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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전 나진에는 ‘황금비’가 내렸네”-내일신문(07.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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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전 나진에는 ‘황금비’가 내렸네” 
 


일제, 1932년 길회선 종단항으로 나진 지정 … 한달 사이 땅값 ‘1천배’

1900년대 초반부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륙으로 진출한 섬나라 일본은 물류라는 한계에 부딪쳤다. 쓰루가-블라디보스토크, 시모노세키-부산, 모지-다롄이라는 기존 교역로가 러시아의 통제를 받는 노선이거나 이동거리가 길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길회선(吉會線) 철도. 중국 지린과 회령을 철도로 이어 동해로 연결하는 종단항(철도종착역과 연결된 항구)를 개발하는 계획이다.

문제는 종단항 선정. 논란끝에 일본이 길회선 부설권을 확보한지 16년째 되는 1925년에서야 청진과 웅기, 나진이 후보지로 선정됐다.

나진은 만주철도와 항만협회 기사들이 10여년 동안 함경북도 해안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천혜의 항구였다. 하지만 기반시설이 전무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인근을 샅샅이 뒤져도 불과 10여채의 인가만 있었을 뿐 도로도 제대로 없었다. 당연히 땅값은 엄청나게 낮았다. 당시 함경북도 대부호였던 김기덕이 450만평을 사들인 것을 비롯해 발빠른 투기꾼들의 먹잇감이 됐다.

1932년 8월 23일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총독은 나진이 종단항으로 최종 결정됐다고 발표했다. 곧바로 ‘땅바람’이 불어 닥쳤다. 인구 100여명에 불과한 어촌이 동양 굴지의 대항구로 개발된다는 소식과 함께 나진에 인접한 웅기로 투기꾼들이 파리떼처럼 몰려들었다. 평당 1~2전, 비싸야 20~30전하던 나진 땅값이 종단항 발표 직후 2~4원, 한달 후에는 20~40원으로 치솟았다. 무려 1000배나 급등한 것이다. 월간지 ‘동광’ 1932년 11월호 기사 ‘나진만의 황금비’를 쓴 이윤재는 “웅기 전 시가지는 ‘땅!’ ‘돈!’라는 소리로 가득찼다. … 여관마다 대만원, 거리에는 밤낮없이 눈뜨고 보기 어려운 실로 공전의 대활기!”라고 분위기를 전했다.‘웅기에 가면 팁도 100원짜리 지폐만 주고, 개도 100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당시 100원은 평범한 월급쟁이 두달치 봉급이었다.

미리 450만평을 사뒀던 김기덕은 600배의 이익을 봤다. 원주민 중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여럿 있었고 미리 땅을 팔았다는 원통함에 실성한 사람도 나왔다. 종단항 후보지에 올랐다가 최종 탈락한 청진에서는 ‘종단항 탈환’을 외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땅바람도 잠시. 1932년 11월 만주철도가 수용가를 종단항 결정 이전의 가격으로 한다고 발표하면서 땅값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1000배나 땅값이 오른데다 이미 수차례 주인이 바뀐 상황에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땅 주인들의 반발은 1935년까지 이어졌지만 결국 원안에서 조금 오른 가격으로 최종 타결되면서 나진의 땅바람은 자취를 감췄다.

당초 총독부는 나진이 인구 40만명의 대도시로 성장할 것이라고 호언했지만 광복직전까지 인구 4만명에 머물러 일제시대의 투기붐이 일장춘몽에 불과했음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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