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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日 “영주귀국 사할린동포도 청구권소멸”

2010년 3월 22일 318

日 “영주귀국 사할린동포도 청구권소멸”(연합뉴스, 10.03.22)

친일인명사전을 읽으며

2010년 3월 18일 554

– 목사들에게 친일인명사전을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 이 글은 <동양일보> 2월 17일자에 실린 글로 전재를 허락해 준 청주 나눔교회 김창규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 엮은이 주 김창규 목사 새해 들어 친일인명사전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지난 역사의 100년을 돌아보는 해이기 때문에 반성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국가의 수치를 겪었던 과거를 떠올려 좋을 것은 없지만 2010년 경인년 새해 백호의 기상으로 살 것을 다짐하며 읽었다. 당시 필자가 세상에 태어났다면 난 분명히 독립운동가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 무장투쟁을 통하여 제국주의 강도 일본을 물리치는 데 앞장을 섰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끄러운 친일역사를 기록 한 책, 친일인명사전을 읽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필자가 목사이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 맨 첫 장에 이름을 올린 갈홍기(葛城弘基 1904~1989)목사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연성국장. 감리교 목사이다. 1904년 4월 14일  경기도 강화에서 ▲ 김창규 목사 태어 났다. 1925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3월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그해 6월 미국에 유학하여 개렛신학교를 졸업하고 노스트웨스턴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1934년 6월 시카고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33년 1월 흥사단에 가입하였고 1938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1937년 6월 발생한 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어 교수직을 상실했으나 1938년 6월 기소유예처분을 받은 뒤 관련자들과 함께 친일 단체인 대동민우회에 입회한다는 전향 성명서를 내고 교수직에 복직하였다. 1938년 7월부터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본부 간사 겸 경성지부 상임감사로 활동했다. 이 때 부터 그의

[충남] 아산 ‘조명암 가요제’ 잡음-한국일보(06.09.19)

2006년 9월 29일 329

[충남] 아산 ‘조명암 가요제’ 잡음   시민단체 “친일인사 중단 마땅” 예총 “예정대로 추진” 한국예총 충남 아산시지부가 친일작사가로 알려진 조명암(趙鳴岩 1913∼1993)을 기리는 가요제를 추진해 물의를 빚고 있다.19일 예총 아산시지부에 따르면 22일부터 열리는 제18회 설화예술제 기간에 아산 영인면 출신 시인이자 작사가인 조명암을 ‘제1회 조명암 가요제’가 열린다. 조명암은 꿈꾸는 백마강, 선창, 알뜰한 당신, 바다의 교향시, 무정천리, 목포는 항구다, 선창 등을 작사했다.그러나 그는’아들의 혈서”지원병의 어머니”결사대의 처’등 청년들에게 일본군 입대를 독려하는 가사를 많이 쓴 것으로 드러나 지난해 발표된 제1차 친일인사 공연 예술인 부문에 포함됐다.‘지원병의 어머니’에서 그는 ‘나라에 바치자고 키운 아들을/ 빛나는 싸움터로 배웅을 할 제……/지원병의 어머니는 자랑해주마’라며 일본을 찬양했다. 또 1943년 발표된 ‘혈서지원’에서는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놓고 성수만세 부르네’라는 등 노골적인 친일가사를 썼다.가요제 개최 사실이 알려지자 민족문제연구소와 지역 시민단체는 “친일 행위가 분명한 상황에서 그를 기념하기 위한 가요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연구원은 “경남 진주시의 남인수 가요제도 친일 행적으로 중단됐다”며 “아산시나 예총에서 조명암의 행적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일부 지역예술계 인사들은 “이념과 정치적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예술적인 측면을 바라 볼 필요가 있다”며 “정치적 접근보다 순수 예술인으로 봐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예총 아산시지부 관계자는 “가요제 추진과정에서 조명암의 친일행적에 대한 논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가요제 일정이 잡혀있는 상황이라 계획대로

1회로 끝나는 조명암 가요제-대전일보(06.09.19)

2006년 9월 29일 335

1회로 끝나는 조명암 가요제   [牙山]‘1회 조명암 가요제’가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한국예총 아산지부(지부장 이만우)는 오는 22일 신정호국민광광단지에서 18회 설화예술제 개막식을 가진 뒤 첫 행사로 ‘조명암가요제’를 개최할 예정이나 아산시 영인면 출신의 시인이자 작사가인 조명암(趙鳴岩·1913∼1993)의 친일 행적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확산되고 있는 것. 19일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조명암의 친일 행적은 너무나 뚜렷하다”며 “친일 인사를 기념하기 위한 가요제가 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해 8월 발표한 1차 친일인사명단에 조명암(본명 조영출)의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조명암은 ‘아들의 혈서’, ‘지원병의 어머니’, ‘결사대의 처’, ‘2500만의 감격’ 등 청년들에게 지원병으로 나설 것을 독려하는 노래가사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아산시민모임 김지훈 사무국장은 “조명암의 친일행적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이뤄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가요제를 연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현충사가 있는 충절의 고장에서 친일인사로 알려진 사람을 기념하는 가요제를 연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지적했다. 한국예총 아산지부 이만우 지부장은 “선생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며 “이미 예선을 거쳐 본선대회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대회를 취소할 수는 없으며 추후 가요제 명칭을 변경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조명암은 1941년 일본 와세다 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동방의 태양’으로 등단했다. 생전에 ‘선창’ 알뜰한 당신‘ 등 500여곡의 대중가요를 작사했다. 1948년 월북, 북한에서 교육문화성 부상, 평양 가무단 단장, 조선문화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재출간

