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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언론 민들레] 부친 친일 행적도 기록한 한 친일연구가의 춘추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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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학론』 60주년, 임종국이 남긴 숙제(상)
하영 증조부 논란이 소환한 친일 미청산 흑역사
감춰진 한국문학사 1937~45년 기록 생생히 복원
복사기 없던 시절에 손으로 베껴가며 자료 수집
출판사들 전전 끝에 평화출판사에서 출간

충남 천안시 동남구 신부동 신부공원(평화공원)에 세워진 임종국 흉상과 역사의 펜을 잡고 있는 팔을 형상화한 조형물. 흉상 좌대에는 “영광의 기록만이 역사는 아니다”란 글귀가 임종국 친필로 새겨졌다. 2016년 11월 13일 임종국 선생 27주기 추모식에서 제막식이 열렸다. (임종국선생 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올해 81주년 광복절을 전후해 언론과 사이버 공간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을 빚은 주인공은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이었다. 지상파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증조부가 고종을 진료한 적이 있는 ‘4대 의사 집안’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가 증조부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 비난 여론에 휩싸였다.

증조부가 안상호란 사실이 확인되면서 그의 일가에 대한 ‘파묘’ 수준의 추적과 폭로가 잇따랐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속설이 새삼스럽게 회자하며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흑역사까지 소환됐다. “선조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증손자에게 묻는 것은 연좌제”라는 반론도 있긴 했으나 “일제강점기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집안 이야기를 자랑삼아 소개한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에 묻혀버렸다.

배우 하영이 8월 7일 KBS 2TV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해 증조부 안상호를 소개하고 있다. (KBS 화면 촬영)

결국 하영은 사과문을 발표했으나 회복하기 힘들 만큼 큰 상처를 입었으며 파문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 언론에까지 하영 증조부 논란이 보도되는가 하면 본관과 성씨를 입력하면 독립유공자와 친일파 등재 기록을 조회할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가 등장하기도 했다. 지난 6월 공포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16년 만에 부활하는 친일재산조사위원회에도 관심이 쏠려 있다.

본관과 성씨를 입력하면 독립유공자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열람할 수 있는 사이트가 등장했다. (친일파 스캐너 화면 갈무리)

『친일문학론』은 필생의 역작이자 친일 연구의 금자탑

1세기가 지난 일이 뒤늦게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된 것은 1948년 제헌국회가 꾸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와해된 탓이다. 반면 그나마 안상호의 친일 행적이 신속하게 밝혀지고 학술적 평가까지 큰 논란 없이 내려질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친일 관련 조사와 연구가 축적된 덕이다.

친일 청산 실패의 책임은 이승만을 비롯해 친일 경찰·관료·군인·지주·문인 등 수많은 사람에게 물을 수 있겠지만, 친일 조사 연구의 공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바로 임종국이다. 올해는 그의 필생의 역작이자 친일 연구의 금자탑인 『친일문학론』이 발간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친일 연구가 임종국. ‘1인 반민특위’라고 불릴 정도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연구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그때까지 한국문학사의 공백으로 남아 있던 일제강점기 말(1937~1945년) 문단 거목들의 친일 작품과 반민족 발언을 낱낱이 폭로했다. 그동안 쉬쉬하며 아무도 하지 않으려 했던 일을 해낸 것이다. 동아일보 1966년 8월 2일 자 6면 ‘화제의 작가 화제의 작품’에 실린 기사는 다음과 같다.

“창씨개명, 징병, 내선일체. 전쟁 준비에 광분하던 일제 말기는 한국 문화의 암흑기. 36, 37년까지 계속하던 한국문학사는 곧장 해방 후로 뛴다. 그동안의 공백기인 친일문학 시대는 감춰진 채 20년 동안 미정리 상태였다. 작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시인 임종국 씨가 연구 1년 만에 민족 주체성을 상실했던 친일문학을 종합 비판한 『친일문학론』을 금주에 출간한다.(하략)”

1966년 8월 2일 자 동아일보 6면에 실린 『친일문학론』 기사. ‘화제의 작품 화제의 작가’란 제목 아래 “민족주체성을 상실했던 친일문학을 종합 비판했다”고 소개했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일제 암흑기의 작가와 작품’이란 부제가 달린 『친일문학론』은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이효석, 김동환, 김팔봉, 노천명, 모윤숙, 백철, 정비석, 주요한, 채만식 등 문인 50여 명의 작품론과 함께 식민지 시대의 정차·사회적 배경, 일제 문화통치기구, 각종 친일단체 활동 등을 담고 있다.

평화출판사가 펴낸 『친일문학론』 23쪽(민족문제연구소 간 32쪽)에는 천도교청년당 간부이던 부친 임문호가 백중빈·김병제와 함께 1937년 9월 4~27일 초산, 회령, 함흥 외 35곳을 순회 강연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중일전쟁 직후 “헌신보국 희생적 각오로 시국에 당할 것”이라는 천도교청년당 결의에 따른 것이다.

