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지금도 조문기는 독립전쟁 중이다
방학진 기획실장
일제는 1907년 7월 31일 밤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이어 9월 3일에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만들었다. 이 법은 총포 및 화약의 제조·판매·운반·교환·소유를 금지하면서 시행령을 통해 그 단속 방법까지 치밀하게 규정하였다.
- 화약은 모두 불태우고(燒棄) 만약 불태울 수 없으면 물속에 버려서 나중에 건져서 말려도 사용할 수 없게 할 것.
- 탄환도 화약과 같이 처리할 것.
- 총포류는 병기로 사용하지 못하게 처치하기 위하여 변형·절단 등 적당한 방법을 집행할 것.
- 활(弓)·화 살(矢)·칼(刀)·창류는 불태울 것(燒棄).
- 고대 갑옷과 투구(甲冑)는 군부에 송부할 것.
- 변형 또는 소기한 금속 본질은 신분이 확실한 자에게 매각할 것.
- 군아(郡衙)에서 이전에 모아둔(募置) 것으로서 포군이 사용한 병기도 앞과 같이 정리할 것.
한마디로 한반도 전역을 무장 해제시키려 했다. 산포수 대장이었던 홍범도가 본격적으로 의병 투쟁에 나선 계기도 바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 제정이었다.
“단군 이래로 포수의 총을 빼앗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소. 총을 포기하는 포수는 포수가 아니오.”(소설 <범도>에서)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총과 폭탄을 사용한 독립투쟁 즉 의열투쟁은 진공 상태에서 소리를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현재 국가보훈부 공훈록에 등재된 독립운동가 18,258명을 운동 계열별로 보면 3·1운동(34.86%)–국내항일(17.22%)–의병(15.00%)–만주방면(13.81%) 순이다. 의열투쟁 계열은 133명으로 1%도 되지 않는다. 의열투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선 우리에게 익숙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경우는 모두 국외에서 전개한 의거이다.
국내에서 진행된 의열투쟁은 1905년 8월 서울에서 김일제·기산도·박경하 등이 을사오적 이근택·이지용·박제순·권중현·이완용 처단을 계획하다 체포된 의거, 1909년 11월 이재명·박태은·김정익·이동수·전태선·이응삼·오부원 등이 이완용·이용구 등 매국 역적을 주살하려 한 의거, 의열단원 박재혁과 최수봉의 각각 부산경찰서와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 강우규 등이 서울역에서 사이토 총독을 폭사시키려 한 의거, 1926년 창덕궁 금호문 앞에서 사이토 총독 암살을 시도한 송학선 의거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국권 상실에 당하여 자진 순국한 경우도 의열투쟁에 해당한다.
의열투쟁 중에서도 총이나 폭탄 등 무기를 사용하여 일제 식민 지배의 심장부인 서울 사대문 안에서 전개된 경우는 1921년 9월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 의거, 1923년 1월 일경을 상대로 1대 1,000의 시가전을 벌인 김상옥 의거, 1926년 12월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거뿐이다.
나석주 의거 이후 히로히토 일왕이 즉위하고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식민지 조선은 전후방이 따로 없는 국가총동원 체제에 빠져든다. 이제 서울은 고사하고 국내에서의 의열투쟁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한 점에서 우선 1945년 7월 ‘부민관 폭파 의거’는 나석주 의거 이후 19년 만에 서울 한복판에서, 일제의 고관대작과 거물 친일파를 대상으로,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선 폭파 의거의 장소인 부민관(府民館)은 요즘으로 말하면 세종문화회관에 해당한다.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최고급 공간으로 1937년 이후에는 대규모 친일 행사(대회, 공연 등)가 단골로 열리던 곳이다.
조문기와 같은 화성 출신으로 알려진 홍난파는 1937년 9월 부민관에서 일본군의 중국 바오딩(保定) 점령을 축하하고 ‘황군(皇軍)’에 감사하자는 목적으로 ‘바오딩 함락 축하 황군 감사 대음악회’에서 <정의의 개가>(正義の凱歌), <공군의 노래>(空軍の歌)를 작곡해 발표했으며 공연 수익금은 황군 위문금으로 헌납했다.
