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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문형배 재판관과 어른 김장하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하기 123일 만에 내란수괴 윤석열이 파면되었습니다. 4월 4일, 윤석열 파면을 선고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직무대행은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김장하 선생의 도움으로 재판관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장하 선생은 민족문제연구소와도 인연이 깊습니다. 김장하 선생님과 같은 진정한 어른과 시민들 덕분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할 수 있었고, 올바른 역사를 시민들에게 알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이 되어 사회대개혁을 함께 해나갑시다.
[오마이뉴스] 내가 유골함 들고 도지사실 찾아간 이유
민간인 학살 피해자 매장지 조사와 유해 발굴… 그 난항에 대하여 2014년, 백발이 성성한 70·80대 노인들이 충북도청 정문에 늘어섰다. 야외 기자회견장에 펼쳐진 현수막에는 “충청북도는 유해발굴 실시하라”고 적혀 있었다. 마이크를 쥔 이제관 한국전쟁 충북연합 회장은 “유해 시굴을 통해 아곡리 사건이 밝혀졌다. 이제라도 충청북도는 유해발굴을 전면 실시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유골함 들고 도지사실로 기자회견에는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 팀장이자 한양대 교수 노용석 박사가 참여했다. 그는 2014년 6월 23일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에서의 유해 시굴 결과를 설명하면서 지방자치단체가 유해발굴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기자회견 후 필자는 유골함을 들고 이시종 충북도지사를 면담하기 위해 도청 현관으로 갔다. 도청 현관에는 충북도청 직원과 청원경찰들이 유족들을 막아섰다. 한국전쟁 충북연합은 아곡리 유해 시굴 결과를 토대로 그해 8월 18일 충청북도에 충북 도내 4곳에 대한 유해 발굴과 관련해 도지사 면담을 신청했다. 하지만 도지사는 묵묵부답이었다. 면담 요청 2개월 뒤인 2014년 10월 23일 유족들이 도청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도지사 면담을 시도헸다. 하지만 도청 직원들과 청원경찰들에게 유족들은 ‘늙은 데모꾼(?)’에 불과했다. 스크럼을 짠 이들을 뚫기는 만만치 않았다. 한 여성 유족은 직원들에 의해 사지가 들려 끌려 나왔다. 고성이 오가고 복받친 울음이 터졌다. 설왕설래 끝에 대표자 3명이 도지사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팥소 없는 찐빵이라 했던가! 집무실에는 도지사가 없었다. 필자는 유골함을 열고 “이 뼈가 6.25 때 대한민국 군경의 총부리에 죽임을 당한 이들의 뼈입니다”라고 말했다.
[프레시안] 대한민국, 이제부터 진짜 시작하려면…”친일독재 뿌리 둔 내란세력 청산부터”
내란의 공범자들, 폭력의 선동자들, 그들을 책임지게 해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되자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위대한 국민들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되찾아 주셨다”면서 “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 5당은 지난달 8일, ‘내란종식.민주헌정 수호를 위한 윤석열 파면 촉구 범국민대회’에서 한 목소리를 냈다. 이날 야당 대표들은 공동선언문을 통해서 ‘법원의 윤석열 구속 취소 인용에 강한 유감’을 표하면서 “우리 국민들은 이미 윤석열을 파면했으며 위대한 국민과 함께 빛의 혁명을 완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야당 대표들은 “검찰이 이번 내란사태의 주요 공범”이라는 데 생각을 같이 했으며 “검찰은 고쳐 쓸 조직이 아니라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 해체수준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이재명 대표의 말처럼 “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이 시작”되려면 그에 대한 답은 “윤석열 파면은 내란 종식의 서막일 뿐”이라는 인식에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국혁신당 김보협 수석대변인은 이렇게 주장하면서 “일제감정기 직후 반민특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파와 부역자 청산을 못했기에, 민주화 이후 군사독재정권을 청산하지 못했기에 내란세력이 발호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면서 “윤석열 파면 이후에 ‘작은 윤석열들’ 내란을 도모한 ‘윤석열 체제’의 잔 뿌리까지 모두 뽑아내야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윤석열 파면은 내란의 완전 종식과 민주헌정 수호의 서막이자 출발점일 뿐”이라면서 “내란특검을 포함해 여러 특검 출발과 함께 반헌특위, ‘반헌법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 내란을 묵인하고 방조하고 선동한 자들을 모두 조사하고 그에
