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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폭력사건의 진실과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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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넬 리샤르 프랑스 피카르디대 명예교수










이 글들은 국제문제전문 월간지인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최신호에 실린 게르니카 학살 문제를 다룬 것으로 전재를 허락해 준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지사 측에 감사드린다.<편집자 주>


 

1937년 4월 26일 월요일, 16시 15분에서 19시 30분 사이, 내전이 한창 중인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의 상징성을 대표하는 도시인 게르니카는 폭탄세례 속에 박살이 났다. 도시 자체는 물론 주민들까지도 파괴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역사상 초유의 일로 기록된다. 5백 개의 건물 중 4백 개가 불타올랐고, 6천 명의 주민 중 1천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지르 게르니카, 2006

 

스페인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게르니카 학살에 영감을 받아  희생자들에게 헌정한 자신의 작품을 1937년의  파리 만국 무역박람회에서 세상에 선보이지  않았다면, 이 학살이 ‘인류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마도 몇몇 역사학자들의 저서에만  기록된 채,  그 기억들은 희미해졌을 것이다.

왜 프랑코  일파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지역의  빌바오시(市)에서 35km나  떨어진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를 파괴하려 했을까?  그 이유는 게르니카가 바스크 지역에  위치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바스크  지역은  1936년 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둔 이후  마침내 정치적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새  정부 수립  직후인 7월
17-18일에 프랑코 장군이  주도하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정부의 합법성을 지지했던 바스크 주민들은 프랑코 군의  진군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들의  총구를 피하지 않았다.

1937년 4월,  스페인 북부에서는  카탈로니아 지역과 아라곤 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바스크 지방 정부만이 옛 공화국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었다.  바스크 지방정부는 철광산, 제철소, 조선소가 풍부한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이런 자원이야말로 쿠데타 세력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었다. 쿠데타 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인 에밀리오 몰라 장군은 자신이 3주 안에 바스크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프랑코 장군에게 보고했다. 당시 5만 명의 보병과 100여 대의 전투기가 그의 지휘 하에 있었다. 그는 추가로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병한 이탈리아 군대와 독일이 보낸 기갑부대와 전투기, 그리고 폭격기대대로 편성된 6,500여 명 규모의 콘도르 부대를 지원받았다.

출동 준비를  마친 몰라 장군은  바스크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는 ‘북부 지역에서 내전을 신속히 종결하기로’ 결정했음을 통보하는  동시에 “만약  즉각 항복하지 않으면 군수공장을 시작으로 모든 비스카이예 지방(빌바오 인구 30%가 거주하는 지역)을 공격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바스크 지방정부의 응답이 없자, 그는 3월 31일 위협을 마침내 실천에 옮겼다. 사령관인  볼프람 폰  리히토펜 중령의 지휘 아래 콘도르 부대의 융커와 하인켈 중폭격기들이 빌바오시 주변 마을들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였다.  4월 26일 월요일 아침,  게르니카와 두랑고를 소이탄으로 공격하도록 조종사에게 임무가 하달됐고, 이틀 후 두 지역은 별 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포위됐다, 5월 한 달 내내 혹독한 공격이 계속됐고, 결국 1937년 6월 19일 빌바오 시가 함락됐다. 바스크 관리들은 짐을 꾸려 피레네 산맥의 북부 지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게르니카 이야기로 돌아오자. 4월 27일 화요일, 프랑코파의  임시 수도인 살라망크의 쿠데타군 지휘부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반(反) 공화파를  지지하는 모든  외국 신문들에 게재된 프랑코군의 홍보용 성명서는 자신들의 행위를 둘러싼 비난에 대해 ‘중상모략’이라고 부인했다.  프랑코의 쿠데타 세력은  폭격의 주범이  바로 공화파를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무력단체인 ‘붉은 군대’라고 선언했다. 즉 궁지에 몰린 공화파들이  마을에 방화했다는 것이다.


볼셰비키적 중상모략











 

 

 

제롬 플롱 코펜하겐, 2002

 

바스크 지방 정부의  호세 안토니오 아귀레  대통령은  이 같은  주장을  듣고  분노하였다.
폭격은 ‘스페인 반란군을 지원하는  독일 비행기들’에 의해 자행됐다고 그는 단언했다. 프랑코 세력이 장악한 국영 라디오방송은 아귀레를  거짓말쟁이로 취급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또한 아귀레가  히틀러 군대를  비난한 내용은  뉴스 진행자에 의해 삭제됐다.  청취자들은  오직
반란군을  옹호하는 뉴스진행자의  목소리만을  다음과 같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코  군대는 방화하지  않았으며, 정당한 절차를 통해 그들을  정복했습니다.  문제의 마을은 스페인이 자신들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붉은 군대’가 파괴를 한 것입니다.”

