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민족사랑 202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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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 관련 자료
[자료소개] 인혁당 사건 관련 자료 한승헌 변호사 1975년 4월 9일 새벽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지 20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이번 호에는 사법 살인 당한 피고인 중 한 분인 여정남의 항소심 변호를 맡았고 3월 21일 반공법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어 인혁당 피고인들과 같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으며 4월 9일 구치소 호송차에서 관련자 가족과 지인들이 오열하는 광경을 직접 목도했던 한승헌 변호사가 인혁당 1차, 2차 사건을 정리한 칼럼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 : 인혁당 사건(상, 중)」(『경향신문』 2015.4.19·4.26)을 전재한다. ―편집자주 인혁당 사건(상) 학생운동에 붉은 색칠, 1차 인혁당 사건 이른바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두 번 있었다. 1964년에 ‘1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4년에 ‘2차 인혁당 사건’이 터졌다. 1974년 사건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고도 부르며, 통상 ‘인혁당 사건’이라고 하면, 여덟 분의 억울한 형사(刑死)를 빚어낸 후자를 가리킨다. 먼저 1차 인혁당 사건부터 살펴본다. 당년 44세의 박정희 소장은 5·16 쿠데타로 민주정부를 쓰러뜨린 뒤, 민정 복귀의 공약을 어기고 군복만 벗은 채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무단통치와 대일 굴욕 외교에 반대하는 국민 각계의 저항에 부딪힌다. 그중에서도 대학생들의 움직임이 격렬했다.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집단시위와 아울러 당시 박정희가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하였다.
미나미 총독의 글씨로 새긴 목포근대역사관(2관)의 ‘팔굉일우비(1940년)’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6] 미나미 총독의 글씨로 새긴 목포근대역사관(2관)의 ‘팔굉일우비(1940년)’ ‘팔굉일우’라는 용어의 본격 등장은 중일전쟁 직후의 시점 이순우 특임연구원 불은 하나나/ 밝음은 가득하외다./ 한 낱의 생각이/ 억만의 마음을 감기고/ 구원할 것입니다.// 종은 집속에 우나/ 온 땅에 퍼집니다./ 한 낱의 곡조가/ 만 나라의 걸음을/ 어우를 것입니다.// 한 낱의 생각이/ 예부터 있고/ 한 낱의 이상이/ 기어코 올 것입니다./ 그 깊이를 모릅니다./ 그 넓이를 모릅니다,/ 그 높이를 모릅니다,/ 그 멀기를 모릅니다./ 모르도록 그 나타남이 어수선하외다.// 시방 우리는 총을 들고/ 시방 우리는 칼을 잡고/ 시방 우리는 싸우고/ 시방 우리는 문흡니다./ 그러나 나중은 총을 거두리라./ 칼을 꽂으리라./ 사랑이 다스리리라.// 혹은 웃을 것이고/ 혹은 뮐 것이고/ 혹은 막을 것입니다./ 마는 웃는 이는 놀랄 날이,/ 뮈는 이는 반 길 날이,/ 막는 이는 업델 날이/ 머지 안하외다.// 불은 하나나/ 억만 등을 켭니다./ 생각은 하나나/ 억만 구원을 이룹니다.// 한 낱의 생각이/ 예부터 있고/ 기어코 올 것이외다./ 음을 새기지 못합니다./ 뜻을 풀지 못합니다./ 아직 우리는 알기보다도/ 바랄 뿐이외다./ 우리의 아들들은 알 것이외다./ 우리의 손자들은 누릴 것이 외다.// 아직 우리는 바랄 뿐이외다./ 한 낱의 생각을./ 한 낱의 광명을.// 이것은 『삼천리』 1941년 1월호에 게재된 「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제목의 친일시이다. 여기에 나오는 ‘한 낱의 생각’이나 ‘한 낱의 이상’, 그리고 ‘한 낱의 곡조’와 ‘한
정상을 향하는 유럽 극우 vs 불나방 한국 극우
