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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민단체 “日 징용피해자 공탁금 환수하라”
광주시민단체 “日 징용피해자 공탁금 환수하라”(연합뉴스, 10.04.20)
“神社는 천황 이데올로기 강압의 구심점 역할”
“神社는 천황 이데올로기 강압의 구심점 역할”(한국일보, 10.04.26)
이완용 후손 묘 훼손된 채 발견-연합뉴스(06.08.29)
이완용 후손 묘 훼손된 채 발견 (고양=연합뉴스) 우영식 기자 = 대표적 친일파로 을사오적중 하나인 이완용의 장남 부부 묘가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됐다.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 정동일(40)씨는 최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야산에서 여러 조각으로 깨진 상석만 남은 이완용 장남 이승구와 부인 임걸귀의 묘를 발견했다고 29일 밝혔다.발견 당시 묘는 봉분이 사라져 아카시아 나무가 자라고 가로 120cm, 세로 90cm 크기의 상석만 남아있었으며 상석도 파손돼 묘 주인을 알리는 글씨만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정 위원은 “문헌에 의하면 이완용의 장남인 이승구는 당대의 절세 미인이었던 부인 임걸귀와 아버지 이완용의 불륜사실을 알고 자살했으며 이완용의 호적에서도 제외됐던 불행한 인물”이라고 밝혔다.정 위원은 이어 “묘가 발견된 곳은 한 때 `원수골’로 불렸으며 해방 직후 이완용의 친일행각에 성난 마을 주민들이 불을 지르는 등 묘를 마구 훼손했다”며 “주민들은 무덤까지 파헤치려 했으나 강회를 두껍게 만들어 실패했다”고 전했다. 한편 이승구 부부의 묘가 발견된 향동동 일대는 이완용이 소유했던 2필지를 비롯, 7개 필지 2만5천평 임야 등이 후손에게 상속됐으나 1990년대 후반 손자에 의해 서울 모 대학 동창회 발전기금으로 기증됐다.이후 이완용의 증손자가 이 대학을 상대로 토지반환소송을 제기하는 등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으나 소를 취하해 현재는 대학 소유로 남아 있다.
이완용 후손 묘 훼손된 채 발견-연합뉴스(06.08.29)
이완용 후손 묘 훼손된 채 발견 (고양=연합뉴스) 우영식 기자 = 대표적 친일파로 을사오적중 하나인 이완용의 장남 부부 묘가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됐다.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 정동일(40)씨는 최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야산에서 여러 조각으로 깨진 상석만 남은 이완용 장남 이승구와 부인 임걸귀의 묘를 발견했다고 29일 밝혔다.발견 당시 묘는 봉분이 사라져 아카시아 나무가 자라고 가로 120cm, 세로 90cm 크기의 상석만 남아있었으며 상석도 파손돼 묘 주인을 알리는 글씨만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정 위원은 “문헌에 의하면 이완용의 장남인 이승구는 당대의 절세 미인이었던 부인 임걸귀와 아버지 이완용의 불륜사실을 알고 자살했으며 이완용의 호적에서도 제외됐던 불행한 인물”이라고 밝혔다.정 위원은 이어 “묘가 발견된 곳은 한 때 `원수골’로 불렸으며 해방 직후 이완용의 친일행각에 성난 마을 주민들이 불을 지르는 등 묘를 마구 훼손했다”며 “주민들은 무덤까지 파헤치려 했으나 강회를 두껍게 만들어 실패했다”고 전했다. 한편 이승구 부부의 묘가 발견된 향동동 일대는 이완용이 소유했던 2필지를 비롯, 7개 필지 2만5천평 임야 등이 후손에게 상속됐으나 1990년대 후반 손자에 의해 서울 모 대학 동창회 발전기금으로 기증됐다.이후 이완용의 증손자가 이 대학을 상대로 토지반환소송을 제기하는 등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으나 소를 취하해 현재는 대학 소유로 남아 있다.
