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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코노미톡뉴스] 韓·日 정부도 못한 ‘유해발굴·평화교류’ 이뤄낸 ‘보통사람들’
유해발굴부터 오늘날 평화교류까지 이뤄낸 ‘시민연대’ 일제 강제노동 문제 해결 나선 ‘동아시아공동워크숍’ [박정우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1945년 광복 이후 70년이 지난 2015년. 한·일 양국이 시작조차 못한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해 봉환이 동아시아 시민들에 의해 이뤄졌다. 한국·일본·대만·중국 시민 등으로 구성된 ‘동아시아공동워크숍’과 일본 홋카이도 지역사를 연구하는 ‘소라치민중사강좌’가 연대해 조선인 희생자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한 것이다. 홋카이도 곳곳에 잠들어 있던 유해 115구는 열도를 종단하고 해협을 건너 마침내 서울시청 광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후 서울시립묘지에 안치됐다. 정부가 추진하지 못한 일을 자발적으로 해낸 건 다름 아닌 동아시아 시민들이었다. 1998년부터 연대를 시작한 이들은 동아시아공동워크숍(공동워크숍)이라는 이름을 짓고 강제노동 희생자 유해 발굴과 관련한 기록을 보존하며 꾸준히 협력과 교류를 이어왔다. 그렇게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들은 70년 만에 고국 땅을 밟게 됐으며, 이후 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공동워크숍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공동워크숍은 ‘겨울 워크숍’을 개최해 다시 한번 각국 시민 간 교류의 장을 열고 동아시아 역사 발굴 운동의 향후 방향성을 논의했다. 취재진은 그 현장에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발자취와 각국 시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970년대 홋카이도 기타미 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 ‘민중사 발굴운동’의 영향을 받아 1976년 후카가와 지역 시민을 중심으로 ‘소라치민중사강좌’가 탄생했다. 이 민중사 발굴운동은 홋카이도 슈마리나이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게 됐다. 슈마리나이에 위치한 절인 광현사에서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패가 발견됐고 이후 1980년대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첫 유해
[교육언론 창] 친일파가 만든 ‘교가’ 틀어주는 초등교원 양성대학 6곳
친일인명사전 살펴봤더니…서울·경인·전주·청주·춘천 교대와 한국교원대 교가 논란 일제 식민 통치에 항거한 3.1절 106주년을 맞아 한 교사가 국립 초등교원 양성대학인 전국 10개의 교육대(교대)와 한국교원대의 교가를 살펴본 결과, 6곳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간 친일파가 교가를 작사, 작곡한 사실을 확인했다. ‘미영 격멸가’ 지휘한 김성태 씨가 만든 교가들 임정훈 교사(연구공동체 ‘교육의 품:격’ 연구위원)는 최근 페이스북에 “3.1절을 맞아 국립 교대와 국립 한국교원대 교가를 작사, 작곡한 친일파들을 일일이 확인했다”면서 친일파나 친일 혐의를 가진 이들이 만든 교가를 사용하는 교대 이름을 공개했다. 임 교사가 올린 내용과 교육언론[창]이 3일 추가 확인한 내용을 종합하면, 최소한 전국 교대와 교원대 가운데 6곳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간 친일파가 만든 교가를 예비교사들에게 틀어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인교대, 전주교대, 청주교대, 춘천교대, 한국교원대의 교가는 모두 김성태 씨(1910~2012)가 작곡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김 씨는 1941년 9월 즈음, 조선총독부가 내선일체와 농업보국을 실천하기 위해 만든 문화영화 ‘농업보국대’에서 작곡과 지휘를 맡았다. 1942년 1월에는 라디오로 방송된 ‘아세아의 힘’, ‘미영 격멸가’, ‘기쁘다 마닐라 함락’, ‘태평양행진곡’ 등을 부르는 경성방송혼성합창단을 지휘했다. 같은 해 5월에는 ‘국민음악 보급의 정신대’로 활동하기 위해 중진 음악가들로 조직된 경성후생실내악단 창립 멤버로 참여해 작곡과 편곡을 담당했다. 김 씨는 해방 뒤 1946년 2월, 경성음악학교(구 서울대) 교수로 지내다 1976년 서울대에서 정년 퇴임했다.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서울교대 교가 작사자는 조재호 씨(1902~?)다.