[돌려보기] 정상을 향하는 유럽 극우 vs 불나방 한국 극우 목수정 작가 한국 사회는 초유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12·3 계엄이 속전속결로 저지되고, 내란범 대통령을 국회가 탄핵했을 때, 우린 시민들의 용기와 성숙한 의식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태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체포영장을 거부하던 윤석열 수호 세력이 등장하더니, 눈덩이처럼 불어난 일군의 무리가 온라인과 거리에서 공포를 자아내며 헌정질서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구부정한 몸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어설픈 구호를 외치던 소위 어버이연합류의 보수단체에, 온라인 게임이 더 익숙해 보이는 근육질의 청년세대가 더해진 낯선 집합이 광장 전면에 등장했다. 점점 더 자극적 현실왜곡을 경쟁적으로 유포하는 우파 유튜버들과 전광훈을 대표로 하는 우파 기독교 집단을 두 기둥으로 삼은 공간 속에 그들은 서 있다. 윤석열을 지키고 빨갱이들로부터 나라를 구한다는 자신들의 숭고한(!) 명분 아래 그들은 각자 내면에 응축된 분노를 폭력으로 드러낸다. 그들 안엔 얼마든지 몸을 던져 표출할 수 있는, 뜨겁게 달궈진 증오와 울분이 있다. 탄탄한 자본과 신도 그룹을 가진 기독교 단체, 내란으로 블루오션을 만난 극우 유튜버들이 그들이 일찍이 갖지 못하던 그럴싸한 명분을 차곡차곡 제공해 주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사실이건 아니건, 분노를 부추겨줄 연료만 된다면 무비판적으로 수용, 더 대범한 폭력의 양분으로 삼는다. 처음엔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던 국민의힘도 이제 그들의 무리에 온전히 가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한국 사회가 숱한 피의 대가를
광장의 뜨거움 이어갈 ‘시민사회처’ 설립을 제안한다
[돌려보기] 광장의 뜨거움 이어갈 ‘시민사회처’ 설립을 제안한다 방학진 기획실장 “마을은 민주주의 학습장”이라고 말한 토크빌이 지금의 한국을 보았다면 “광장은 민주주의 학습장”이라고 수정했을 것이다. 윤석열 파면 이후 한국 민주공화정을 지켜낸 광장의 에너지를 어떻게 하면 지속,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를 놓고 논의가 한창이다. 이미 지난 3월 10일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현재는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과 야 6당은 연석회의를 통해 공동 입장문을 발표했다. 첫째, 내란수괴 윤석열을 즉각 파면하고 처벌하기 위해 시민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둘째, 내란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처벌, 내란의 완전한 종식을 위해 흔들림없이 연대하겠습니다. 셋째, 내란의 재발방지를 위해 시급하고 필수적인 법제도 개선을 위해 협력하겠습니다. 넷째, 내란 세력의 심판과 재집권 저지를 위해 힘을 모으겠습니다. 다섯째, 차별과 혐오 정치를 배격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고 민의를 반영하는 정치를 함께 구현하겠습니다. 여섯째, 윤석열의 파면 이후에도 시민 참여가 보장된 가운데 민주주의 회복과 평화 실현, 사회대개혁을 이루기 위해 협력하겠습니다. 일곱째, 이상의 공동의 결의를 이행할 방안에 대해 후속 협의를 진행하겠습니다. 국민의힘을 제외한 원내 정당들이 참여한 원탁회의도 4월 15일 “사회대개혁, 기본권 강화, 지방분권 등 국가 미래 과제를 대선 공약으로 추진하고, 차기 정부 국정과제로 실천”할 것을 선언했다. 이 두 개의 약속만 보면 대선 후 광장의 에너지, 즉 시민사회의 목소리와 요구가 국정에 반영될 가능성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이러한 전망은 2017년 촛불시민들의 힘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이선홍의 친일 인생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연구소 글방 21] 이선홍의 친일 인생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권시용 선임연구원 도쿄에 박춘금이 있다면 오사카에는 이선홍이 있다. 식민지 시기를 살았던 조선 사람들 가운데 친일파가 있었다. 일본의 식민통치를 긍정하고 거기에 협력하는 데서 삶의 방향을 찾았던 사람들이다. 개중에는 이른바 ‘식민 본국’ 일본에서 이름을 드높인 친일파도 있었으니, 박춘금과 이선홍이 첫손에 꼽힌다. 제주 출신 고권삼은 ????오사카와 조선인????(1938)이란 책에서 “박춘금 씨는 도쿄에서 상애회를 조직하고 이선홍 씨는 오사카에서 조선인협회를 조직했다. 동과 서에서 각각 내선융화(內鮮融和) 운동을 시작했다”고 서술했다. 박춘금과 이선홍 두 사람을 도쿄와 오사카 내선융화 운동의 선구자로 평가한 것이다. 이렇게 도쿄를 무대로 상애회라는 친일단체를 지휘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눈에 들려고 애썼던 박춘금이 있다면, 오사카에는 조선인협회를 이끌었던 이선홍이 있었다. 