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리는 밤 여순감옥에서 안중근 선생을 만나다
“드드드드”
드디어 비행기가 떴다. 시간을 보니 4월 12일 목요일 오후 6시. 낮 12시발 비행기가 기상 사정으로 6시간이나 지체되어 이제야 인천공항을 이륙한 것이다. 서울과 지방 곳곳에서 새벽잠마저 설치고 아침 9시에 공항에 모였다가 하루를 꼬박 공항 대합실에서 보내다시피 한 일행들의 모습은 피곤해 보였다. 첫날부터 일정이 차질이 생기는 것을 염려하는 표정이 감돌았다. 일행은 장두석 선생님을 비롯하여 한민족생활학교와 민주연합노조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 등 모두 33인. 3박 4일간의 중국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답사 목적은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에 대한 현지 추모제, 분단의 아픔을새삼 되새기며 평화통일의 의지를 다짐하는 압록강 조 중 국경지대 방문, 만주 특히 요녕성 일대의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돌아보고자 함이다. 3박 4일의 일정으로 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이 짧은 여정이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역사의식을 일깨워주기를 속으로 가만히 빌었다.
대련공항에 내리자마자 준비된 버스를 타고 바로 여순감옥으로 향했다. 다행히 대련안중근연구회 박룡근 회장의 노력으로 빗속 밤중에 여순감옥을 방문할 수 있었다. 비는 내리고 밤은 어둡다. 감옥이란 낮에 보아도 을씨년스러운 법. 원혼이 감도는 듯한 밤비 속의 여순감옥. 빗속에 전등을 켜고 안중근의사 기념전시실과 수감되었던 곳을 둘러보았다. 전시실에는 안의사의 일생과 당시의 국제상황 그리고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수감, 사형당하는 과정과 안중근 의사에 대한 추모와 찬양의 사연들이 사면 벽마다 빼곡이 패널로 전시되어 있었다. “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國家安危 勞心焦思(나라의 안위에 대해 노심초사하다)” 등 안의사가 옥중에서 쓴 글귀들이 한 줄로 걸려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전시실 가운데에는 안의사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전시실 옆방에는 안중근 의사의 흉상이 있고 천정 벽 위로 교수용(絞首用) 밧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아, 이곳이 바로 안의사가 순국하신 곳이었다. 순국일은 1910년 3월 26일. 순국일을 전후해 한국에서 온 사람들의 추모 화환이 안의사 흉상 앞에 놓여 있었다. ‘한국 초당파 국회의원 방중단’ 명의로 헌정된 화환이 눈에 띄었다. “초당파라····?” 오호라 당리당략을 초월해서 다 같이 안의사를 추모하기 위해 왔다는 뜻이렷다. 얼마나 당리당략에 치우쳤기에 이런 식으로 구차한 단체명을 만들어 헌화를 했을까?
안의사가 수감되었던 현장까지 둘러보고 우리는 여순고등법원으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안의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안의사는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으므로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거해 재판을 받기를 요구했다가 끝내 묵살되고 일제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은 곳이다. 그리고 이역의 하늘 아래 순국하였다. 안의사의 유해가 묻힌 곳은 아직도 우리는 찾지 못하고 있다. 못난 후손들이다. 고등법원 재판정 안에서 안의사의 일생을 기리는 동영상을 본 후 산란한 마음을 추스르며 대련 여경호텔에 짐을 풀었다.
밤은 깊어 이미 11시가 가까워졌다. 여느 관광객 같으면 술을 마시며 이국의 정취를 만끽하거나 깊이 잠이 들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우리의 활동은 오히려 시작되었다. 안중근 의사와 신채호 선생 그 외 해외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제사를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선열의 고귀한 뜻을 되새기고 오늘 그 정신을 이어받고자 함이 아닌가. 제사란 본디 기일을 지나서 올리는 법은 아니지만 호텔의 홀을 빌어 향과 초 그리고 제수와 헌주로 상을 차렸다. 못난 후손은 언제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뒤늦게 용서를 비는 법인가.