여동생 임경화의 증언에 따르면 임종국이 글을 쓰다가 신문에 아버지 기사가 난 것을 보고 “친일문학 관련 책을 쓰는데 아버지가 시국 강연한 자료가 나왔네요. 아버지 이름을 빼고 쓰면 공정하지 않은데 어떡할까요?”라고 묻자 임문호는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이 빠지면 죽은 책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아들도 아들이지만 대단한 아버지였다.

1966년 8월 평화출판사에서 출간된 『친일문학론』 초판(왼쪽)과 2013년 5월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교주본. (민족문제연구소)

한일 회담 대표의 “제2의 이완용” 발언 듣고 분노

임종국은 1929년 10월 26일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동아일보 기자와 조선농민사 사장을 거쳐 천도교 주요 간부를 두루 지냈다. 항일운동으로 투옥된 전력도 두세 차례 있었다. 1933년 서울로 온 가족이 이사해 재동초등학교를 다녔다. 학업 성적이 우수한 것은 물론 글재주가 뛰어나고 기타 연주 솜씨도 뛰어났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경성공립농업학교 수의축산과에 진학했다. 그에게는 힘든 시절이었다. 예술적 감수성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겁이 많아 모내기 실습을 하다가 거머리에 물린 뒤 논에 들어가기를 꺼리는가 하면 짐승에게 주사도 놓지 못해 벌벌 떨었다.

3학년 때 해방을 맞아 경성사범학교로 옮겼으나 좌익 계열의 독서클럽 가입 권유를 받자 무서워서 그만두었다. 서울음악전문학원 첼로과에도 들어갔다가 얼마 뒤 때려치웠다. 경남 합천에서 한동안 경찰 생활을 했으나 공비를 마주칠까 봐 전전긍긍했다.

1952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집안 사정으로 중퇴했다.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품었던 판검사의 꿈이 좌절되자 또다시 방황했다. 중학 시절부터 좋아했던 문학을 가까이하던 중 이상(본명 김해경)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그의 소설 ‘날개’ 첫 구절에 나오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꼈다.

젊은 시절의 임종국.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났으나 고민과 방황의 시절이 길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임종국은 이상이 일본에서 보낸 편지까지 유족에게서 입수하는 등 곳곳을 다니며 글을 모아 1956년 4월 3권짜리 『이상전집』을 펴냈다. 소설 3편, 시 22편, 수필 6편을 담은 이 책은 이상 애호가와 연구자들의 필독서가 됐고 임종국을 유명 문필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를 계기로 이상 연구와 전집 발간 붐이 일기도 했다.

『이상전집』의 성공은 잠자고 있던 창작열도 일깨웠다. 1957년 8월 문예지 『문화예술』에 시 ‘비(碑)’를 발표해 등단했다. 이후로도 몇 편 더 실었다가 『문화예술』이 폐간되자 『사상계』에 시 ‘자화상’ 등을 선보였다. 출판사 신구문화사에 들어가 『한국시인전집』 편집 책임을 맡았고 1960년 동료 직원 이선숙과 결혼했다.

임종국이 펴낸 ‘이상전집’

그러나 임종국은 직장 체질이 아니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딱 질색이었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아내와 다툼이 잦아져 이혼에 이르렀다. 임종국은 길거리 약장사나 화장품 외판원 등을 전전했다. 그를 안타깝게 여긴 스승 조지훈의 주선으로 박노준과 함께 1965년 2월 11일부터 서울신문에 기인(奇人)들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흘러간 성좌(星座)’를 연재했다.

당시 정국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으로 뒤숭숭했다. 대학가도 연일 반대 시위로 달아올랐다. 임종국은 신문 연재에 매달려 있는 데다 아내와 재결합해 한창 가정에 관심을 쏟을 때여서 강 건너 불 보듯 하려고 했다. 그러나 협상 대표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회담을 성사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을 보고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 대학생 신분도 아니니 데모 대열에 낄 처지는 아니지만 혼자서라도 뭔가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962년 10월 20일 일본 도쿄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이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무장관과 회담하고 있다.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일본 병사의 마지막 말