둘째, 부민관 폭파 의거에서 타깃으로 삼은 대상은 조선 총독 아베,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를 비롯해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을 두 번이나 지낸 최고 거물 친일파 박춘금이었다. 박춘금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자신이 조직한 친일단체 상애회 회원 300여 명을 동원해 시체 처리 등으로 일본에 환심을 산 자이다.
셋째, 부민관 폭파 의거는 당초 계획했던 대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무산시키는 데 성공했고 세 명의 의거 주인공들은 감쪽같이 사라져 그 누구도 검거되지 않고 해방을 맞이했다. 즉 부민관 폭파 의거는 의열투쟁의 끈질김, 과감함, 치밀함을 동시에 보여준 쾌거였다.

그런데 부민관 폭파 의거가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의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해방 이후 친일파 득세와 독립운동 폄하라는 정치·사회적 현실 때문일 것이다.
“이들 친일파가 해방된 후 현재에도 횡행하는 것은 유감으로 생각합니다.”(부민관에 정의의 폭탄 가면 벗은 3 청년 용사, <자유신문> 1945년 11월 13일)
박춘금은 해방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포 사회에서 원로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해방 후 17년 동안 독립운동가는 보훈 대상에서 방치되었고 1962년에 되어서야 겨우 보훈 대상자가 되었다. 현재 국가보훈부는 1961년 8월 군사원호청으로 시작된 것에서 보듯 대한민국의 보훈은 군인이 최우선이었다. 그리고 광복 50주년이 지나서야 겨우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1996년 1월 1일)이 제정된다. 김구의 동지이자 임시정부의 마지막 비서장으로 효창원에 안장된 동암 차리석(1881~1945)의 아들인 영조 씨는 백범이 친일파에 의해 암살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車씨 성에서 위아래 획을 뺀 申씨 성으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부민관 폭파 의거가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시민에게 알려진 데는 의거의 세 주인공 중 조문기의 역할이 컸다. 일제강점기 조문기는 독립운동가였다면 해방 이후 조문기는 친일청산 운동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하자 “친일청산은 바로 오늘의 독립운동이다”라면서 자택인 수원 성균관대역에서 연구소가 있던 서울 청량리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수시로 방문해 상근자들을 격려하였다.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는 연구소에 누가 될 수 있다면서 광복회 경기도지부장직을 사임했다. 대전 국립묘지에 있는 조문기 묘비문은 그의 지향을 웅변처럼 말하고 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김구 선생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해 더욱 빛나는 장면은 분단 정부를 반대하며 1948년 5.10 총선거에 불참하고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가 열리는 평양에 가기 위해 기꺼이 38선을 넘은 순간이다.
유일한 최고의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뿐이다. 소련식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공산 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 해도 독점 자본주의로 무산자를 괴롭힐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자기 상품의 시장화하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194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조문기 역시 1948년 5월 5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북한산에서 봉화 시위를 기획하다가 미군정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때 조문기는 조사 과정에서 여러 고문을 당했는데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은 얇게 자른 대나무를 손톱 아래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독립이 되었어도 그 독립은 친일파들의 독립이요, 해방이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도 조문기는 분단된 나라를 만들겠다고 목숨 바쳐 독립운동한 것이 아니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실제로 해방 이후 반공을 앞세운 분단·독재정권에 아부하거나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시대정신을 외면한 채 대접받기에만 골몰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광복군 출신인 장철(1922~2009)은 광복회원들의 예우와 복지를 확대하겠 다면서 광복회장에 당선된 이후 2002년 8월 언론 인터뷰에서 “친일청산을 이제 그만 하자”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문기는 강하게 비판하면서 ‘광복회 자체의 광복운동이 필요하다’고 일갈했다.
