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top-introduce[1]](/wp-content/uploads/2016/02/img-top-news1.png)
주요기사
[특집]고인 영향력 클수록 반발도 거세다
[특집]고인 영향력 클수록 반발도 거세다(위클리경향, 09.11.24)
[특집]18년 걸린 사전 발간 대장정
[특집]18년 걸린 사전 발간 대장정(위클리경향, 09.11.24)
게르니카 폭력사건의 진실과 거짓
리오넬 리샤르 프랑스 피카르디대 명예교수 이 글들은 국제문제전문 월간지인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최신호에 실린 게르니카 학살 문제를 다룬 것으로 전재를 허락해 준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지사 측에 감사드린다.<편집자 주> 1937년 4월 26일 월요일, 16시 15분에서 19시 30분 사이, 내전이 한창 중인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의 상징성을 대표하는 도시인 게르니카는 폭탄세례 속에 박살이 났다. 도시 자체는 물론 주민들까지도 파괴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역사상 초유의 일로 기록된다. 5백 개의 건물 중 4백 개가 불타올랐고, 6천 명의 주민 중 1천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 지르 게르니카, 2006 스페인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게르니카 학살에 영감을 받아 희생자들에게 헌정한 자신의 작품을 1937년의 파리 만국 무역박람회에서 세상에 선보이지 않았다면, 이 학살이 ‘인류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마도 몇몇 역사학자들의 저서에만 기록된 채, 그 기억들은 희미해졌을 것이다. 왜 프랑코 일파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지역의 빌바오시(市)에서 35km나 떨어진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를 파괴하려 했을까? 그 이유는 게르니카가 바스크 지역에 위치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바스크 지역은 1936년 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둔 이후 마침내 정치적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새 정부 수립 직후인 7월 17-18일에 프랑코 장군이 주도하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정부의 합법성을 지지했던 바스크 주민들은 프랑코 군의 진군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들의
58년이나 걸린 친일재산 국가귀속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대통령 직속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반민족 행위자 9명의 소유 토지와 임야 25만4천906㎡(7만7천여평)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공시지가로는 36억원, 시가로는 63억원 상당에 불과한 `조그만’ 땅이지만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가 와해한 지 58년만에 얻은 친일 청산의 첫 가시적인 성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반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부분적인 단죄가 이뤄지게 됐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을 들춰내 누구를 욕하자는 게 아니냐는 일부 반론도 있으나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고 사회정의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비록 늦었지만 친일재산 국가귀속은 당연하고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스라엘이 독일 나치 정권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 혐의가 있는 전범들을 지구상 끝까지 찾아가 국제법정에 세우는 것도 아직 정의가 살아 있고 다시는 그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후세대에 경고하기 위함이다. 친일파 재산 조사활동도 그 정신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을사조약과 한일병탄(합병)조약 등에 관여했거나 그 공으로 작위를 받은 자, 일제의 귀족의원이나 중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여자 등의 친일파 가운데 대다수가 반민족 행위를 통해 축적한 부를 후손들에게 물려줬음에도 그동안 아무런 민ㆍ형사상 처벌을 받지 않았다. 되레 일부 친일파 후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소유권을 확보한 뒤 제3자에게 매각하기조차 했다. 일제 강점기에 주요 친일파 인사가 보유했던 땅이 당시 경성(京城ㆍ서울의 옛 지명) 면적의 13배 가량인 1억3천만평에 달했다는 박사학위 논문도 있다. 이는 현재 광주광역시 면적에 조금 못미치고 한반도 전체 면적의 0.2%에
[특집]역사적 평가인가 사회적 낙인인가
[특집]역사적 평가인가 사회적 낙인인가(위클리경향, 09.11.24)
[요즘 이 책]이 책은‘고발’이 아닌 ‘교훈’이다
[요즘 이 책]이 책은‘고발’이 아닌 ‘교훈’이다(위클리경향, 09.11.24)
[논평] 친일재산의 국가 귀속 결정을 환영한다
민족문제연구소 1949년 반민특위가 와해된 후 58년 만인 2007년 5월 2일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국가로 귀속시키는 첫 성과가 이루어졌다. 2005년 12월 국회에서 제정통과된 특별법에 의거하여 2006년 7월 발족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약 9개월 동안 친일반민족행위자 93명에 대해 조사개시결정을 내리고 파악한 친일재산을 임의로 처분할 수 없도록 법원에 보전처분을 마쳤다. 이 중 이완용송병준 등 9명의 재산에 대해 오늘 국가귀속결정을 의결했음을 발표하였다. 해방공간과 건국초기 우선적으로 처리했어야 할 매국수작자 등의 부도덕한 재산에 대해 60여 년 만에 조사가 이루어지고, 이를 국가에 귀속시켜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예우를 위한 지원금 또는 독립운동 관련 기념사업 등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늦었지만 국가와 민족의 정통성 회복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 불의한 행위는 언젠가 제대로 기록되고 평가받고 징치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재산조사위원회를 출범하게 한 원동력이다. 이번 친일재산 환수를 계기로 거꾸로 된 역사관과 가치관이 바로 잡히고, 정의는 반드시 실현된다는 사회적 신뢰가 더욱 굳건해지리라 믿는다. 1차 발표이긴 하지만, 우선조사대상으로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452명이며, 이 중 이번에 국가귀속결정이 확정된 것은 9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제 시작일 뿐이다. 조사과정에서 공적기록의 소실, 친일파 후손들의 시대착오적인 반발, 비호세력의 저항 등,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재산조사위원회는 국민 다수의 압도적인 지지와 기대 아래 출범한 만큼 어떤 정치적 외압이나 현실적인 제약도 극복하고 본래의 임무를 다하여야 하리라 본다. 조사규모에 비해 짧은 활동기간이지만
중국 요녕성에 흐르는 선열의 혼이여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비내리는 밤 여순감옥에서 안중근 선생을 만나다 “드드드드” 드디어 비행기가 떴다. 시간을 보니 4월 12일 목요일 오후 6시. 낮 12시발 비행기가 기상 사정으로 6시간이나 지체되어 이제야 인천공항을 이륙한 것이다. 서울과 지방 곳곳에서 새벽잠마저 설치고 아침 9시에 공항에 모였다가 하루를 꼬박 공항 대합실에서 보내다시피 한 일행들의 모습은 피곤해 보였다. 첫날부터 일정이 차질이 생기는 것을 염려하는 표정이 감돌았다. 일행은 장두석 선생님을 비롯하여 한민족생활학교와 민주연합노조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 등 모두 33인. 3박 4일간의 중국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이번 답사 목적은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에 대한 현지 추모제, 분단의 아픔을새삼 되새기며 평화통일의 의지를 다짐하는 압록강 조중 국경지대 방문, 만주 특히 요녕성 일대의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돌아보고자 함이다. 3박 4일의 일정으로 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이 짧은 여정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역사의식을 일깨워주기를 속으로 가만히 빌었다.대련공항에 내리자마자 준비된 버스를 타고 바로 여순감옥으로 향했다. 다행히 대련안중근연구회 박룡근 회장의 노력으로 빗속 밤중에 여순감옥을 방문할 수 있었다. 비는 내리고 밤은 어둡다. 감옥이란 낮에 보아도 을씨년스러운 법. 원혼이 감도는 듯한 밤비 속의 여순감옥. 빗속에 전등을 켜고 안중근의사 기념전시실과 수감되었던 곳을 둘러보았다. 전시실에는 안의사의 일생과 당시의 국제상황 그리고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수감, 사형당하는 과정과 안중근 의사에 대한 추모와 찬양의 사연들이 사면 벽마다 빼곡이 패널로 전시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