<제사사진>제사 지내는 시각을 보니 밤 11시-우리 시간으로 12시이다. 장두석 선생께서 제주가 되고, 이선재 한민족생활학교 서울관장이 집사가 되어 민족 고유의 제사를 올렸다. 한민족생활학교와 민주연합노조의 간부 그리고 현지의 조선족 동포인 박룡근 선생과 요녕신문 대련지국장이 우리식 제사옷으로 갈아입고 전통 제례를 올렸다. 안중근·신채호 두 분께 이렇게 이국의 호텔에서 제사를 올리는 우리의 심회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조국 독립의 큰 뜻을 품고 순국하신 두 분 선열 흠향하시고 우리의 앞길을 보살펴주소서. 난생 처음 보는 장면에 어리둥절한 호텔 복무원의 표정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절을 올리고 또 올렸다. 절이 끝나고 음복이 이어지면서 그렇게 대련의 첫 밤은 지나갔다.
끊어진 압록강 철교, 단장은 에이는데
13일 오전 8시 쯤 버스를 타고 단동으로 향했다. 단동의 옛 이름은 안동. 신의주와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있는 국경도시이다. 배를 타고 압록강 다리를 돌면서 북한지역을 바라보았다. 뱃살에 튕겨 오른 강물이 문득 눈앞에 이슬처럼 스친다. 분단의 아픔이 저 넘실대는 강물만큼이나 가슴속에 슬픔으로 차오른다. 맞은편 강기슭의 또 하나의 조국이여. 통일의 바람이 물결이 되어 북녘 강기슭에 닿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철교사진>배에서 내린 후 다음 행선지는 압록강단교(압록강 철교)로 향했다. 선착장에서 잠간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였다. 압록강 철교는 1909년 8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건설해 이듬해 10월에 준공한 1킬로미터 조금 모자라는 철교이다. 이 다리를 거쳐 수많은 조선인들이 망국의 비애를 안고 유랑의 길을 떠났다. 망국의 한이 서린 철교이다. 독립운동가 또한 국경수비대와 일본 군경의 눈을 피해 가슴 졸이며 국경기차에 몸을 실고 건넌 철길이다, 심산 김창숙선생이 국내에서 군자금을 마련해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설치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농부 목장으로 변복해 먹장구름 깔린 조선반도로 걸어서 건너간 곳 아니던가!
철길은 중간에 끊어져 있었다. 6·25전쟁 때 미 공군의 폭격으로 끊긴 것이다. 끊어진 현장에는 당시 투하된 포탄의 모형이 세워져 있고 그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화염에 일그러진 듯한 철교의 흉측한 잔해 속에 역사의 비극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끊어진 다리만큼 분단의 상처가 에이는 듯하다. 끊어진 철길 끝에서 하염없이 북녘땅을 바라보았다. 우리 땅에서 중국을 보는 것이 아니라 중국 땅에서우리 땅을 바라보아야 하는 역설의 현장이여. 두루마기 한복을 걸치신 장두석 선생은 이미 취하셨다. 일행들과 함께 끊어진 다리 앞까지 가서 절규한다.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꼴불견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전세계 어디에서 이렇게 비통하게 강물 앞에서 절규하는 모습이 있을까. 물결만이 요동치며 대답하는 단동 국경의 강이여, 민족의 눈물강이여!
다시 일행은 단동 동쪽의 호산경구(虎山景區:호산풍치지구)의 일보과(一步跨)와 호자산성(虎子山城)을보기 위해 바쁘게 버스를 재촉했다. 일보과는 호자산성 입구 뒤에 있는 압록강 물줄기이다. 일보과(一步跨), 단 한 걸음만 내디디면 압록강을 건널 수 있다는 바로 그곳이다. 이 한걸음은 바로 북한지역으로넘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분단 55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이 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그 맞은편에 망연히서 있는 것이다. 일보과 좁은 수로에서 오리들만이 무심하게 물 위를 떠다닌다.