[MBC] 외교독립운동사 연구라더니‥혈세로 ‘이승만 전기’ 편찬?
앵커 내일은 3.1절입니다만, 우리 정부가 최근 발간한 연구보고서를 입수해봤더니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서술이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부분이 확인됐습니다. 왜그랬을까요?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했던 내용이 대폭 반영된 걸로 보입니다. 양소연 기자의 단독보도입니다. 리포트 “(이승만의) 얼굴에는 아름다운 정신이 빛나고 있으며…인내심이 그의 표정의 부드러움에 나타나 있었다.” 이승만 전기의 한 대목 같지만, 사실 외교부가 공식 발간한 연구 보고서에 인용 서술된 내용입니다. ‘그동안 간과·저평가된 해외 외교 독립운동을 재조명’한다며 작년 말 발간한 500쪽의 보고서. 전체의 5분의 1에 달하는 95쪽에 걸쳐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연설 활동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신사는 이승만 박사가 강연으로 방문한다면 무료 교통편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한 어린이가 이승만에게 ‘사랑을 담아’라고 쓴 쪽지와 함께 25센트를 건넸다”는 등 연설 활동과 관련된 미담을 빼곡하게 담았습니다. 보고서에는 ‘이승만’이란 이름이 723번이나 언급되는데, 김구, 안창호, 서재필 등 다른 대표적 독립운동가의 외교독립운동이 언급된 횟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이승만의 소소한 활동들, 아주 작은 연설들, 아주 작은 기고문들까지 다 일일이 표를 만들어서… 너무 과도하게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승만 위인전에 가까운…” 반면 논란은 간략하게 넘어갔습니다. 1910년대 후반, 이승만이 국제 연맹에 한국을 통치해달라고 요청한 ‘위임통치 청원’ 사건, 또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된 사유 등은 제대로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신주백/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상해에 와서 전혀 임시정부를 지도하지 않았다’라는 거예요. 미국이라는
[연합뉴스] ‘계엄 아지트’ 된 임시정부 부주석 집터 ‘안가’…”복원해야”
‘삼청동 대통령 안가’로 쓰여…독립운동가 김규식 손녀 “역사교육의 장 만들고파” (서울=연합뉴스) 최원정 기자 = “아이고, 이거 완전히 막아놔서 안에는 들여다볼 수도 없네.” 제106주년 3·1절을 사흘 앞둔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대통령 안전가옥(안가) 앞. 독립운동가 우사 김규식(1881∼1950) 선생의 손녀 김수옥(82)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마지막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로 파견돼 국제사회에 독립을 호소하는 등 외교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김규식이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으로 납북될 때까지 5년간 머무르며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이끌었던 ‘삼청장’은 현재 ‘삼청동 안가’로 활용되고 있다. 검찰·경찰의 압수수색에 대비한 듯 안가 입구에는 미니버스 한 대가 장벽처럼 세워져 있었다. 버스 틈 사이로 간신히 본 안가도 김 회장의 기억 속 삼청장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김 회장은 “한옥이 하얀색 양옥으로 바뀌고 가족들과 오르락내리락했던 계단도 없어졌다”며 “할아버지는 고아로 자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애틋하셨는데 놀다가 자전거에 부딪히자 손을 붙잡고 걱정하시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떠올렸다. 삼청장은 본래 친일파 민영휘의 막내아들인 민규식의 별장이었다.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정세가 급변하자 민규식은 귀국한 김규식에게 이곳을 쓰도록 내줬다. 김규식은 삼청장에서 몽양 여운형 등과 함께 좌우합작을 논의하며 민족통일국가를 꿈꿨다. 1948년 백범 김구와 함께 북한의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협상을 제안하는 서한을 쓴 장소도 이곳이었다. 삼청장은 1950년 김규식이 납북돼 평안북도 만포진에서 숨을 거둔 뒤 한동안 방치됐다. 이후 2007년 국고로 넘어간 뒤 공매로 민간에
[한겨레] 윤봉길 유해 몰래 묻었던 자리마저, “테러리스트 묘비 철거하라” 소송전
