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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곡의 민족사, 아리랑의 품 속에!
질곡의 민족사, 아리랑의 품 속에!(ytn, 09.10.30)
-연합뉴스(07.08.28)
<한-일, 유엔서 동해 표기 놓고 설전>(유엔본부=연합뉴스) 김계환 특파원 = 27일(현지시간)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9차 지명표준화회의에서 동해 표기 문제를 놓고 한국과 일본의 설전이 재연됐다. 이날 회의에서 송영완 외교통상부 국제기구정책관은 수석대표 연설을 통해 동해 표기의 정당성을 역사적, 규범적 차원에서 접근했다. 송 정책관은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지도 가운데 근 24%가 동해를 병기하고 있어 일본해라는 표기가 국제적으로 확립됐다는 일본측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강력 반박하면서 동해 병기는 지명표준화회의와 국제수로기구의 기존 결의에도 부합되는 조치라는 점을 강조, 참가국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송 정책관은 지명표준화회의와 국제수로기구의 기존 결의는 명칭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 인근 국가들이 사용하는 명칭을 병기하는 것을 권고하고 있다면서 동해 표기 문제도 이 같은 관련 결의에 따라 병기돼야 한다는 말로 일본의 비타협적 태도를 비판했다. 이스라엘 대표단도 동해를 일본해와 같이 병기하는 것이 맞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등 우리 입장에 지지를 보냈다. 이에 대해 일본 대표단은 일본해가 국제적으로 확립된 명칭이며 한국이 동해 표기 문제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 했다. 지명표준화회의가 동해표기 문제를 논의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도 내놨다. 수단 대표단은 이번 회의에서 동해 병기 문제를 다루는 게 의미가 있느냐면서 동해 병기문제에 대한 논의 중단을 주장, 일본측에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참석국가들로부터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대표단 관계자들은 일본이 동해문제가 국제회의에서 논의되는 것 자체를 반대하고 있는 가운데 동해 병기가 추진된
자칫 ‘친일파 공원’ 될라?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 ▲ 경남 마산시 합포구 현동에 있는 장지연 묘소는 경상남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오마이뉴스 윤성효 대한주택공사 울산경남지역본부가 마산시 합포구 현동 일대에 주택지 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친일인사 묘소 주변을 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어 시민단체는 ‘친일파 공원’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주택공사는 마산 현동 일대 7만㎡(2만1000평)에 대단위 택지개발사업을 벌이고 있다. 2005년 지구지정에 이어 현재 보상절차를 밟고 있다. 앞으로 문화재 시굴조사과정을 거쳐 2008년 12월부터 공사에 들어간다. 이곳에는 임대 주택을 포함해 3000세대의 아파트가 들어선다.주택공사는 주민들의 휴식공간을 위해 한 복판에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공원 예정지 안에 묘소가 있는데, 그 주인공은 위암 장지연(언론인·1864∼1921)이다. 주택공사는 공원 안에 광장과 분수, 휴게소, 어린이 놀이터, 배드민턴장, 자연학습원, 야외무대 등을 조성할 예정이다. 장지연은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에 포함됨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친일청산’ 운동단체들은 자칫 ‘친일파 공원’이 되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장지연은 2005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에 포함되었기 때문.장지연은 1905년 <황성신문> 사설 ‘시일야 방성대곡’을 발표하고, 대표적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아왔지만, 곧 친일파로 공식 기록될 예정이다.장지연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많은 친일시와 논설 등을 썼으며, 특히 1916년 12월 10일자 2면에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를 환영한다는 ‘환영 하세가와(長谷川) 총독’이라는 제목의 친일시를 쓰기도 했다.하지만 장지연은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으며 중·고교 교과서에는 ‘우국지사’ 등으로 기술해 놓았다. 중3
[뮤지컬 리뷰] 영웅
[뮤지컬 리뷰] 영웅(서울신문, 09.10.30)
판소리 독립 열사가 40년대 필사본 발견
판소리 독립 열사가 40년대 필사본 발견(연합뉴스, 09.11.01)
“강제징용 4000명 희생된 섬에 왜 가해자 日 추모비뿐인지…”-서울신문(07.08.24)