[뉴시스] 시민단체,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규탄…”당장 검정 철회해야”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군국주의 국가로 가려는 시도” [서울=뉴시스] 조성하 기자, 김지현 인턴기자 = 시민단체들이 일본 정부가 독도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왜곡된 내용이 담긴 고등학교 교과서를 검정 통과시킨 데 대해 규탄 목소리를 냈다. 시민단체 연대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 국민 전체를 적으로 돌리려는 것이 아니라면 역사왜곡 교과서 채택을 당장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단체는 지난 25일 일본 문부과학성이 검정을 통과시킨 고등학교 교과서에 대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술하고, 한일병합의 합법성을 주장했으며,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강제성을 희석한 표현을 담았다”고 비판했다. 또 “식민지 지배에 대한 법적·도의적 책임이 이미 청구권협정 등을 통해 해결됐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며, 일본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단체는 이번 교과서 왜곡이 2018년 학습지도요령 개정에서부터 시작된 흐름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러일전쟁을 ‘해방전쟁’으로 규정하고, 독도를 일본 고유영토로 교육하도록 지침에 명시한 바 있다.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일본의 역사 왜곡은 전쟁 가능 국가로 회귀하려는 군국주의적 시도의 일환”이라며 “일본 정권은 평화를 헤치려는 헛된 야망을 접고, 식민지배했던 한국을 비롯한 모든 국가에 사과와 반성을 해야 할 것”고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인 김용만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한혜인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연구원, 전승혁 민주노총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부위원장,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이 이사장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일본을 고발한 지
민족사랑 202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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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함세웅 신부의 ‘멍에와 십자가’
[광복80주년명문80선 77] 함세웅은 2000년대 이후에도 민주와 정의의 한길을 걷고 있다. 우리나라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천주교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특히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이 그 중심에 있었다. 함세웅 신부도 그 중의 한 분이다. 1942년 서울에 태어나 가톨릭대학에 입학했으며 로마에 유학, 사제 서품을 받았다. 용암동성당 주임사제를 거쳐 가톨릭대학에서 교부학을 가르쳤다. 1974년 ‘사제단’의 결성을 주도하고, 재야연대조직인 민주회복국민회의 대변인으로 맹활약했다. 두 차례의 투옥에도 굴하지 않고 유신독재에 맞섰다. 그의 투쟁은 5공 독재 시절에도 의연히 이어졌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된 진실을 폭로함으로써 6월 항쟁을 이끌어냈고, 1980년대 말에는 <평화신문>과 <평화방송> 대표로서 시대정신을 담은 새로운 화두를 한국사회에 제시했다. 함세웅은 2000년대 이후에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민족문제연구소 등을 이끌면서 민주와 정의의 한길을 걷고 있다. 그는 <고난의 땅 거룩한 땅>, <약자의 벗, 약자의 하느님>, <칼을 주러 오신 예수> 등 강론집과 사회비판적 기능을 담은 <멍에와 십자가>, 신앙인의 자기성찰을 담은 <심장에 남는 사람들> 등 책을 지었다. ‘천주교의 민족사적 반성과 신학적 성찰’ <멍에와 십자가>에는 통절한 내용이 담긴다. 그 중에서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민족사적 반성과 신학적 성찰’이란 논설이다. 천주교 신부의 위치에서 이런 글을 쓴다는 게 보통 용기와 식견이 없이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집단에서 자체의 비판이 당장은 아픔이지만 길게는 그만큼 건강성을 유지하게 된다. 이 논설은 1. 역사적 성찰. 2. 현실적 반성 – 철저한 회개, 철저한 믿음. 3. 미청산의
