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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생체실험’ 731부대, 패전 9일 뒤 부산항 떠났다-세계일보(07.08.20)
[단독]’생체실험’ 731부대, 패전 9일 뒤 부산항 떠났다 ◇1945년 말 부산항에서 일본을 향해 떠나는 귀환선에 탄 일본인들.(마이니치신문, 1970년, 최영호 교수 제공) 일제가 패전 직후 연합국의 통제에 들어가기 전 서둘러 본토로 해외 주둔 일본군을 집중적으로 귀환시켰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도 1945년 8월24일 부관(釜關·부산∼시모노세키) 연락선인 도쿠주마루(德壽丸·2600t)를 타고 부산항을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미군정 체제가 들어서기 전 전후처리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싹’을 최대한 없애려 했던 일제의 꼼수로 분석된다.최영호 영산대 교수(국제관계학)는 한국정치학회가 23일부터 사흘간 부산 벡스코에서 주최하는 ‘2007 한국학 세계학술대회’ 발제문 ‘일본패전 직후 부산항을 통한 일본인의 귀환’과 ‘일본패전 후 첫 귀환선’(한일시평 제143호)을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그간 일본 학계는 패전 후 일본인 귀환 시점을 1945년 9월2일로 잡아 왔는데, 이날은 연합국군사령부가 1945년 8월31일 한일 간 대형선박 통행을 허가한 뒤 부관연락선 고안마루(興安丸·5600t)가 처음으로 부산항에서 일본인 7500명을 싣고 일본 센자키항에 돌아온 날이다.최 교수는 패전 이후 1961년까지 한반도에서 귀환한 일본인 92만여명(일본 후생성 집계) 중 통계에 드러나지 않은 수만명이 45년 8월에 집중적으로 부산항을 떠났다고 주장했다.당시 부산항은 일본과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인천항, 주문진항, 군산항과 비교해 귀환 희망 일본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항구였다. 조선총독부 부산지방교통국 부산항 교통상황 일지에 따르면 45년 8월∼46년 12월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인은 모두 67만4198명.하지만 45년 8월 한 달간 귀환자는 9월(12만7490명), 10월(16만9263명)에 비해 턱없이 적은
[단독]’생체실험’ 731부대, 패전 9일 뒤 부산항 떠났다-세계일보(07.08.20)
[단독]’생체실험’ 731부대, 패전 9일 뒤 부산항 떠났다 ◇1945년 말 부산항에서 일본을 향해 떠나는 귀환선에 탄 일본인들.(마이니치신문, 1970년, 최영호 교수 제공) 일제가 패전 직후 연합국의 통제에 들어가기 전 서둘러 본토로 해외 주둔 일본군을 집중적으로 귀환시켰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도 1945년 8월24일 부관(釜關·부산∼시모노세키) 연락선인 도쿠주마루(德壽丸·2600t)를 타고 부산항을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미군정 체제가 들어서기 전 전후처리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싹’을 최대한 없애려 했던 일제의 꼼수로 분석된다.최영호 영산대 교수(국제관계학)는 한국정치학회가 23일부터 사흘간 부산 벡스코에서 주최하는 ‘2007 한국학 세계학술대회’ 발제문 ‘일본패전 직후 부산항을 통한 일본인의 귀환’과 ‘일본패전 후 첫 귀환선’(한일시평 제143호)을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그간 일본 학계는 패전 후 일본인 귀환 시점을 1945년 9월2일로 잡아 왔는데, 이날은 연합국군사령부가 1945년 8월31일 한일 간 대형선박 통행을 허가한 뒤 부관연락선 고안마루(興安丸·5600t)가 처음으로 부산항에서 일본인 7500명을 싣고 일본 센자키항에 돌아온 날이다.최 교수는 패전 이후 1961년까지 한반도에서 귀환한 일본인 92만여명(일본 후생성 집계) 중 통계에 드러나지 않은 수만명이 45년 8월에 집중적으로 부산항을 떠났다고 주장했다.당시 부산항은 일본과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인천항, 주문진항, 군산항과 비교해 귀환 희망 일본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항구였다. 조선총독부 부산지방교통국 부산항 교통상황 일지에 따르면 45년 8월∼46년 12월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인은 모두 67만4198명.하지만 45년 8월 한 달간 귀환자는 9월(12만7490명), 10월(16만9263명)에 비해 턱없이 적은
안중근 아들은 ‘개처럼 살았다’
안중근 아들은 ‘개처럼 살았다’(북데일리, 09.11.03)
안중근 다룬 뮤지컬 ‘영웅’을 보고… 비장하고 귀에 감기는 음악 사실적 의거 장면 등 감동적
