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백범 58주기, ‘원로 백범맨’ 살리자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새싹을 냄과 같이, 내가 암살되어 나와 같은 애국자들을 많이 낼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겠다.”
30여년간의 목숨을 건 독립운동의 여정을 끝내고 환국한 백범이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를 제보받을 때마다 남겼던 유언이다. 백범은 자신의 운명을 예측이라도 한 듯, 이 유언을 남기고 1949년 6월26일 정오에 안두희가 쏜 흉탄을 맞고 하늘로 돌아갔다.
백범은 암살되기 하루 전, 공군 장교였던 아들 신이 찾아와 암살 위험을 알리며 피신을 간청했지만 “군인이 사사로운 정에 매여 임지를 비운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호통을 쳐서 보낸 뒤 예고된 사선을 향해 정면으로 맞섰던 것이다.
백범의 ‘밀알유언’은 희망차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강산 곳곳에서 꽃처럼 피어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제 말엽 ‘부민관 폭파사건’의 주역이었던 조문기옹이다.
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 자리인 ‘부민관’에서 일본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행사장에 동지들과 함께 폭약을 터뜨린 것이다. 해방 직후 조옹은 보장된 부귀영화와 출세가도를 버리고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은거의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제2의 부민관 폭파 사건’을 도모하다 모진 고초를 겪은 뒤 다시 경기도 화성의 고향으로 돌아가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독립운동가’로 등록만 했더라도 최악의 생활은 면했을 것이건만, 그는 그때까지도 이를 거부했다.
“조국이 실질적으로 독립된 것도 아닌데 독립운동가 대우를 받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것이 거부이유였다. 보다 못한 조옹의 무남독녀 내외가 보훈처에 이 사실을 알렸고 그는 뒤 늦게야 생존 최고의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노발대발했던 조문기옹은 주위의 간곡한 청에 이끌려 세상으로 다시 나와 ‘새로운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70이 넘은 고령에 맡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직이 그것이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 했던가. 폭풍한설에도 끄덕없는 노송처럼 정정했던 조문기옹이 얼마 전 쓰러졌다. 최근에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안타까운 일은 평생을 동지처럼 조옹 곁을 지켜온 장영심 여사가 만성당뇨병에 시달리며 노구를 이끌고 그를 돌봐야 하는 참담함이다. 아직 의식이 남아있던 어느 날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며 노부부는 밤새워 울었다 한다. 올해로 백범이 떠난 지 58주년이 된다.
평생을 백범정신 실천을 위해 달려온 ‘원로 백범맨’ 조문기옹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역사와 민족 앞에 몹시도 부끄러울 일이다.
– 원광디지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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