“윤봉길 의사가 묻힌 이곳에서 일본은 한때 일본군 전몰자 기념행사에서 나온 쓰레기를 태우기도 했어요.” 지난 27일 월진회 일본 지부장인 박현택씨는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노다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비(묘비) 자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일제가 윤 의사를 총살한 뒤 산길의 좁은 통행로 옆 평평한 땅 아래 유해를 묻는 ‘평장’을 했다”며 “일본군이 ‘오사카에서 사형시켰다’는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윤 의사가 묻힌 곳인 줄 모르고 무수히 많은 사람이 이 자리를 밟고 지나다녔을 것”이라고 말했다. 좁은 오솔길 한쪽에 두 평(6.6㎡)이 채 안 돼 보이는 크기의 암장지적비에는 ‘사내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글귀가 윤 의사 친필로 새겨져 있다. 이날 현장을 찾은 재일동포와 일본 시민들은 비석 앞에 초를 밝히고 헌화했다. 윤 의사 암장지 위로는 1930년대 상하이사변 당시 일본 전몰자들을 위한 육군묘지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지’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세워져 있다. 일제는 윤 의사를 총살한 뒤, 자국이 벌인 침략전쟁 과정에 숨진 전몰자 묘지 아래 햇볕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 윤 의사 유해를 비밀리에 암장했다. 이어 그 자리를 오랜 기간 쓰레기 소각장처럼 써왔던 것이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일본군 핵심 간부 등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 상하이 파견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데이지 등이 사망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 우에다 겐키지 제9사단장(중장), 시게미쓰
[오마이뉴스] ‘가짜 독립운동가’ 김정수 봉분 제거… 파묘는 미완
[단독] 서울현충원 “유족, 이장비 요구 “… 독립투사 후손 “우리가 이장비 내겠다” ‘가짜 독립운동가’ 김정수 봉분이 제거됐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광복절 ‘가짜 독립유공자’로 판명 나 서훈이 취소된 지 6년여 만의 조치다. 3일 서울현충원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에 “봉분 평탄화를 했다”며 “그간 (김정수의) 유족에게 ‘이장을 해야 한다’고 계속 공문도 보내고 연락도 했지만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아 지난해(2024년) 12월 10일 최종적으로 봉분을 제거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현충원 관계자는 “파묘는 아니”라면서 “여전히 그 자리에 유골은 남아있다. 관련 규정이나 조항이 없어 봉분만 제거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장을 유족이 계속 거부한 것’이냐는 질문에 “(김정수 유족이) 이장 비용을 달라고 요구했다”면서 “그런 규정(가짜 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장 지원)은 없기 때문에, 수차례 이장을 하라는 요구에도 무응답 해 봉분 평탄화를 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오마이뉴스>가 2일 가짜 독립운동가 김정수의 묘를 직접 확인한 결과, 서울현충원 설명대로 독립유공자묘역 181번 묘 봉분은 완전히 사라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거된 봉분 아래에는 여전히 김정수의 유골은 남아있어서 빛바랜 안내문은 그대로 세워진 상태다. “동 묘소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나, 서훈 공적이 거짓임이 확인되어 서훈이 취소(2081.8.15.)된 김정수의 묘소로 현재 유가족에게 원외 이장을 요청한 상태임을 알려드립니다.” 가짜 독립운동가 밝혀낸 진짜 독립운동가의 아들 김세걸 가짜 독립운동가 김정수, 일제강점기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조직 참의부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박정희 정권 당시인 1968년
민족사랑 2025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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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일본어판 나와
