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기사
[사설] 빼돌린 친일파 재산 남김없이 환수해야-경향신문(06.09.11)
[사설] 빼돌린 친일파 재산 남김없이 환수해야 서울 종로구 운니동 일본문화원 건물의 소유주는 거물급 친일파 조중응의 손녀인 조모씨가 대표이사로 있는 모 주식회사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국권 찬탈에 협조한 대가로 조중응에게 엄청난 재산을 주고, 현재의 일본 정부는 조중응의 후손에게 임대료를 주고 있는 기막힌 아이러니가 대를 이어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일본문화원 건물은 친일파 재산환수의 대상이 아니다. 조씨가 조부로부터 직접 상속 받은 재산이 아닌 데다 소유주도 조씨 개인이 아닌 주식회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친일 민족반역자 후손들의 상당수가 제3자에게 재산을 매각한 뒤 일본 등지에 귀화하거나 해외이민을 떠났다고 한다. 경향신문 보도(2006년 9월11일자 8면)에 따르면 조중응의 후손들은 조중응이 을사늑약에 찬성한 대가로 일제에 받은 경기 남양주시 70여만㎡ 토지를 제3자에게 매각한 뒤 모두 일본으로 귀화했고, 국내에는 손녀 조씨만 남아 있다는 소식이다. 또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정교원의 후손들은 정교원이 전국 각지에 소유했던 토지와 임야를 매각한 뒤 양도소득세도 내지 않고 미국 이민을 떠났으며, 중추원 의장을 지낸 민영휘의 증손자 민모씨는 ‘겨울연가’ 촬영지로 잘 알려진 춘천 남이섬을 주식회사 명의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우리가 여러 차례 강조했거니와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매국의 대가로 받은 재산은 일종의 ‘장물(贓物)’이다. 그것이 원래 상태로 있건, 양도 등으로 형태가 바뀌었건 간에 반드시 원래 소유주인 국가와 국민에게 되돌아와야 한다. 따라서 친일파 후손들이 토지를 처분했을 경우 고의성(故意性)을 철저히 밝혀내야 하며, 그 연결고리의 규명이 어려울 경우 부당이득
“풀뿌리 역사 50년 파헤쳐도 목말라”-부산일보(06.09.19)
“풀뿌리 역사 50년 파헤쳐도 목말라” ■ 진해 지역 연구서 12권 발간한 향토사학자 황정덕 옹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도 ‘지역’을 우물 삼아 판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돈이나 명예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지역사를 장장 50년 동안 내리 팠다. 황정덕(79)씨는 경남 진해의 향토사학자다. 그의 말을 빌리면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향토사학자다. 웅천이라는 옛 지명이 굳이 들어간 것은 일제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고 했다. “바다(海)를 진압(鎭)하겠다는 일제의 욕심이 진해(鎭海)라는 지명에 담겨 있죠. 고유 명칭은 ‘웅천’입니다.” 그는 지난 1985년 ‘진해향토문화연구소’를 개설했다. 학교장 퇴임 직후다. 물론 지역사 연구는 훨씬 이전인 30대 때부터 시작했다. 부산에서 첫 교편을 잡아 1956년 진해여고로 옮겨온 뒤부터라고 했다. 진해는 4대째 살아온 그의 고향이었다. “국토와 국사만큼 향토와 지역사에 대해 궁금했죠.” 그는 당시 국어와 역사를 담당했다. 하지만 당시만해도 책자는 물론 자료조차 흔하지 않았다. 그의 ‘광적인’ 자료수집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됐다. 닥치는 대로 모으고 분류했다. 정리된 분야는 책으로 펴냈다. ‘내 고장 사적순례(1966)’는 그때 출간됐다. 하지만 본격적인 자료 조사와 저술은 학교장 퇴임 전후에 이뤄졌다.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 때였죠.” 토요일 밤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하루종일 국립중앙도서관에 머물다 일요일 밤차로 내려왔다. 그런 일이 몇 년 동안 반복됐다. 서울대 규장각과 국사편찬위원회,대학 도서관,신문사,법원,헌병대,경찰서 등도 찾아다녔다. 중앙사에서 지역사를 따로 떼내는 ‘지루한’ 작업의 연속이었다. 작은 실마리를 따라 사람을 수소문하고 발언을
100년전 그 때의 절망처럼…그 곳엔 아직 망국의 恨이…
100년전 그 때의 절망처럼…그 곳엔 아직 망국의 恨이…(한국경제, 10.03.05)
일제 식민정책의 본질 파헤쳐
일제 식민정책의 본질 파헤쳐(세계일보, 10.03.05)
독립군 할머니와 밑반찬 도우미
오마이뉴스 양동정 기자 지난 9월 중순경 집무실에 “동회장님이 누구시요?” 하시며 들어서시는 왜소한 체구이긴 하지만 당찬 할머니 한분이 계셨다. 우선 자리를 권하고 시원한 음료수 한잔을 대접하며, “제가 동장인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하고 여쭈었더니 손에 들고 계신 독립유공자 증명을 내어 놓으시며 말씀을 하기 시작하셨다. “내가 살아있는 유일한 여자 독립유공자 이병희인데 나이가 구십이여. 늙은이가 밥심(힘)으로 살아야 하는디 반찬이 없어서 밥을 못 먹겠어. 반찬 어떻게 해서 좀 대줄 수 없을까?” 말씀을 들어 본즉, 당신 혼자 우리 동네(거여2동)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나라에서 많이 도와주어 밥해 먹는 것은 걱정이 없는데 반찬을 만들어 먹기가 힘들어서 보훈처를 찾아가 반찬을 도와 줄 수 없느냐 했더니 동장을 한 번 찾아가 보라 했다고 한다. 대강의 방문 사유를 파악하고 일단 할머니를 댁으로 돌려보낸 뒤 인터넷검색 등을 통해 어떠한 분인지 확인을 했더니 보통의 할머니가 아니시다. ▲ 이육사(본명이원록)의 호적등본으로 붉은색 줄 부분에 이병희가 북경총영사관에 사망신고한 기록이 있다. ⓒ 양동정 이병희 할머니는 1918년 생으로 <청포도> <광야>라는 시를 쓴 이육사와 같은 안동이씨 집안사람으로 일제시대에 서울에서 항일노동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4년여를 서대문 형무소 독방에서 옥고를 치르신 후 석방되어 이육사의 권유로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이후 이육사가 1944년 북경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보를 받고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렀으며, 이 때 인수 받은 육사의 유품 중 마분지로 만든