일제강점기 그의 성장 과정이나 해방 후 행적을 보면 그가 민족 교육의 세례를 받았거나 항일 의식이 투철했다는 징후는 찾아보기 어렵다. 『친일문학론』 서문 격인 ‘자화상’을 보면 10대의 임종국은 “검도와 총검술을 배우고 99식 총에 대검을 찬 상급생들이 하늘만큼 장하게 보이는” 평범한 식민지 소년이었다. 17세 때 해방을 맞아서도 김구 선생이 중국 사람인 줄 알 정도로 세상 물정에도 어두웠다. 해방 정국과 전쟁 때도 신념을 위해 몸을 던지는 현실 참여형 지사나 실천적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현실 참여에 나설 결심을 굳힌 것은 20년 전 학교에 주둔하던 일본군 병사와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쟁에서 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란 물음에 임종국은 “조선이 독립해서 기쁩니다”라고 했다가 병사가 매섭게 노려보자 “그렇지만 당신네 일본이 진 것은 정말 안됐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덧붙였다. 병사는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국 광복을 위해 몸을 던진 독립운동가들은 후손까지 궁핍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친일파들은 부와 권력을 세습하며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여전히 무지해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오다 노부나가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김유신과 이순신은 이름조차 희미했다.

1948년 9월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김연수(가운데)와 최린(오른쪽)이 반민특위에 체포돼 끌려가고 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듬해 6월 6일 경찰의 습격으로 와해됐다. (국가기록원)

그러다 보니 일국의 지도자급 인사가 이완용을 자처하는 지경에 이르러 일본군 병사가 던진 말이 예언처럼 실현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임종국은 제2의 이완용을 용인한다면 제3, 제4의 이완용이나 제2의 송병준, 박춘금이 나올 수 있다고 보고 우선 문인들의 친일 행적을 폭로하기로 마음먹었다. 친일파들이 손가락질당하는 꼴을 본다면 조금은 주춤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임종국 평전』(정운현 저)에 등장하는 박노준 증언에 따르면 ‘흘러간 성좌’ 자료를 수집하던 중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현희가 보여준 책 ‘친일파 군상’(1948년 간)이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임종국은 이미 ‘이상전집’을 준비할 때 일제강점기 신문·잡지를 샅샅이 뒤진 경험이 있다. 신구문화사에서 작가명, 장르, 발표 지면과 시기, 소장 도서관 등을 기록한 카드를 만든 데 이어 서울신문 연재를 위해서도 문인들의 작품 목록과 색인을 정리해놓은 상태였다.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각 대학 도서관 등을 다니며 자료를 뒤졌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이어서 일일이 손으로 베끼거나 요약해 메모해야 했다. 고려대 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 잡지가 많아 그곳에서 살다시피했다. 학생들은 그가 도서관 직원인 줄 알고 책 대출을 부탁할 정도였다.

고대 출신 출판사 직원은 스승 ‘유진오’ 이름 보고 교정 거부

꼬박 10개월을 밤낮없이 자료 조사와 집필에 매달렸다. 서문에 토로한 대로 그는 책을 쓰면서 자신을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그의 글을 엮어 1995년 펴낸 『또 망국을 할 것인가』에서는 “『친일문학론』을 쓰기 전만 해도 이광수는 내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책을 쓰고 나니까 그런 존경심 따위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고 털어놓았다.

혼란, 반성, 문단에 대한 혐오와 회의, 각오 등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으나 기록만큼은 냉정을 유지했다. “그 모든 것이 지나간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로서 기록해둘 뿐”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우리나라 문단 거목들이 저지른 오욕의 역사를 담담하게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채워나갔다.

200자 원고지 2000장 분량의 초고가 완성된 것은 1966년 6월이었다. 그러나 몇 군데 원고를 보여줬다가 출판을 거절당했다. 임종국의 신변이나 장래를 위해 출간을 만류하는 친구도 있었다. 영어회화 교재를 펴내 톡톡히 재미를 본 평화출판사가 출판을 맡겠다고 나섰다. 허창성 평화출판사 대표의 권유로 『식민지하의 작가들』이란 제목을 『친일문학론』으로 바꾸었다.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고려대 출신인 평화출판사 직원이 원고에 고려대 교수와 총장을 지낸 유진오가 등장하니 교정을 보지 못하겠다고 뻗댄 것이다. 유진오는 임종국에게도 스승이었으나 그는 아버지의 친일 행적까지 빠짐없이 실은 마당이었다. 할 수 없이 직접 교정을 봤다.

서문과 발문도 원로나 중견 문인 가운데서는 쓸 자격이나 의사가 있는 사람이 마땅치 않은 탓인지 또래이자 후배인 소설가 서기원, 문학평론가 염무웅, 시인 박희진이 썼다. 문단은 물론 한국 사회 전반을 뒤흔들 메가톤급 폭탄이 막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초판 발간일은 7월 30일로 찍혀 있으나 실제로는 일주일 늦게 서점에 깔렸다.

<※ 2주 후에 (하)편이 이어집니다>

이희용 줌렌즈 hoprave@gmail.com

<2026-08-29> 시민언론 민들레

☞기사원문: 부친 친일 행적도 기록한 한 친일연구가의 춘추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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