“강제징용 4000명 희생된 섬에 왜 가해자 日 추모비뿐인지…” |마주로(마셜제도)윤설영 특파원| “아버지. 막내딸이 왔어요. 대답 좀 해보세요. 아버지….” 65년 전 백일을 갓 넘긴 막내딸은 어느덧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팬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다. 이원순(67)씨의 아버지는 일제 때 강제징용돼 1944년 마셜제도 콰잘린 섬에서 사망했다. 이씨는 목놓아 아버지를 불러보지만 코발트빛 바다는 출렁대기만 할 뿐 말이 없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주관한 ‘마셜제도 해외추도순례’가 유족 17명 이 참가한 가운데 8월17일부터 22일까지 마셜제도 마주로 섬에서 진행됐다. ●식량 끊기자 日軍 ‘식인’자행 1945년 식량보급이 끊기자 일본군이 한국인을 살육한 ‘인육사건’이 발생한 밀리 섬까지는 뱃길로 12시간. 비행기로 14시간이 걸려 이곳 마주로 섬까지 왔지만 일행은 밀리 섬을 향해 선상위령제를 지내는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바다를 향해 울부짖은 음성은 멀리 가지 못하고 국화꽃과 함께 찰랑이는 바닷물에 묻혀버렸다. 유족 대표로 추도순례에 참가한 정진영(66)씨는 “아버지는 ‘인육사건’이후 일본군에 저항하다가 총살을 당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의 흙이라도 만져보고 싶었는데….”라며 울먹였다. 윤진민(66)씨는 “그동안 오고싶어도 올 방도가 없었는데 이제 소원 하나 풀었다.”면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아버지의 영혼도 어서 모셔오고 싶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 1996년 세워진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가 관 리인도 없이 주택 마당에 나뒹굴고 있다. 마주로(마셜제도) 윤설영특파원 마주로 섬의 추모비는 유족들을 두 번 울렸다.1996년 정부의 예산을 받아 건립된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는 훼손된 채 관리자도
“강제징용 4000명 희생된 섬에 왜 가해자 日 추모비뿐인지…”-서울신문(07.08.24)
“강제징용 4000명 희생된 섬에 왜 가해자 日 추모비뿐인지…” |마주로(마셜제도)윤설영 특파원| “아버지. 막내딸이 왔어요. 대답 좀 해보세요. 아버지….” 65년 전 백일을 갓 넘긴 막내딸은 어느덧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팬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다. 이원순(67)씨의 아버지는 일제 때 강제징용돼 1944년 마셜제도 콰잘린 섬에서 사망했다. 이씨는 목놓아 아버지를 불러보지만 코발트빛 바다는 출렁대기만 할 뿐 말이 없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주관한 ‘마셜제도 해외추도순례’가 유족 17명 이 참가한 가운데 8월17일부터 22일까지 마셜제도 마주로 섬에서 진행됐다. ●식량 끊기자 日軍 ‘식인’자행 1945년 식량보급이 끊기자 일본군이 한국인을 살육한 ‘인육사건’이 발생한 밀리 섬까지는 뱃길로 12시간. 비행기로 14시간이 걸려 이곳 마주로 섬까지 왔지만 일행은 밀리 섬을 향해 선상위령제를 지내는 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바다를 향해 울부짖은 음성은 멀리 가지 못하고 국화꽃과 함께 찰랑이는 바닷물에 묻혀버렸다. 유족 대표로 추도순례에 참가한 정진영(66)씨는 “아버지는 ‘인육사건’이후 일본군에 저항하다가 총살을 당했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의 흙이라도 만져보고 싶었는데….”라며 울먹였다. 윤진민(66)씨는 “그동안 오고싶어도 올 방도가 없었는데 이제 소원 하나 풀었다.”면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아버지의 영혼도 어서 모셔오고 싶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 1996년 세워진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가 관 리인도 없이 주택 마당에 나뒹굴고 있다. 마주로(마셜제도) 윤설영특파원 마주로 섬의 추모비는 유족들을 두 번 울렸다.1996년 정부의 예산을 받아 건립된 한국인 희생자 추모비는 훼손된 채 관리자도
러 우수리스크 한인이주 기념관 개관
러 우수리스크 한인이주 기념관 개관(연합뉴스, 09.10.31)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기리며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기리며(뉴시스, 09.10.30)
[책갈피 속의 오늘]1945년 징용 한국인 귀국선 우키시마 침몰-‘동아'(07.08.24)
[책갈피 속의 오늘]1945년 징용 한국인 귀국선 우키시마 침몰 “가족을 만난다는 설렘에 배에서 이틀 밤을 버텼지. 근데 졸다가 깨어 보니 일본군들이 보트를 타고 배에서 빠져나간다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 다들 초조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 큰 배가 쩍 갈라졌어. 난 선상 꼭대기에 매달렸지만 대부분은 낙엽처럼 바다로 쓸려갔지.”일본의 공군 비행장 공사에 강제 징용됐던 강이순(85) 씨는 고국으로 향하던 1945년 8월 24일을 그렇게 회상했다. 강 씨는 구조됐지만 동료 징용자 5000여 명(생존자 주장)에겐 귀국길이 황천길이었다. 광복된 지 열흘째 되던 날이었다.일본 수송선 우키시마(浮島·4730t)호는 22일 밤 아오모리(靑森) 현 해군기지에서 부산으로 출항했다. 한국인 노동자 7000여 명(생존자 추정)의 마음은 벌써 고국에 가 있었다. 그러나 배는 이틀 뒤 교토(京都) 마이즈루(舞鶴) 항을 지나다 갑자기 폭발했다.일본 정부는 “미군이 설치한 기뢰에 걸려 배가 폭발했으며 한국인 송환자 3635명 중 524명과 일본 해군 승무원 25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그러나 한국인 생존자들의 증언은 달랐다. “부산에 도착하면 한국인에게 보복당할 거란 두려움에 일본 장교들은 미리 대피하고 폭파시킨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선체 인양 조사 결과 ‘자폭’ 가능성을 시사하는 증거도 나왔다. 기뢰로 인한 침몰이라면 선체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구멍이 뚫려야 하는데 실제론 안에서 밖으로 구멍이 나 있었던 것.일본 정부는 이런 의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 또 자국 사망자들은 전사자로 대우하면서도 한국인에겐 일체의 보상도 하지 않았다. 생존자와 유족들이 1992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