2010년 3월 17일 629

독립투사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 회고록 편집부   이 책을 구술한 허은 여사는 1915년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만주로 망명한 허씨 일문을 따라 만주 영안현으로 이주했다. 열여섯 살이던 1922년 고성 이씨 집안으로 출가하여 1932년 시조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서거로 귀국할 때까지, 석주 선생과 시아버지 동구 이준형 선생, 그리고 남편 이병화를 뒷바라지하며 만주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온갖 고난을 함께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역사책에서는 접할 수 없는 생생한 회고담을 남겨 1995년 7월『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제목으로 초간되었다.  이 책에는 매년 8월 29일 국치일에 학교 운동장에 모여 망국을 주제로 한 연극을 보고 국치일 노래를 목 놓아 불렀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열여섯 나이에 영안현 철령허에서 화전현 완령허까지 아버지와 시아버지를 모시고 남편과 함께 이천팔백 리를 꼬박 열이틀 걸려 시댁에 도착한 일, 이청천 신숙 황학수 이범석 등 당대의 지사들이 참석한 서로군정서 회의에 대한 목격담,  석주 선생이 임시정부 국무령을  사임하고 상 ▲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표지 해에서 돌아올 때 변복·변장하여 왜경의 감시망을 뚫고 무사히 도착한 일화, 석주 선생 서거 후 귀향길에 중국군 패잔병들에게 갖은 곤욕을 치른 끝에 선생의 유해를 화전현에 가매장하고 밤길을 타고 어렵게 귀환한 비사 등 독립운동 명가의 역경을 짐작하게 해주는 눈물겨운 증언들이 낱낱이 담겨있다.  1932년 허은 여사는 ‘고택제향(古宅祭香)에 호화반석(豪華磐石)’ 같은 고성 이씨 가문의 종부(宗婦)로서 ‘이역만리(異域萬里)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다가 안동 임청각으로 귀향했지만, 가산은

일제 강점기 ‘민초들 삶’ 생생히-한겨레신문(06.09.28)

2006년 9월 29일 346

일제 강점기 ‘민초들 삶’ 생생히 김제 아리랑 문학관서 일기·사진·유품 등 전시회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재현해 일제 강점기 민초들의 삶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전북 김제 아리랑문학관과 민족문제연구소는 다음달 2일부터 29일까지 김제시 부량면 아리랑문학관에서 ‘징게 맹갱 외에밋들’ 전시회를 연다. 부제는 ‘조정래의 아리랑과 식민지 조선인의 삶’이다. 딸림행사로 다음달 12일 오후 3시30분 김제시청에서 조정래의 문학강연도 있다.제목 ‘징게 맹갱 외에밋들’은 ‘김제·만경 너른 들’이란 뜻으로 〈아리랑〉의 주무대인 호남평야를 가리키는 이 지역 토속어다. 이번 특별전시는 누대에 걸쳐 민족의 쌀창고 구실을 해왔던 호남벌과 그 땅의 민초들이 일제의 악랄한 수탈 속에서 어떤 선택과 대응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역사적 사건과 함께 그려냈다.소설을 전시자료로 재현하기 위해 농촌지도자를 꿈꾼 청년의 일기, 추억을 담은 졸업앨범, 교과서에 쓴 낙서, 무수히 자행된 학살 기록사진, 징용·징병 피해자들이 남긴 유품 등 다양한 실물자료를 사용했다(사진). 여기에다 설치미술, 캐릭터, 연대순으로 재구성한 패널 및 영상 등을 통해 현실감을 높였다.전주/

“독도를 공동 소유 하자는 것인가”