<산성사진>호자산성은 중국측에서는 만리장성의 동북지역 기점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 학계는 이성을 고구려 박작산성이라고 보고 있다. 산성은 새로 보수되어 있었다. 성벽은 산줄기를 따라 용처럼 꿈틀대며 정상으로 이어져 있다. 우리가 올라가야 할 곳이다. 일행 대부분이 50대 후반 이후이라 쉽지는 않은 듯했다. 그러나 기나긴 성벽 길을 따라 마침내 정상의 장대에 이르렀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바람은 얼굴을 때린다. 한편으로 압록강이 굽이굽이 흘러가며 장성을 에워 두르고 다른 한편으로 대륙 평원과 북한땅이 압록강을 운명처럼 마주 대하고 있다. 바람은 거세어 눈을 뜨기가 쉽지 않다. 사진을 몇 장 찍어두면서도 사진보다는 가슴에 풍경을 담아두고 싶었다.
답사를 마친 일행은 단동의 북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중국 어디서나 북한식당은 이채로운 곳이다.식당은 북한 국영이며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모두 북한에서 건너왔다. 이들은 단순한 식당의 종업원이 아니다. 중국어 등 외국어에 능통하고 기예와 가무에 뛰어난 예인들이기도 한다. 식사 중간에 이들은 한국 노래, 북한 노래, 중국 노래를 부르고 춤과 연주를 섞어 공연을 한다. 북한식당이 중국식당보다 값이 비싼 것도 이 공연 때문이다. 북한식당을 제일 많이 찾는 손님은 한국관광객들이다. 이곳도 한국 관광객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다른 날보다 중국인들도 많이 와 있었다. 식사보다는 이색적인 구경이 목적인 듯하다. 흥겨운 가락과 춤과 애교와 술과 음식이 어우러진 가운데 우리는 슬픔인지 기쁨인지 야릇한 기분으로 그렇게 하루해가 저물었다.
보트를 타고 구경하는 기이한 동굴, 본계수동
4월 14일 이제 심양으로 떠난다. 옛 봉천(奉天)이다. 심양으로 가는 도중에 본계(本溪)에 들러 동양 최대의 석회암 동굴이라는 본계수동(本溪水洞)을 관람하였다. 걸어서 동굴을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동굴을 탐사한다는 점이 이채로웠다. 중국 당국이 동굴 속의 여러 경관들이 일반 관광객의 손에 의해 훼손될 것을 우려해 동굴 바닥 전체를 인공으로 물을 채웠다고 한다. 이게 자연보호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여하간 일행은 12인승 보트를 타고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기이한 형태의 종유석과 자연이 빚은 만물상들이 빨강·초록 조명 속에 자태를 드러냈다. 삼선동, 옥녀봉, 태상노군 등 중국 역사와 문화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석상이 되어 나오는가 하면, 원앙검 등 그럴싸한 이름을 붙인 천연바위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동굴 탐방에 약간의 긴장과 스릴은 있어야 하던 법인가, 우리 배가 약간의 사고를 당한 것이다. 얕은 물길에 튀어나온 바위 둔덕에 배가 ‘좌초’한 것이다. 20분 가까이 실랑이한 끝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우리가 좌초한 곳은 ‘북극해의 빙벽’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었다. 타이타닉호가 북극해에서 암초에 부딪쳐 침몰된 사실이 떠올랐다. 우리는 조각배로 동굴 안 북극해에서 좌초된 셈이다. 공연히 쓴웃음이 나왔다.
중국 여행을 한 사람들이면 자주 겪게 되는 것은 관광지 현지인들의 판매 공세이다. 이곳 본계수동을 떠날 때도 현지 장사치들이 각종 나비와 식물 표본을 들고 사달라고 아우성이다. 흔히 중국에서 물건을살 때에는 먼저 사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장사치들이 터무니없이 비싸게 부르게 때문이라고 한다. 관광객들이 사지 않으면 장사치들이 먼저 가격을 내리면서 흥정을 걸어온다. 결국 버스에 탈 때 그들이 마지막으로 부르는 가격이 우리의 적정 구매 가격이 되는 셈이다. 이곳도 아니나 다를까, 중국돈으로 50위안 하던 나비표본 따위들이 우리가 버스에 탈 때에는 10위안까지 내려갔다. 비로소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이 활발하게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흥정하다 끝내 사지 않아 중국 여인이 성을 낸다. 착잡했다. 손님이 깎을 걸 예상하고 높은 가격을 부르는 중국 시골 아낙네의 상술-상술이라고 해봤자 어디 자본주의의 상술에 비기겠는가-도 문제라할 수 있지만,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놓고 지나치게 흥정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모습도 보기가 좋지 않았다. 우리가 지나치게 깎으면 결국 다음에 그들은 깎일 것을 대비해 더 비싸게 부르고 관광객이 다시 깎게 되는 악순환만 되풀이될 것이다. 몇 푼 되지 않은 돈에 한국인의 인심도 돈을 깎는 만큼 깎일 것이다.