이제 오사카 내선융화 운동의 핵심 인물, 친일파 이선홍의 친일 인생을 따라가 본다. 우선 이선홍의 친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몇 장면을 살펴보자. <장면1> 1931년 6월 일본 오사카에 있는 조선인단체인 ‘조선인협회’는 매우 이색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바로 ‘결혼매개소(結婚媒介所)’라는 것이다. “내선융화의 열매는 제2세로부터”라는 구호 아래 조선인과 일본인을 결혼시키자, 진정한 내선융화는 민족 간 결혼에서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운동이었다. <장면2>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이봉창 의거가 일어났다. 신년을 맞아 군대를 사열하고 돌아가던 일왕을 향해 청년 이봉창은 폭탄을 던졌다. 조선인이 살아 있다, 부당한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을 위해 뛰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린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에 살던 친일 인사들은 깜짝
12월 3일 내란의 밤에 국회로 한달음에 달려간 최화식 장군
[인터뷰] 12월 3일 내란의 밤에 국회로 한달음에 달려간 최화식 장군 방학진 기획실장 홍범도 흉상 철거 시도와 급기야 12·3 내란을 계기로 우리나라 사관학교 교육 내용이 궁금했다. 육사·해사·공사·간호사관학교의 『교육과정집』을 통해 우리 헌법 전문에서 명시하고 있는 독립과 민주주의 교육이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는지 검토했다. 그 결과 네 곳의 사관학교 모두 『한국사』 교과목이 1학년 교양필수로 지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를 한 학기 동안 교육하는 까닭에 독립운동사 이수 시간은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또한 민주주의 관련 과목은 해군사관학교와 간호사관학교에만 각각 전공필수, 교양선택으로 개설되어 있어 민주주의 관련 과목을 이수하지 않은 채 졸업하는 사관학교 생도가 태반임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사관생도들에게 수준 높은 민주시민 교육 이수가 필수불가결하다. 더불어 고위급 예비역 장군들도 같은 고민을 해야 한다. 때마침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예비역 장성들의 시국성명이 뉴스에 보도되었다. 1월 7일 ‘내란수괴 윤석열의 체포 구속 및 파면을 요구하는 대한민국 예비역 장군 시국성명’이 나왔다. 12·3 내란 이후 예비역 장군들의 첫 시국선언이었다. 성명에는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낸 김병주 국회의원과 황인권 전 제2작전사령관, 김도균 전 수방사령관을 비롯해 황기철, 부석종, 김도호, 김태성, 진호영, 이재각, 최화식, 김사진, 하영재, 김기노, 이진용, 김용식, 문원식 등 육군·해군·공군 예비역 장성들이 동참했다. 이중에서 12월 3일 비상계엄 발표 직후 용인 자택에서 여의도 국회로 달려간 최화식 장군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비상계엄을 TV에서 보면서 ‘이거 미친 거
역사기행 전문 여행사 후라(HURA) 출범
[초점] 역사기행 전문 여행사 후라(HURA) 출범 그동안 우리 연구소는 독립운동과 과거사와 관련된 다양한 국내외 역사기행을 추진해왔다. 이를 보다 체계적이고 정기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안중근 의사 순국 115주기인 3월 26일 관계자들이 연구소에서 발기인 총회를 열고 역사기행 전문 여행사 ‘HURA’ 설립을 결의했다. 여행사 명칭인 ‘HURA’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외쳤던 ‘Corea Hura’에서 가져왔다. 안 의사는 공판과정에서 만국공통어인 에스페란토어로 만세를 외쳤다고 밝힌 바 있다. 역사기행 ‘HURA’는 4월 중으로 모든 등록절차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사업 준비에 들어간다. 주력사업으로는 독립운동, 일제잔재, 일제 침탈사, 강제동원 등 한일과거사, 한국현대사 등과 관련한 국내외 답사가 있으며, 유적지 실태파악과 DB 구축, 표석 설치, 정보 서비스 등 기록과 기억, 보존을 위한 학술탐사도 병행할 예정이다. 매년 10회 내외의 해외답사를 진행할 계획이며 올해는 6월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기획답사 1탄 〈장정과 조선 혁명가〉 역사기행을 시작으로 4차례의 해외답사를 진행한다. 많은 참여와 성원을 부탁드린다.