고창고보 재학중 징병당한 아버님께
고창고보 재학 중 강제징용 당한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 [故 서정복 선생에게 올리는 아들 홍관의 글 ] 아버지!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지 어느덧 6년이 되고 어머니 돌아가신 지도 3년이 되나 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기일이 되면 다같이 모악산 기슭의 부모님 산소에 모여 성묘를 하고 우리의 어린 시절과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기도 하고 아쉬워 하기도 한답니다. 아버지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여 기승을 부리던 1922년에 태어나셨습니다. 고창고보를 다니시던 중 1942년 같은 나이의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다고 했지요. 그러나 고등학교에 다니던 아버지의 운명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습니다. 일제는 1941년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지만 1942년 6월 5일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미군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부터 지원병제를 도입해서 조선 청년들을 전쟁으로 내몰던 일본은 궁지에 몰리자 1942년에는 강제징병령을 ! 공포하였고, 뻔뻔스럽게도 조선인도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원래 1922년생이시던 아버지는 호적 신고가 2년 늦게 된 관계로 징병 대상으로 통고를 받으셨다고 하지요. 결혼하여 아들 딸을 두고 있던 고등학생에게 나가면 다 죽는다는 태평양 낯선 곳으로 끌려가는 것은 말 그대로 죽으러 가는 길이었을 겁니다. 그 공포감은 지금 우리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한 도인을 만났다고 하셨지요. 그 도인은 술법을 공부해서 새로 변하면 일본 헌병이나 순사가 잡으러 와도 달아날 수 있다고 했다지요. 그래서 아버지와 같이 징병에 가게 된 사촌과 함께
임헌영 소장, 현대불교문학상 수상
평론 ‘법정 수필에 나타난 생태적 상상력’, 시상식 5월1일 조계사 민족문제연구소 문학평론가인 우리 연구소 임헌영 소장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이 주최하고 현대불교문인협회와 계간《불교문예》가 주관하는 제15회 현대불교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수상작은 ‘법정 수필에 나타난 생태적 상상력’이며, 시상식은 5월1일(토) 오후 3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서울 지하철 종각역 2번출구, 조계사 안)에서 열린다. ▲ 임헌영 소장 이 상은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치는 중견급 문인을 대상으로 시, 시조, 소설, 평론 등 4개 부문에 걸쳐 수상자를 선정해 오고 있는데 역대 주요 수상자로는 고은, 최하림, 정희성, 한승원, 김성동, 최인호, 전상국, 김원일, 조정래, 윤후명, 오정희, 김홍신, 권영민, 염무웅 등이 있다. 아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초청장이 뜹니다
이완용 후손 묘 훼손된 채 발견-연합뉴스(06.08.29)
이완용 후손 묘 훼손된 채 발견 (고양=연합뉴스) 우영식 기자 = 대표적 친일파로 을사오적중 하나인 이완용의 장남 부부 묘가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됐다.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 정동일(40)씨는 최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야산에서 여러 조각으로 깨진 상석만 남은 이완용 장남 이승구와 부인 임걸귀의 묘를 발견했다고 29일 밝혔다.발견 당시 묘는 봉분이 사라져 아카시아 나무가 자라고 가로 120cm, 세로 90cm 크기의 상석만 남아있었으며 상석도 파손돼 묘 주인을 알리는 글씨만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정 위원은 “문헌에 의하면 이완용의 장남인 이승구는 당대의 절세 미인이었던 부인 임걸귀와 아버지 이완용의 불륜사실을 알고 자살했으며 이완용의 호적에서도 제외됐던 불행한 인물”이라고 밝혔다.정 위원은 이어 “묘가 발견된 곳은 한 때 `원수골’로 불렸으며 해방 직후 이완용의 친일행각에 성난 마을 주민들이 불을 지르는 등 묘를 마구 훼손했다”며 “주민들은 무덤까지 파헤치려 했으나 강회를 두껍게 만들어 실패했다”고 전했다. 한편 이승구 부부의 묘가 발견된 향동동 일대는 이완용이 소유했던 2필지를 비롯, 7개 필지 2만5천평 임야 등이 후손에게 상속됐으나 1990년대 후반 손자에 의해 서울 모 대학 동창회 발전기금으로 기증됐다.이후 이완용의 증손자가 이 대학을 상대로 토지반환소송을 제기하는 등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으나 소를 취하해 현재는 대학 소유로 남아 있다.