안중근 다룬 뮤지컬 ‘영웅’을 보고… 비장하고 귀에 감기는 음악 사실적 의거 장면 등 감동적(국민일보, 09.11.01)
“80년전 나진에는 ‘황금비’가 내렸네”-내일신문(07.08.23)
“80년전 나진에는 ‘황금비’가 내렸네” 일제, 1932년 길회선 종단항으로 나진 지정 … 한달 사이 땅값 ‘1천배’1900년대 초반부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륙으로 진출한 섬나라 일본은 물류라는 한계에 부딪쳤다. 쓰루가-블라디보스토크, 시모노세키-부산, 모지-다롄이라는 기존 교역로가 러시아의 통제를 받는 노선이거나 이동거리가 길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길회선(吉會線) 철도. 중국 지린과 회령을 철도로 이어 동해로 연결하는 종단항(철도종착역과 연결된 항구)를 개발하는 계획이다.문제는 종단항 선정. 논란끝에 일본이 길회선 부설권을 확보한지 16년째 되는 1925년에서야 청진과 웅기, 나진이 후보지로 선정됐다.나진은 만주철도와 항만협회 기사들이 10여년 동안 함경북도 해안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천혜의 항구였다. 하지만 기반시설이 전무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인근을 샅샅이 뒤져도 불과 10여채의 인가만 있었을 뿐 도로도 제대로 없었다. 당연히 땅값은 엄청나게 낮았다. 당시 함경북도 대부호였던 김기덕이 450만평을 사들인 것을 비롯해 발빠른 투기꾼들의 먹잇감이 됐다.1932년 8월 23일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총독은 나진이 종단항으로 최종 결정됐다고 발표했다. 곧바로 ‘땅바람’이 불어 닥쳤다. 인구 100여명에 불과한 어촌이 동양 굴지의 대항구로 개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나진에 인접한 웅기로 투기꾼들이 파리떼처럼 몰려들었다. 평당 1~2전, 비싸야 20~30전하던 나진 땅값이 종단항 발표 직후 2~4원, 한달 후에는 20~40원으로 치솟았다. 무려 1000배나 급등한 것이다. 월간지 ‘동광’ 1932년 11월호 기사 ‘나진만의 황금비’를 쓴 이윤재는 “웅기 전 시가지는 ‘땅!’ ‘돈!’라는 소리로 가득찼다. … 여관마다 대만원, 거리에는 밤낮없이 눈뜨고 보기 어려운 실로
“80년전 나진에는 ‘황금비’가 내렸네”-내일신문(07.08.23)
“80년전 나진에는 ‘황금비’가 내렸네” 일제, 1932년 길회선 종단항으로 나진 지정 … 한달 사이 땅값 ‘1천배’1900년대 초반부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륙으로 진출한 섬나라 일본은 물류라는 한계에 부딪쳤다. 쓰루가-블라디보스토크, 시모노세키-부산, 모지-다롄이라는 기존 교역로가 러시아의 통제를 받는 노선이거나 이동거리가 길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길회선(吉會線) 철도. 중국 지린과 회령을 철도로 이어 동해로 연결하는 종단항(철도종착역과 연결된 항구)를 개발하는 계획이다.문제는 종단항 선정. 논란끝에 일본이 길회선 부설권을 확보한지 16년째 되는 1925년에서야 청진과 웅기, 나진이 후보지로 선정됐다.나진은 만주철도와 항만협회 기사들이 10여년 동안 함경북도 해안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천혜의 항구였다. 하지만 기반시설이 전무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인근을 샅샅이 뒤져도 불과 10여채의 인가만 있었을 뿐 도로도 제대로 없었다. 당연히 땅값은 엄청나게 낮았다. 당시 함경북도 대부호였던 김기덕이 450만평을 사들인 것을 비롯해 발빠른 투기꾼들의 먹잇감이 됐다.1932년 8월 23일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총독은 나진이 종단항으로 최종 결정됐다고 발표했다. 곧바로 ‘땅바람’이 불어 닥쳤다. 인구 100여명에 불과한 어촌이 동양 굴지의 대항구로 개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나진에 인접한 웅기로 투기꾼들이 파리떼처럼 몰려들었다. 평당 1~2전, 비싸야 20~30전하던 나진 땅값이 종단항 발표 직후 2~4원, 한달 후에는 20~40원으로 치솟았다. 무려 1000배나 급등한 것이다. 월간지 ‘동광’ 1932년 11월호 기사 ‘나진만의 황금비’를 쓴 이윤재는 “웅기 전 시가지는 ‘땅!’ ‘돈!’라는 소리로 가득찼다. … 여관마다 대만원, 거리에는 밤낮없이 눈뜨고 보기 어려운 실로
책과 영상으로 만나는 안중근 의사
책과 영상으로 만나는 안중근 의사(세계일보, 09.11.01)
‘아직 오지 않은 해방’ 근로정신대 문제해결 촉구 문화행사 다채
‘아직 오지 않은 해방’ 근로정신대 문제해결 촉구 문화행사 다채(뉴시스, 09.11.03)
‘닭장차’ 없는 세종로가 ‘진짜 세종로’다-프레시안(07.08.21)