프랑스 공산당계열의 언론들, 넓은 의미로 좌파 언론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비열하고 가증스런 폭격’의 책임이 콘도르 부대에 있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또한 콘도르 부대가 폭격을 했다는 증거도 점점 쌓여만 갔다. 그렇지만 그 증거들도 뻔뻔한  거짓말쟁이들의 주장에 의해 왜곡되었다. 1937년 5월 11일, <락시옹 프랑세즈>지에 프랑스 극우파의  지도자인 샤를 모라스는 “독일 항공기들이 수많은 폭탄을 퍼부었다는 주장은 공산당 군대의 범죄 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볼셰비키식의 조작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왜곡은  프랑코가 사망한 1975년까지도  스페인에서 어느 정도 지속됐다.  스페인의 사료편찬자들은 프랑코 세력의 결백을 밝히고, 또 유럽 내에서 자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복원하기 위하여 또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즉 모든 잘못을 히틀러와 괴링(Göring) 그리고 콘도르 부대 지휘관들에게 떠넘긴 것이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이후, 프랑코 세력들은 20년 동안 쉽게 잘못을 회피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프랑코 사망 이후에도  반민주적인 스페인 우파의 아첨꾼들은 불법 쿠데타를 문제 삼지도 않았고, 프랑코 지지 세력과 파시스트 국가들 간의 비열한 동맹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사실을 날조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희생자의 수가 1백여 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폭격의 범위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왜곡의 이중주


그들에 따르면, 프랑코의 지휘본부는 콘도르 부대가 계획한 공격을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독일 조종사들은 ‘테러’에 어떤 사전 계획도  없었다. 그들은  도시 변두리에 있는 군수공장과 하천교량을 목표로 하였으나 폭격이 목표물에서 빗나간 것이다. 화재와 시체더미는 ‘실수’로 발생한 것이고, ‘순교한 도시’인 게르니카에 대한 모든 얘기들은 단지 ‘신화’에 대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일 측은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일까?  독일 국민들은  1939년 4월, 프랑코 장군의 승리 이후 오직 콘도르 부대의
‘쾌거’만을 알고 있었다.  많은 책들이 그 성과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성공을 거둔 책 중 하나는 이미 1차 대전 참전 군인들을 칭송한 전력이 있던 베르너 보이멜부르크가  쓴『스페인을 위한 전투』였다. 그는 1940년 자신의 책에서  프랑코 군에 대한  히틀러의 지원을 평가하면서,  스페인 내전의 모든 사건들을 10개 장으로 나누어 기술했다.


밝혀진 진실







 

 

하지만 그의 책 어디에서도 콘도르 부대의 학살을 정확히 다루지 않았다. 심지어 보이멜부르크는 나치  독일의 공식 대변인,  즉 푈키셔 베오바히터의 주장을  충실히 따르며,  “게르니카는 붉은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  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몇 해  전부터 떠돌던 소문과는  달리 독일공군 사령관 헤르만 괴링 원수는 뉘른베르크 판사들 앞에서  이 비극에 대한 히틀러군의  책임을  자백하지 않았다.  스페인을 독일  공군의 훈련장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자신이 허가했음을 단순히 인정했다. 또한 나치 정부의 선전장관인 요세프 괴벨스는  그의 일기에서  이 사건에 대해 독일 부대의 개입을 부인했다. 그는 스페인 프랑코주의자들의  무죄 주장에 농락당한 듯,  독일 부대가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믿는 듯했으며, 부대의 개입을 부인하느라 난처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의문은 1945년 이후 해소됐다. 나중에서야 그러니까  1978년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음을 깨달은, 당시 아르헨티나에 망명해있던 조종사 빌프레드 폰 오본과 같은 전역군인들의 증언들이 나왔고, 독일 문서기록이 공개됐다. 그 기록 속에는 프랑코군 수뇌부가 콘도르 부대의 공격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날조하기 위해 나치 당국과 프랑코 세력이 긴밀히 협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다. 빌바오시의 함락 전날인  1937년 6월 20일, 프랑코 장군은 히틀러와 ‘위대한 독일 국민’이 보여준 ‘믿음’에 감사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직접 전보를 보냈다.


피카소와 게르니카


어떠한 군사적 목적도 게르니카 폭격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게르니카 폭격을 비난하는 것이다.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은 당시에 전 유럽을 위협했던 야만적 행위의 본질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극단적 폭력이며, 상대방에 대한 무제한의 물리적 파괴이며, 사실의 왜곡이다.
망각에  맞서 싸우기 위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게르니카에서 활동하고 있고, 2003년에는 ‘평화 박물관’이 개관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파블로 피카소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해야 한다. 피카소 덕분에 ‘파시즘’이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Vol.008(07년 5월호) 기사임. 필자:리오넬 리샤르(Lionel Richard) 번역:정병주-

필자소개:프랑스 피카르디 대학의 명예교수이며, 주요 저서로 『예술과 전쟁』(파리, 플뤼리엘/아쉐트 출판사)과 『나치즘과 야만』(브뤼셀, 콩플렉스 출판사)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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