2010년 3월 17일 448

[기고] 김점구 ‘독도수호대’ 대표 김점구 독도수호대 대표 최근 요미우리신문이 한국의 법원에 ‘당시 보도는 허위사실이 아니다’는 취지의 준비서면을 제출하면서 2년여가 지난 지금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발언이 쟁점화 되고 있다.그러나 주요언론은 하나같이 침묵하고 있다. 2년여 전 ‘사실무근’이라는 청와대의 입장과 요미우리신문이 인터넷 판에서 삭제했다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것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소송으로 이어질 정도로 국민들의 우려가 계속되고 있는 마당에 언론이 국민의 우려와 궁금증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2008년 7월15일 요미우리신문은 “G8확대정상회의에 참석한 후쿠다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표기하겠다’고 통보했고,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의 국민소송단 1800여명은 요미우리신문을 상대로 손해배상과 정정 보도를 청구하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했다. 요미우리신문의 보도내용을 조금만 살펴보면 심각성을 충분 히 짐작할 수 있다. 오보여부와 상관없이 일본해상보안청의 독도해역조사, 시마네현의 ‘죽도의 날’ 제정,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독도명기 등 일본의 독도침탈 시도 이상의 폭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요미우리신문 보도는 사실무근”이라는 한마디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요미우리신문 보도의 진위여부가 중요한 이유는 첫째 발언당사자인 총리와 대통령이 한일양국정부의 대표이고, 극명하게 비교되는 발언 때문이다. 후쿠다 총리는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상대는 독도영유권 문제의 상대국인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이 대통령은 독도의 주권국인 대한민국의 통치권자로서 독도영유권에 대해 일관되고 명료한 우리의 입장을 밝혀야

‘독도 광고’ 재외동포 통해 확산중

2010년 3월 15일 337

‘독도 광고’ 재외동포 통해 확산중(연합뉴스, 10.03.15)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2006년 9월 29일 949

    민족문제연구소   [편집자 주]  문화방송의  대표적 시사교양 프로그램이었던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1999년 ‘제주 4.3’을 시작으로 2005년까지 꼭 100편을 제작하고  종영을 고했다. 해방 후 한국 사회는  이 책의 제목처럼  침묵을 강요당한  질곡의 역사였다. 그러나 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방송에서 금기의 영역이었던 숱한 진실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하나 둘 시청자들 앞에 펼쳐졌다.  이  책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을  직접  담당한  PD들이 방송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공중파의  찰나성을  극복하기 위한 작업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진실을 알리는 데는 항상 남 모를  용기가 따르는 법. 그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아래는 책의 목차와  제1회  임종국 상을 수상한 정길화 PD의 머리말과 목차이다. 한편 출판 기념회는  10월 13일(금) 오후 7시  한국노총 회관 1층에서 열린다.   목차>>>   1부 억압과 폭력의 나라 불행했던 도시 빈민의 역사, 무등산 타잔|김동철 버림받은 인권, 삼청교육대|채환규 군대 가서 죽은 내 아들아|이규정 버림받은 애국심, 북파공작원|이규정 5공의 3S 정책, 스포츠로 지배하라|강지웅 2부 풀리지 않는 역사 속 미스터리 땅에 묻은 스캔들, 정인숙 사건|김동철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쏘았는가|장형원 김형욱은 어디로 사라졌는가|이규정 친일파, 그들만의 면죄부|정길화 대한민국에는 강남공화국이 있다|유현 3부 헤어나지 못한 굴레, 레드 콤플렉스 분단의 너울, 연좌제|정길화 아름다운 민족주의, 조용수|김환균 잊혀진 대학살, 보도연맹|이채훈 대한반공청년단의 비밀|김환균 김일성, 항일 무장투쟁은 진실인가|곽동국 4부 미국과 일본, 당신들의 대한민국 섹스 동맹, 기지촌 정화 운동|이모현 1994, 불바다 발언과 전쟁 위기|최승호 소파,

검찰은 강정구교수에 대한 재수사 결정을 즉각 철회하라

2006년 9월 29일 598

    민족문제연구소 친일 조병옥 명예훼손 검찰진술서 내려받기     최근 대검찰청은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사자(死者) 명예훼손’등 혐의에 대한 재수사를 서울중앙지검에 명령했다. 강정구 교수는 서울대에서 열린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주최 토론회에서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친일파의 후예들이 정치사에 발붙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민주당 조순형의원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열린우리당 신기남의원을 예로 들었다가  조의원에  의해 고소당한 바 있다. 우리는  대검이 왜 서울중앙지검과  고검이 무혐의 처리한 사건에 대해 굳이 재수사를 지시했는지 의혹의 눈길을 거둘 수 없다. “강교수의  발언이  학문적 영역에서 이루어졌는지 검토가 필요하다”는 모호한 이유는 이례적인 이번 조치에 대한 설명으로는 사뭇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7월 재보궐 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로 복귀한 조순형 의원이 법사위원이 된 이후 내린 눈치 보기 결정이라는 세간의 억측이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정황임을 검찰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대검의 이번 조치를 주목하는 까닭은 사건 처리 결과에 따라서 강정구 교수 개인은 물론 수많은 근현대사 연구자와 학술단체의 학문 활동이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념적 다양성’은 물론 ‘학문적 관용’의 폭이 유난히 좁은 우리 사회에서  강정구 교수는 거의 학문 활동을 포기해야 할 지경까지 내몰리고 있다. 보수 정치권과 언론의 태도는 그야말로 현대판 마녀사냥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철저한 조사와 검증을  거친 후 내려진 무혐의 결정이 7개월이나 지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