니었던 우리 학교에서도 비밀성이 높은 ‘군기(軍機)’ ‘군극비(軍極秘)’는 물론, 비밀성이 낮은 ‘비(秘)’의 수신(도덕-번역자) 교과서조차 전부 회수하여 연병장 귀퉁이에 파놓은 웅덩이에 쌓아놓고 3일 밤낮으로 계속 태웠다. 이러한 증거인멸의 지시나 함구령은 옛 일본군의 모든 부문에서 내려졌을 터이다. 따라서 전쟁터에서 성과 인권에 관련된 위안부 문제의 증거와 증인이 나오지 않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제에서는 일본정부를 제소하거나 미국 의회에서 발언된 피해자의 증언을 중요시해야 하고 아베수상의 자세에 대해서 피해자는 물론 각국으로부터도 이해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우호외교에 물을 끼얹고 현안인 납치문제에도 악영향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