30대 문인들이 뽑은 ‘과대평가된 문인’은 하루키·이문열·고은…-한국일보(06.09.27)
30대 문인들이 뽑은 ‘과대평가된 문인’은 하루키·이문열·고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소설가 이문열, 시인 고은이 30대 문인들에 의해 ‘문학사적으로 과대평가된 문인’으로 꼽혔다.최근 발행된 교수신문에 따르면 평론가 30명, 소설가 30명, 시인 35명 등 신진문인 9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과대평가된 문인으로 19명이 하루키를, 각각 13명이 이문열과 고은을 지목했다. 응답자들은 대부분 1970년대 이후 출생해 2000년대 들어 언론사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문인들이다.과대평가된 외국 문인으로 하루키를 꼽은 문인들은 그 이유로 “초기작은 좋은데 후기로 갈수록 완성도가 떨어진다” “태작이 많고 상업성이 지나치다”는 점 등을 들었다.이문열에 대해서는 “작품의 질에 비해 지나친 권력을 보유했다” “초기의 탁월한 미적 재능이 단조롭고 틀에 박힌 정치적 의식으로 인해 더 이상 전개되지 못했다”고 평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돼온 고은에 대해서는 “개성적이고 뚜렷한 문학적 성과를 얻지 못했다” “최근작들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혹평했다. 시인 5명, 평론가 5명이 과대평가된 문인으로 꼽은 작고 시인 서정주는 “작품을 평가하기에는 친일로 인한 과오가 너무 크다”는 지적을 받았다.또 영향을 받은 문인으로는 이상(14명), 김수영(12명), 백석(10명), 재조명해야 할 문인으로는 김종삼(5명), 이승우(4) 등이 꼽혔다. 주목하는 동료 문인으로 소설가들은 김중혁(5명), 시인들은 황병승(8명) 김경주(7명), 평론가들은 소설가 전성태(3명)와 시인 황병승(3명)을 가장 많이 들었다.교수신문측은 “신세대 작가들을 외재적으로 평가하기보다 전세대 문학전통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직접 들어봄으로써 향후 한국문학의 전개를 엿보기 위해 설문을 실시했다”고 설명했다.
김성모 ‘혐일류’, 한국 380부 vs 일본 2만부 대조
김성모 ‘혐일류’, 한국 380부 vs 일본 2만부 대조(일간스포츠, 10.03.04)
‘북한의 3·1운동’ 전개기록 첫 발굴
‘북한의 3·1운동’ 전개기록 첫 발굴(한겨레신문, 10.02.26)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에요”-오마이뉴스(06.09.27)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에요” [인터뷰①] 재일교포 3세가 경험한 한국 유학생활, 그리고 일본 최근 일본 자민당 새 총재에 아베 신조 전 관방장관이 당선되면서 일본 국민은 물론 한국에서도 앞으로 대일관계에 관심이 높다. 이 두 나라가 단순히 지리적으로 가까워서뿐만이 아니라, 과거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미래에도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이웃나라’이기 때문이다. 한일관계는 최근 야스쿠니·독도 등을 둘러싼 외교마찰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일본 정치에 대한 한국의 관심도 이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일관계는 야스쿠니·독도가 전부가 아니다. 기자는 일본 속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한국국적이든 조선적이든)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진정한 한일관계의 발전을 위한 과제들을 3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 민족, 특히 재일 교포에 관심을 둔 것은 그들의 삶 자체가 우리의 모습, 일본의 모습, 그리고 한일관계를 동시에 비춰주는 거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 주> ▲ 한국 유학생활 중 유쾌하지 않았던 경험을 들려주는 신영희씨. ⓒ 허재철신영희씨는 일본 교토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 3세대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지금은’이라는 말에서 눈치를 챘겠지만, 전에는 한국인이 아니었다. 7년 전까지만 해도 신씨는 ‘조선인’으로 불리고 있었다.일본강점기 가난한 조국을 등지고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신씨의 할아버지. 그 때부터 할아버지·할머니의 뒤를 이어, 아버지·어머니, 그리고 신씨 자신도 줄곧 이 곳 교토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던 ‘조선’적을 7년 전까지 고집세게 유지하고 있었다.“일본에 사는 재일교포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