‘한국농업 근현대화 100년’ 기념사업을 반대한다
민족문제연구소 최근 농림부와 농촌진흥청이 수많은 예산을 들여 ‘한국농업 근현대화 100년’ 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업이 정부 당국자들의 안일한 자세와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우려와 함께 개탄을 금할 수가 없다. 농업 근현대화 100년의 출발을 일제가 한국농업을 장악하고 수탈하기 위해 1906년 수원에 설치한 권업모범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100주년을 기념하는 농촌진흥청 인터넷 홍보물에는 농촌진흥청의 전신이 권업모범장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명시하고 있고, 대회장인 농림부장관과 공동준비위원장인 농촌진흥청장은 인사말에서 1906년 권업모범장의 설치가 우리의 근대농업의 시작이었음을 당당히 밝히고 있다.권업모범장이 어떤 기구인가? 1906년 일제가 한국을 식량기지화 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일본품종의 보급과 이식을 위해 법령까지 만들어 설치한 기구였다. 수원을 택한 것도 이토 히로부미가 농사 지도기관 설치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각 지역을 실사케 한 결과였다. 1907년 한국정부에 이양되었다고는 하나 경영방침은 통감부의 지침을 그대로 따랐고 핵심구성원도 거의 일본인이었다. 일제가 한국을 완전 강점한 뒤에는 조선총독부 산하 식민지 농정을 담당하는 핵심 기구로서 일제 농업수탈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관련기사 식민지 수탈기구가 한국농업의 모태라고?(오마이뉴스, 06.08.23)[내생각은] 정부가 `일제 농업` 사은 행사를 펼쳐?(중앙일보, 06.08.23)[단독]500억원대 ‘농업박물관’ 짓는다고?(세계일보, 06.08.28)‘한국농업 근현대화 100년’농촌진흥청, 기념사업 개최(서울경제, 06.08.29)‘한국농업 근대화’가 일제의 ‘농업수탈 덕’?(한겨레신문, 06.08.30)‘일제 식량수탈 기지’출범일이 한국농업 근대화 100주년 기점?(경향, 06.08.30)일제식민지 수탈기구가 한국농업 모태?(시민의신문, 06.09.05) 이러한 일제 수탈기구를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버젓이 농촌진흥청의 전신이라고 내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한국 근현대농업 100년의 역사적
친일인명사전의 의미
배수찬 울산대 교수 지난 2월 일본을 방문하여, 재일 언어학자 이연숙 교수님의 소개로 도시샤대학의 한 일본인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두 시간 정도 환담을 했는데, 한국어에 능숙해서 일본말을 한 마디도 쓰지 않고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연구실 책장에서, 발간된 지 얼마 안 되는 <친일인명사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분은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주로 사학자들이 집필한 것이니까, 아마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평하셨다. 학자의 양심에서 나오는, 사정을 잘 아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씀이었다. 일본의 연구자가 친일인명사전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는 데서 나는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충격받을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식민지 시기 한국사를 전공하고, 한국 내의 식민지 근대화론 논란에 정통한 학자다. 식민지사 연 구자로서 이 사전을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선행연구 업적을 빠뜨리는 일은 학자의 태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우리 사정을 더 잘 알고 있다는 데 대한 두려움과 함께, 이를 큰 자극으로 삼게 되었다. 어수선한 시국으로 이제 잊혀져 가지만, 작년 말 친일인명사전이 나오면서 우리 사회에 또다시 친일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다. 이제 논란은 정치 영역으로 확대되어 학자의 손을 떠난 듯한 느낌까지 든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문학사 연구자로서, 논의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간 것에 우려를 느끼던 참이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친일인명사전은 우리 사회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심각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이고, 우리는
‘한국병합 100년’ 특집에 눈길
日 NHK ‘한국병합 100년’ 특집에 눈길(연합뉴스, 10.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