장철씨는 친일청산보다도 생존 독립운동가와 유족들의 복지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공언하며 광복회원들을 현혹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복지도 중요하고 그들에게 국가가 더 많은 예우와 연금혜택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시대 포졸보다도 몇 백배는 더 잔인하고 무서운 일제 헌병과 군인들을 상대로 싸운 사람들이다. 예우나 복지문제와 친일청산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굳이 지금보다 더 나은 예우와 복지혜택을 받고 싶다면 한 가지 지름길이 있다. 그것은 생존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지금이라도 당장 친일청산운동과 함께 이 사회의 온갖 부조리한 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면 된다. 독립운동가 사회에서는 ‘선친일(先親日) 후반일(後反日)’은 용납이 되도 ‘선반일(先反日) 후친일(後親日)’은 절대 용납되지 않고 있듯이 광복회와 그 회원들 모두는 선대의 항일운동을 이어받아 친일청산운동에 나서는 것만이 역사 앞에 떳떳한 길인 것이다.(조문기, 『월간 우리』 2002년 10월호)
조문기의 친일청산 활동은 글과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1999년 10월 민족문제연구소 제2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10년 동안 친일파 기념·미화·우상화 작업이 전국적으로 자행되었다. 이 시기 한국 사회는 자본 중심의 몰가치적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쳤고 DJP연합 정권은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5년 내내 추진했으며 각 지자체는 관광 활성화를 명분으로 무분별하게 친일인사 기념사업을 들고 나섰다. 돈만 된다면 친일이 뭐가 문제냐는 식이다. 이에 조문기는 반역사적 기념사업을 막기 위해 전국으로 동분서주하였다.
이들은(친일음악인) 오늘날 한국의 민족예술을 대표하는 인사로 의연히 존경받고 있으며 오히려 추모와 기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친일음악인이 민족음악인으로 둔갑하고 문화훈장을 받으며 이들을 위한 기념사업이 국민의 세금으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니 이 무슨 망발인가!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친일음악인의 죄상이 백일하에 밝혀진 지금에도, 또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정부, 지방자치체, 그 외 단체들이 이러한 기념사업을 강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신이 썩어도 단단히 썩은 것이다. 과거 친일의 죄상도 단죄되어야 하지만 그 죄상을 알고도 눈감고 이를 왜곡 미화하는 지금의 현실이 더욱 문제이다. 역사의 왜곡은 또 하나의 씻을 수 없는 범죄이다.(조문기, 『굴욕의 노래, 친일음악』,2002년 8월,발간사에서)
일제강점기 친일보다 해방 후 친일청산에 눈감은 현실이 더 문제라는 인식은 친일문제를 지금의 시대적 과제로 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조문기의 역사인식은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1929~1989)의 그것과도 상통한다.
“아일랜드는 300년 만에 압박을 벗었고 유대 민족은 2천 년을 나라 없이 떠돌아다녔으나, 그들은 민족의 전통을 상실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과 35년으로 이 지경까지 타락했었다는 것은 단순히 친일자들의 수치로만 끝날 일이 아니다. 민족 전체의 수치로서, 맹성은 물론 환골탈태의 결사적 고행이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온존된 일제의 잔재는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민족의 정기를 좀 먹었고, 민족의 가치관을 학살하였다. 이 흙탕물을 걷어내지 못하는 한 민족의 자주는 공염불이요, 따라서 민족의 통일도 백일몽이다.”
“친일한 일제 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의 광정이 없는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이다.”
조문기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은 이후 『친일인명사전』편찬이 궤도에 올랐다. 1999년 8월 ‘친일인명사전 편찬 지지 전국 대학교수 1만인 선언’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확인하고 2001년 12월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출범을 통해 편찬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 주도로 국회에서 『친일인명사전』편찬예산 5억원을 전액삭감하자 분노한 시민들은 2004년 1월 불과 열흘 만에 목표액 5억 원 전액을 모금했고 이후에도 계속 성금이 쌓여 7억여 원에 달하는 편찬 기금이 조성됐다. 『친일인명사전』은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정치,경제,사회, 문화, 예술 등 각 분야 교수·학자 150여 명의 편찬위원을 포함하여 전문가 180여 명이 집필에 참여했다.
문헌 사료 수집과 정리, 색인, 입력, 검수 작업에도 석·박사 연구자 80여 명이 투입됐다. 편찬 과정은 우여곡절, 간난신고 그 자체였다. 물리력을 동원해 민족문제연구소를 압박하는 극우 세력의 총공세는 물론 친일파 후손들의 고소까지. 드디어 반민특위가 해체된 지 60년, 친일문제 연구의 개척자라 할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이 간행된지 45년, 임종국선생의 유지를 계승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된 지 18년, 편찬위원회가 출범하여 본격적으로 편찬사업에 착수한 지 8년 만인 2009년 11월 서울 용산구 효창원 백범 묘지에서 친일파 4,389명의 죄상을 담은 ‘친일인명사전 발간 보고대회’가 열렸다. 이 보고대회 역시 사연이 많았다. 당초 대관 장소는 숙명여대 내 아트홀이었지만 발간 보고대회 이틀 전에 갑자기 대관 취소 통보를 했고 보고대회 당일 아트홀 앞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은 결국 인근의 백범 묘지로 장소를 옮겨 보고대회를 열었다. 전화위복이었다. 오히려 대관 취소는 친일세력들이 얼마나 강고하게 우리 사회에 실존하는지 여실히 보여준 장면이었다.