부민관 폭파 의거 80주년 특별전시 ‘조문기의 시한폭탄은 아직 터지지 않았다’ 개막
[초점] 부민관 폭파 의거 80주년 특별전시 ‘조문기의 시한폭탄은 아직 터지지 않았다’ 개막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은 4월 15일 부민관 폭파 의거 80주년 기념 특별전시 ‘조문기의 시한폭탄은 아직 터지지 않았다’의 개막식을 열었다. 이날 개막식 행사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윤경로 관장(전 한성대 총장)과 여러 상근자들을 비롯해 이학영 국회 부의장,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도 참석했다. 특히 조문기 지사의 사위인 김석화 님과 의거의 동지였던 유만수, 강윤국 지사의 아들인 유세종, 강경옥 님도 함께해 더욱 뜻깊은 자리였다. 윤경로 관장은 개막식 축사에서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사장이던 조문기 지사의 애국 의지 덕분”이었다면서 “생전에 독립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던 조문기 지사를 기리는 것은 친일청산을 너머 민주사회 건설과 남북통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우리 연구소 제2대 이사장이자, 1945년 7월 24일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폭파의거의 주역인 독립운동가 조문기의 삶과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총 3부로 구성된 전시는 화성에서 태어난 조문기의 어린 시절과 일본에서의 활동, 부민관 폭파 의거, 광복 이후 친일청산을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한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우리 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특별전에 조문기 지사가 직접 쓴 회고록 초고인 「조국(祖國)이 뭐길래」와 각종 원고와 서신, 연구소 소장자료인 「일한합병기념엽서」, 「부민관 사진엽서」 등 총 44건 320점을 대여했다. 이번 전시는 화성시 향남읍에 위치한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에서 오는 8월 31일까지 열린다. • 김현지 대외협력실 활동가
충남지역위원회, 충남 야5당 및 시민단체들과 함께 제106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 가져
[초점] 충남지역위원회, 충남 야5당 및 시민단체들과 함께 제106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 가져 우리 연구소 충남지역위원회(위원장 최기섭)는 천안민주단체연대회의,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야5당(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진보당·기본소득당·정의당) 충남도당과 함께 4월 11일 천안 남부오거리 석오 이동녕 선생 동상 앞에서 ‘제106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을 공동주최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100여 명이 참석했으며 윤경로 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은 개회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부인하는 세력들이 등장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이동녕 선생 고향인 천안에서 열리는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이 올바른 역사 인식과 자주독립 정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념식은 당초 이동녕기념관에서 개최 예정이었지만 기념관을 관리하는 천안시(시장 박상돈)는 “인근 마을 주민들 민원 발생 등으로 이동녕 선생 추모행사를 제외한 모든 외부 행사의 대관이 불가하다”고 통보하여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확인 결과 이미 여러 행사가 이동녕기념관에서 개최되고 있었다. 따라서 천안시의 불허 결정은 국민의힘 소속인 박상돈 시장의 방해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이에 대해 문진석 국회의원(민주당 충남도당 위원장)은 “내년부턴 기념관에서 행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기념식을 처음 제안한 충남지역위원회는 앞으로도 여러 역사 관련 행사를 지역의 정당·사회단체들이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충남지역위원회는 3월 25일 천안NGO센터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