북방유목민족의 문화가 모인 요녕성박물관
심양에는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다. 원래는 심양 북릉을 갈 예정이었으나 시간이 여의치 않아 몇 년 전에 건립된 요녕성박물관만 구경하기로 했다. 요녕성박물관은 1920-30년대 풍운의 만주 일대를 석권한 봉천군벌 장작림의 관사와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마적 출신의 장작림패를 봉천군벌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곳을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장작림과 그의 아들 장학량의 일생은 그야말로 풍운의 일생이었고, 이 간략한 여행기에 다 담을 수 없기에 생략하기로 하자.
요녕성은 일찍이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한 선사문명의 발상지이다. 홍산지역의 신석기문화를 비롯해 이후 우리 조상인 예맥족은 물론 거란·말갈(만주족)·선비·흉노 등 북방 유목민족들이 이 일대에서 웅거하면서 고조선·부여·고구려·요·금 등 다양한 북방국가를 세우고 명멸해 간 곳이다. 중국에서도 이 지역 문화가 중국 관내(關內) 못지않은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중국 관내문화와 비교해 뚜렷한 독자성을 보이는 점에서 요하문명이라 이름 짓고 있다. 요녕성박물관은 이들 문화의 흔적들을 집대성하고 있는 점에서 여타 중국의 박물관과 달리 이채를 띠고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고조선과 부여 그리고 고구려와 발해의 옛 문화 자취를 잠시나마 둘러보았다. 물론 이곳 유물 설명에는 고구려나 발해가 오늘의 우리 한민족 역사의 소중한 일부임을 결코 밝히지 않고 있다. 중국 내 유서 깊은 소수민족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중국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동북아역사공정의 영향이 이곳인들 피해갈 수 있으랴!
요녕성박물관을 보고나니 오후 4시 30분, 갈 곳이 없어졌다. 청나라 황제들이 묻혀있는 북릉은 너무 멀고 그나마 근처에 있는 후금(청)의 고궁 또한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4시에서 4시 반이면 중국의 고궁이나 박물관은 문을 닫는다. 모두 피곤해 하기에 일찍 숙소로 들어가 쉰 다음에 밤에 서탑거리를 둘러보고 다음날 아침에 대련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어찌 그럴 수 있으랴! 대련에서 심양까지 와서 박물관 하나만 보고 간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더구나 심양은 고려가 원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많은 고려인들이 이곳으로 강제로 이주해살던 곳이다. 고려 충선왕이 이곳에서 심양왕으로 있었던 곳이다. 어디 그뿐이랴.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삼학사와 조선 백성들이 전쟁포로로 끌려온 곳이 아니던가. 소현세자는 청 태종이 세운 궁궐 동쪽 독서당에 유폐되었고, 후금과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삼학사는 이곳 서문 밖에서 처형당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의주를 거쳐 안동으로 건너온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터를 잡은 곳이 바로 심양의 서탑거리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주먹 시라소니가 서탑거리의 폭력배 두목과 결투를 벌이던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 의미를 지닌 심양을 그냥 떠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여행사와 의논해 저녁에는 서탑거리를 돌고 아침에는 심양고궁을 방문하기로 했다. 대신 대련에서의 답사 일정은 대폭 축소하기로 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두어 시간 쉰 후 일행은 서탑거리로 향했다. 한식으로 저녁을 먹은 후 일부는 식당에 남고 나머지는 서탑으로 향했다. 어두운 밤, 서탑은 문이 잠겨 있었다. 담 밖에서 서탑을 보고 불교의 교리를 인용하며 탑의 유래와 관련 이야기를 설명하고 서탑거리의 역사와 시라소니 얘기를 하며 잠시 긴장을 풀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은 사연도 많았다