초대 이만열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에 이어서 편찬위원장을 맡아 발간을 이룬 역사학자 윤경로는 『친일인명사전』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역사적 과제를 시민들의 힘으로 해결한 사례는 없었습니다. 국가가 외면한 미해결의 과제를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역사정의실현의 단서를 열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의미 있는 성과라고 봅니다. 둘째, 한국 근현대사 금기의 영역이 최초로 공개됨으로써 최근 만연하고 있는 퇴행적 역사인식에 경종을 울리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셋째, 우리 내부의 부끄러운 역사를 고백하고 용기 있게 진실을 대면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일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끝으로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 발간 보고대회’ 현장에 조문기는 없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1년 9개월을 앞둔 2008년 2월 5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한 것이다. 조문기의 장례 기간 동안 숭례문이 불타는 참사도 발생해 조문객들의 더더욱 비감에 젖었지만 오히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구성원들은 기필코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완수해 고인의 영전에 헌정하자고 다짐했고 결국 그 약속은 지켜졌다.
조문기 사후 광복회 화성시지회의 노력으로 2014년 모교인 화성 매송초등학교에 조문기 동상이 시민모금으로 세워졌고 매년 7월 24일쯤에는 부민관 폭파 의거 현장인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서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2023년과 2024년도 기념식은 서울시의회 측이 장소 대관을 거부했다. 급기야 국가보훈부는 2023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1945년 7월 24일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친일파 박춘금이 전쟁 수행 찬성을 위해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하자 여기에 참석하는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폭탄의거를 주도한 강윤국(1926~2009)·유만수(1921~1975) 선생을 선정했다”고 밝히면서 조문기만을 제외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항의가 이어지자, 국가보훈부는 “미군정 포고 2호 위반으로 1년 6개월 형 받은 것을 확인해 심사 진입 단계에서 제외했다”면서 “광복 이후 수형사실이 있는 경우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에서 제외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해명은 곧 거짓과 엉터리라는 것이 드러났다.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금고형을 선고받은 이선호(1904~1950) 선생을 2021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전례도 있으며 나아가 미군정 포고령을 대한민국 법률과 동일한 권능을 가진 법령으로 간주하는 것은 위헌·위법이라는 대한민국 사법부 판례와 대통령 소속 진실화해위원회의 유권해석과도 상충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국가보훈부가 조문기를 제외한 속내는 당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의 인터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원봉을 예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한민국을 역사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종의 ‘사생아’란 잘못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민족문제연구소’ 같은 곳이다.(<중앙일보> 2023년 7월 20일)
조문기의 배우자이자 동지였던 장영심(1931~2010)은 삼일절, 광복절이면 대통령, 도지사의 선물이 도착했지만 동시에 이사할 때마다 동네 통반장이 찾아와 동향을 물어보곤 했다고 한다. 독립투사를 감사하기 위해 친일파들이 촘촘히 막아 놓은 연좌제의 흔적이었다.
정부와 경기도가 개최하는 삼일절, 광복절 행사에는 불참하고 거리의 투쟁을 선택했던 조문기였다.
“‘하나도 투쟁, 둘도 투쟁. 지금도 나는 독립운동 중이다. 독립이라 말하지만,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다’는 남편의 평소 입버릇이 귓가를 맴돌곤 합니다.”(장영심, <중부일보> 2008년 8월 14일)
“나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가만의 역사가 아니다. 미래를, 후손을 위한 운동이다. 과거사 청산은 친일파 청산부터 첫발을 내디뎌야 하고, 친일파 청산이 안 된 지금의 한국사회는 여전히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조문기 어록에서)
지금도 전국에는 수많은 조문기가 여전히 독립전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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