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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영교수 “친일 족쇄 ‘유치진’ 재평가”-연합뉴스(07.06.29)

2007년 6월 29일 644

유민영교수 “친일 족쇄 ‘유치진’ 재평가”     (통영=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경남 통영 출신의 극작가.연극운동가로 친일인사로 분류된 동랑(東朗) 유치진(柳致眞.1905~1974)이 한국 연극사에 남긴 업적은 그의 친일행위를 덮고도 남는다는 평가가 나왔다.유민영 단국대학교 명예교수(전 정동극장 이사장)는 ‘2007 전국 소극장 축제’ 개막기념으로 30일 오후 열리는 ‘한국 신극 100년사에 미친 동랑의 영향’ 심포지엄 발제자료에서 유치진이 비록 일제말기 친일행위를 했지만 연극은 물론, 한국현대문화 전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선구자였다고 주장했다.유치진은 1941년부터 4년간 친일 어용극을 주로 한 ‘현대극장’ 대표를 지내고 일본군국주의가 추구하던 목표에 맞춘 희곡을 써 2005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는 등 친일인사로 분류됐었다.유 교수는 “문약했던 그가 총독부의 친일 강요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해방후 몇년간 참회의 시간을 가졌던 점을 감안하면 탄생 100주년 행사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점은 아쉽다”고 밝혔다.그는 이어 “일제 말기 몇년을 제외하고 전 생애에 걸쳐 유치진만큼 인재양성과 전통연희 복원에 노력하면서 광범위하게 한국연극기반을 다진 인물은 없다”면서 “그의 업적은 친일행위를 커버하고도 남는다” 고 평가했다.김열규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는 ‘예술인의 삶과 작품, 민족과 이념과 예술사이에서’란 발제자료에서 “조선이름과 조선말이 없었고 제국신민이 있었을 뿐인 시대에 이광수며 최남선을 일방적으로 나무랄 처지는 아닌 것 같다”면서 “이념과 민족을 따로하고 예술과 문학을 평가.받아들이는 마음자세를 가다듬어 볼 수 도 있다”고 말했다.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상우 영남대 교수와 송선호 성균관대 겸임교수 등이 유치진의 역사극과 연극운동에서의 계몽성, 대중성에

[기고]백범 58주기, ‘원로 백범맨’ 살리자-경향신문(07.06.28)

2007년 6월 29일 501

[기고]백범 58주기, ‘원로 백범맨’ 살리자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새싹을 냄과 같이, 내가 암살되어 나와 같은 애국자들을 많이 낼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겠다.”30여년간의 목숨을 건 독립운동의 여정을 끝내고 환국한 백범이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를 제보받을 때마다 남겼던 유언이다. 백범은 자신의 운명을 예측이라도 한 듯, 이 유언을 남기고 1949년 6월26일 정오에 안두희가 쏜 흉탄을 맞고 하늘로 돌아갔다.백범은 암살되기 하루 전, 공군 장교였던 아들 신이 찾아와 암살 위험을 알리며 피신을 간청했지만 “군인이 사사로운 정에 매여 임지를 비운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호통을 쳐서 보낸 뒤 예고된 사선을 향해 정면으로 맞섰던 것이다.백범의 ‘밀알유언’은 희망차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강산 곳곳에서 꽃처럼 피어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제 말엽 ‘부민관 폭파사건’의 주역이었던 조문기옹이다.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 자리인 ‘부민관’에서 일본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행사장에 동지들과 함께 폭약을 터뜨린 것이다. 해방 직후 조옹은 보장된 부귀영화와 출세가도를 버리고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은거의 청년시절을 보냈다.그러다가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제2의 부민관 폭파 사건’을 도모하다 모진 고초를 겪은 뒤 다시 경기도 화성의 고향으로 돌아가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독립운동가’로 등록만 했더라도 최악의 생활은 면했을 것이건만, 그는 그때까지도 이를 거부했다.“조국이 실질적으로 독립된 것도 아닌데 독립운동가 대우를 받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것이 거부이유였다. 보다 못한 조옹의 무남독녀 내외가

뉴라이트가 접수한 과거사정리위원회

2009년 12월 21일 387

뉴라이트가 접수한 과거사정리위원회(시사인, 09.12.21)

200억대 땅, 60여년 간 조선총독부 명의로

2009년 12월 21일 504

200억대 땅, 60여년 간 조선총독부 명의로(노컷뉴스, 09.12.21)

[기고]백범 58주기, ‘원로 백범맨’ 살리자

2007년 6월 29일 417

    홍원식 원광디지털대 교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새싹을 냄과 같이, 내가 암살되어 나와 같은 애국자들을 많이 낼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겠다.”30여년간의 목숨을 건 독립운동의 여정을 끝내고 환국한 백범이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를 제보받을 때마다 남겼던 유언이다. 백범은 자신의 운명을 예측이라도 한 듯, 이 유언을 남기고 1949년 6월26일 정오에 안두희가 쏜 흉탄을 맞고 하늘로 돌아갔다. 백범은 암살되기 하루 전, 공군 장교였던 아들 신이 찾아와 암살 위험을 알리며 피신을 간청했지만 “군인이 사사로운 정에 매여 임지를 비운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호통을 쳐서 보낸 뒤 예고된 사선을 향해 정면으로 맞섰던 것이다.백범의 ‘밀알유언’은 희망차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강산 곳곳에서 꽃처럼 피어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제 말엽 ‘부민관 폭파사건’의 주역이었던 조문기옹이다.        ▲ 조문기 이사장 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 자리인 ‘부민관’에서 일본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행사장에 동지들과 함께 폭약을 터뜨린 것이다. 해방 직후 조옹은 보장된 부귀영화와 출세가도를 버리고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은거의 청년시절을 보냈다.그러다가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제2의 부민관 폭파 사건’을 도모하다 모진 고초를 겪은 뒤 다시 경기도 화성의 고향으로 돌아가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독립운동가’로 등록만 했더라도 최악의 생활은 면했을 것이건만, 그는 그때까지도 이를 거부했다.“조국이 실질적으로 독립된 것도 아닌데 독립운동가 대우를 받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90억원대 조선총독부 명의 토지, 국고로 환수

2009년 12월 21일 382

90억원대 조선총독부 명의 토지, 국고로 환수(헤럴드경제, 09.12.21)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명의 토지 국고환수

2009년 12월 21일 410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명의 토지 국고환수(뉴시스, 09.12.21)

“위안부 결의안, 저급한 수사에 불과”-연합뉴스(07.06.28)

2007년 6월 28일 402

“위안부 결의안, 저급한 수사에 불과”<요미우리>     (도쿄=연합뉴스) 이홍기 특파원 = 일본의 유력지인 요미우리(讀賣)신문은 28일 사설에서 미 하원 외교위원회의 군대위안부 결의안에 대해 “사실 오인에 따른 결의”라며 “수준 낮은 수사로 일관한 결의안으로, 미 의원들의 양식을 의심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우익 성향의 이 신문은 ‘일본군과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직접 지시했다는 자료가 지금까지 조사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도 답변서에서 이 점을 명확히 했다고 주장하면서 “도대체 대일 결의안이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이냐”고 따졌다.신문은 결의안이 주요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 1993년 고노 담화라고 지적하면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외교적인 배려에서 고노 담화의 계승을 주장하는 한 강제연행에 대한 오해가 불식될 수 없기 때문에 담화를 수정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한다고 강조했다.요미우리는 정부의 대응에 대해 결의안이 미 의회에서 채택되는 수많은 결의안 중의 하나로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장래 화근을 없애기 위해 미국의 오해를 풀도록 본회의 채택을 저지하는데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