<단체사진>15일 일요일, 이제 떠나는 날이다. 아침 일찍 서둘러 심양 고궁으로 향하였다. 심양 고궁은 북경의 자금성 다음으로 중국에서 큰 성이다. 청의 태조 누르하치와 그 아들 태종 홍태극이 건설한 청의 황궁이다. 그러나 곧 중국 관내로 이동해 북경 자금성에 수도를 옮겼다. 심양고궁은 중국 문화권 밖에 지어진 만큼 만주족 특유의 체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높고 견고한 성벽에 황제의 거처와 통치권임을상징하는 화려한 장식과 너른 궁정(宮廷)과 중국 정복의 주역인 팔기병의 건물 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을보기에는 너무나 시간은 촉박했다. 미처 다보지 못한 궁궐의 모습을 추억으로 간직하려는 듯 이것을배경삼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바삐 버스에 올라 대련으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무료하고 지치기 마련이다. 분위기를 돋우고자 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런 저런이야기 속에 분위기는 살아나고 또 술이 돌았다. 그런데 많이 취했나보다. 눈을 뜨니 이미 대련공항이다. 아뿔싸! 버스 안에서의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른바 필름이 끊긴 것이다. 마실 땐 모르지만 갑자기 취기가 오르는 게 중국술의 특징 아니던가. 긴장이 풀린데다가 이리저리 주는 술을 넙죽 받아먹은 게 화근이다. “제가 술 먹고 어쨌나요?” 궁색한 질문에 모두가 빙그레. 죄인 아닌 죄인 모양으로 버스에서 내려 출국 수속을 밟았다.
그런데 불쾌한 일이 발생했다. 공항 검색요원이 내 가방을 함부로 집어던지듯 검색대에 올리는 것이다.
‘어럽쇼, 이것 봐라.’ 중국 공항에서 자주 당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대합실에 들어갔다가 다시 공항 검색대로 가서 책임자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내 가방을 함부로 취급한 사람을 조치해주기 바란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이윽고 책임자가 왔다. 따로 간이 응접실에 나를 앉혀놓고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실 중국어를 못하지만 눈치로 알 수 있다. 내 입에는 아직도 술 냄새가 그득하다. 정신 차려야 한다! 자칫 술주정으로 몰려 내가 낭패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럴 때는 중국인들의 문화적 자존심을 추켜세우면서 문제를 지적해야 그들도 기분 좋게 받아들일 것 같았다. 나는 필답으로 사연을 설명했다. 요는 이러했다. 중국은 문명대국이며 문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더구나 북경올림픽이 2년 뒤 열리는데 중국의 첫 대문이라고 할 공항에서 외국인에게 불친절하고 승객의 가방마저 함부로 취급해서는 되겠느냐고 따졌다. 그리고는 내 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책이름은 ‘송시(宋詩)’. 소동파를 비롯해 중국이 자랑하는 문인들의 한시가 줄줄이 적혀 있는 책이다. 공항 책임자는 놀라는 표정이다. 일개 한국 관광객이 그들이 자랑하는 문호들의 작품(게다가 한문으로 된 것을!)을 내가 가방에 넣고 줄치며 읽었다는 데서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난 의기양양하게 한자로 따졌다.
“봐라! 나는 당신들이 자랑하는 한시를 이렇게 여행 중에도 읽을 정도로 중국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당신들은 당신들의 조상의 소중한 글이 담긴 책이 들어 있는 내 가방을 집어던졌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문화를 집어던진 것이다! 이것이 문명대국 중국의 모습인가?” 공항 책임자는 침중하고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알겠다고 하며 문제의 검색요원을 불러 나에게 사과를 시켰다. 마땅찮은 표정을 짓던 검색원의 입에서 나온 말 “아 엠 소리”. 이쯤 되면 나도 물러서야 한다. 나도 미안하다고 하며 악수를청했다. 그리고 그들의 묘한 배웅을 받으며 응접실을 나오자 비행기는 곧 출발을 재촉하고 있었다.
허겁지겁 비행기를 타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비행기는 흔들거리는 하늘로 올랐다. 눈을 뜨고 내려보니불빛이 어른거린다. 다시 눈을 감았다. 아 술은 언제 깨려는가? 이제는 돌아가 내 땅에서 내가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