‘닭장차’ 없는 세종로가 ‘진짜 세종로’다 [열려라, 광화문광장!②] 세종로 일대의 공간적 의미와 가치 2005년 7월 12일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주대한민국 미합중국대사관 청사 이전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간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로써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미 대사관 청사가 용산구 용산동으로 옮겨가고, 세종로가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렸다. 그런데 세종로는 어떤 길인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39번지 비각(*)에서 세종로 1번지 광화문에 이르는 가로(街路)로 길이 0.6㎞, 너비 100m이며 수도 서울과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상징하는 중심도로이다. 왕복 16차선으로, 일반국도 제48호선이다. 남쪽으로 태평로(太平路)와 이어지고 새문안길·종로·사직로와 교차한다. 도로 가운데를 지하철 5호선이 가로지르고 3호선과 1호선이 가까이 있다. (…) 역사적으로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건설할 때 너비 58자[尺] 규모로 뚫은 대로로서, 정부 관서인 6조(六曹)와 한성부 등의 주요 관아가 길 양쪽에 있다 하여 ‘육조앞’ 또는 ‘육조거리’라 불렀다. (…) 일제강점기에는 ‘광화문통(光化門通)’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다가 1946년 10월 1일 옛 중앙청 정문에서 황토현 사거리까지의 길이 500m 구간을 도로로 지정한 뒤 세종의 시호를 따서 세종로라는 명칭을 붙였다. 도로 너비도 일제강점기에는 53m로 축소되었다가 1952년 3월 25일 현재의 너비로 확정되었으며, 1984년 11월 7일 가로명 제정시 세종로 사거리에서 중앙청까지로 기점 및 종점을 변경하고 길이도 현재와 같이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세종로’) ‘나라의 중심’이 겪었던 수난들 세종로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중심성’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정궁인
‘닭장차’ 없는 세종로가 ‘진짜 세종로’다-프레시안(07.08.21)
‘닭장차’ 없는 세종로가 ‘진짜 세종로’다 [열려라, 광화문광장!②] 세종로 일대의 공간적 의미와 가치 2005년 7월 12일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는 ‘주대한민국 미합중국대사관 청사 이전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간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로써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한 미 대사관 청사가 용산구 용산동으로 옮겨가고, 세종로가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렸다. 그런데 세종로는 어떤 길인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39번지 비각(*)에서 세종로 1번지 광화문에 이르는 가로(街路)로 길이 0.6㎞, 너비 100m이며 수도 서울과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상징하는 중심도로이다. 왕복 16차선으로, 일반국도 제48호선이다. 남쪽으로 태평로(太平路)와 이어지고 새문안길·종로·사직로와 교차한다. 도로 가운데를 지하철 5호선이 가로지르고 3호선과 1호선이 가까이 있다. (…) 역사적으로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건설할 때 너비 58자[尺] 규모로 뚫은 대로로서, 정부 관서인 6조(六曹)와 한성부 등의 주요 관아가 길 양쪽에 있다 하여 ‘육조앞’ 또는 ‘육조거리’라 불렀다. (…) 일제강점기에는 ‘광화문통(光化門通)’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다가 1946년 10월 1일 옛 중앙청 정문에서 황토현 사거리까지의 길이 500m 구간을 도로로 지정한 뒤 세종의 시호를 따서 세종로라는 명칭을 붙였다. 도로 너비도 일제강점기에는 53m로 축소되었다가 1952년 3월 25일 현재의 너비로 확정되었으며, 1984년 11월 7일 가로명 제정시 세종로 사거리에서 중앙청까지로 기점 및 종점을 변경하고 길이도 현재와 같이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세종로’) ‘나라의 중심’이 겪었던 수난들 세종로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중심성’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정궁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