☞ 다운로드: [보도자료] [보도자료]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일본어판 나와 106주년 3·1절을 앞두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일본어판을 도쿄 유마니쇼보 출판사에서 E-Book으로 출간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7년부터 재일조선인단체를 조사·연구해 지난 2021년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을 펴낸 데 이어 3년 만에 일본어판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이 E-Book은 대형 서점 배급망을 통해 일본 내 주요 대학과 도서관에 보급되어 재일조선인 사회를 탐구하는 기초 학술자료로 활용된다. 『재일조선인단체사전』은 일제하 재일조선인의 조직활동을 처음으로 집대성한 전문서적이다. 독립운동단체에서부터 친일단체, 일제의 관제조직에 이르기까지 무려 551개 단체의 연혁과 활동을 망라한 대저작이다. 설립 목적으로는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사상·교육·노동·친목·상조 단체로 구분되며, 실행 주체에 따라서는 청년·학생, 노동자, 여성, 실업자, 임차인 단체 등으로 분류된다. 이렇듯 분야나 성격이 다른 다양한 단체의 다면적인 활동을 1차 자료에 근거하여 수록했다는 점이 이 사전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것이다. 즉 재일조선인 사회의 일면을 부조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단체의 형태로 나타난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다각적이고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데 이 사전의 강점이 있는 것이다. 2022년에는 『재일조선인단체사전』이 대한민국학술원이 주관하는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되어 그 성과를 객관적으로도 평가받았다. 『재일조선인단체사전』은 한일 시민사회와 연구자·활동가들이 한일공동편찬위원회를 구성해 1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공동작업을 진행해 얻은 소중한 결실이다. 일본어판의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히구치 유이치 전 고려박물관장과 미즈노 나오키 교토대 명예교수의 손길이 미쳤다. 이들과 함께 공동편찬위원장을 맡았던 김광열 광운대 명예교수 또한 민족문제연구소 일본어판 편찬팀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사전의 번역과
[오마이뉴스] 새로운 일본의 일원이 되자고 외친 친일파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명준 국민들이 정치를 바꾸고자 일어설 때마다 수구세력이 분탕질을 하며 외세에 호소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2016년 촛불혁명 당시의 맞불집회장을 장식했던 성조기가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장도 물들이고 있다. “미국에 기도하자”는 발언까지도 나오고 있다. 한국의 수구세력은 나라의 주인으로 자처하면서도 자신감이 결여돼 있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결과다. 그래서 급할 때면 나라 밖을 향해 읍소하곤 한다. 이런 현상은 약 100개의 민란이 빈발해 ‘민란의 세기’로 불리는 19세기가 저물어가면서 짙어졌다. 삼남 지방에서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진 민란은 수구세력의 자신감을 떨어트렸다. 이는 그들을 외세 의존적 세력으로 만들었다. 민중의 궐기로 시작돼 거의 성공할 뻔했던 1882년 임오군란과 1894년 동학혁명이 외세의 잔치로 변질된 것은 수구세력의 자신감 결여가 낳은 결과다. 단독으로는 대중을 상대할 수 없었던 지배층과 수구세력은 1882년에는 청나라의 힘을, 1894년에는 일본의 힘을 끌어들여 민중의 에너지를 꺾었다. 그 같은 외세 의존적 태도는 3·1운동 때도 나타났다. 시위대를 상대로는 경고장을 날리고, 일본을 상대로는 ‘어떻게 해보시라’며 간청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참에 한국을 일본의 일원이 되게 해달라고 일왕에게 청원한 김명준도 그중 하나다. 김명준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1월 18일 협성구락부의 후신인 국민협회의 창립에 가담했다. 그는 회장 민원식의 다음 자리인 공동 총무가 됐다. 이 국민협회가 1931년에 발행한 <국민협회 운동사>는 김명준 등이 3·1운동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알려준다. <국민협회 운동사>의 내용 일부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