[오마이뉴스] ‘몸뻬’ 입어야 미인이라는 친일파의 참회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채만식 <탁류>와 <레디메이드 인생>의 작가인 채만식(1902~1950)은 한국인들에게 꽤 익숙한 문인으로 전북 군산에서는 훨씬 친숙한 인물이다. 이곳에는 채만식문학관이 있고 채만식문학상도 존재한다. 지역사회에 든든한 기반을 가진 이 문인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5~2009)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위원회는 그의 친일을 소설 창작을 통한 징병제·지원병제·내선일체·황민화·대동아공영권·침략전쟁 및 후방지원 필요성의 선전, 보도특별정신대·국민총력조선연맹 등에 대한 가담, 산문 형식의 글을 통한 국책문학론 선전 등으로 분류했다. 위원회가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7권 채만식 편은 “1942년의 만주국 간도성 조선인 개척촌 시찰과 그 결과로 <매일신보> <반도지광> 등에 발표한 ‘간도행’, ‘농산물 출하(공출) 기타’ 등의 산문을 통해 만주 개척지 선전 및 그에 따른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획책”했다고 보고했다. 한반도 안의 한국인을 일본과 연결시키는 일뿐 아니라, 문필 활동의 영역을 만주로도 넓혀 두 그룹과 만주 진출 한국인들을 한 데 묶는 작업도 했다. 죽기 2년 전에 그는 참회의 글을 발표했다.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된 직후에 발간된 <백민> 1948년 10월호부터 이듬해 1월호까지에 <민족의 죄인>을 발표했다. 전직 국어교사인 장호철의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은 “그는 이 소설을 통해서 자신이 친일을 하게 된 것은 ‘비겁하거나 경제적인 이유’였다는 뉘앙스를 드러낸다”라며 <민족의 죄인>의 해당 부분을 소개한다. “복종이 싫고 용기가 있는 사람은 외국으로 달리어 민족해방의 투쟁을 하였다. 더 용맹한 사람들은 외국으로 망명도 않고 지하로 숨어 다니면서 꾸준히 투쟁을 하였다. 용맹하지도 못한 동시에 영리하지도 못한 나는 결국
[오마이뉴스] ‘부천항일운동기념비’ 시민모금으로 제작해 안중근공원에 세우다
광복80주년을 맞이하여 부천의 3.1운동이 일어난 3월 24일 제막식 거행 3월 24일 월요일 오전10시 안중근공원에서 ‘부천항일운동기념비’ 건립 제막식이 진행되었다. 지난 2024년 6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아래 부천지부)와 부천시민연합은 추진위를 구성하여 시민모금으로 기념비를 제작했으며, 부천의 3.1운동이 일어난 3월 24일에 맞춰 기념비 제막식을 진행한 것이다. 두 단체는 대일항쟁기 부천에 3대 항일운동이 있었음에도 이를 기념하고 알려주는 기념비가 없음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고 시민들이 자랑스러운 항일운동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기념비를 제작했다. 제막식에는 두 단체 회원 뿐만 아니라 조용익 부천시장, 김병전 부천시의회의장, 정인조 전 부천희망재단 이사장, 이재영 경기도의원, 황진희 경기도의원, 이종문 시의원, 김선화 시의원, 김명원 전 경기도의원, 백창환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장 등 많은 내외빈들이 참석했다. 제막식에 이어 기념식은 민중의례를 시작으로 내빈소개, 부천항일운동사 보고, 추진경과보고, 기념사, 축사, 기념비 설명, 비문낭독, 축하공연 등으로 진행되었다. 양경직 계남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우리 부천의 항일운동은 총 3건으로 1919년 3월 24일 일어난 ‘소사독립만세운동’, 1927년 9월 24일 일어난 ‘소사역하역노동자동맹파업’, 1927년 10월 28일 일어난 ‘부평수리조합반대운동’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부천 관내에는 이러한 역사가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부천항일운동기념비’를 통해 많은 시민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 큰 의의라고 말했다. 김병구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운영위원장은 추진경과보고를 했다. 작년 6월 김병구 운영위원장이 시민모금으로 ‘부천 3.1만세운동 기념비’를 건립할 것을 제안했으며, 이를 계기로 부천지부와 부천시민연합이 추진위를 구성하여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사업 추진 중에 김명원
[역발상 시즌4] 광복 80주년 기념, 해방·분단·통일의 노래 1부 – 해방의 노래 1
☞ (25.03.18) ‘역발상’ 시즌 4: 광복 80주년 기념, 해방·분단·통일의 노래 1부 “해방의 노래 1(비대중가요)” 출연:이준희,이영미 오늘 이야기 : 해방의 노래 1.구 애국가 스코틀랜드 노래 ‘Auld Lang Syne’ 곡조에 ‘애국가’ 가사를 붙인 곡. 대한제국 시기부터 널리 불렸고, 안익태 작곡 신 애국가가 보급되기 전까지 사실상 국가 역할을 했던 노래. 1945년 해방 당시에도 가장 많이 불린 곡이었으며, 1945년 10월 ‘조선애국가요집’에 첫 곡으로 수록된 것은 물론, 1947년 8월 첫 번째 ‘국산’ 음반에도 신’애국가’와 함께 수록. 송진혁·예술대학음악부합창단 노래. 2.해방의 노래 임화 작사(?), 김순남 작곡. 1945년 12월 ‘예술운동’ 수록. ‘해방가요’를 가장 많이 작곡한 김순남의 대표작. 1946년 8월 재일본조선인연맹 유관 음반회사 리베라레코드에서 장비의 노래로 음반 발매. 김순남의 작품이 당대에 녹음된 것은 리베라레코드 발매 네 곡뿐. 녹음 과정에서 편곡 등에 김순남의 관여가 있었는지는 불분명. ‘예술운동’과 음반에는 작사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는데, 임화의 창작 가사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인 듯. 1922년 오오바 이사무(大場勇)가 지은 ‘メーデー歌’ 가사의 번안(표절?)이라 보는 것이 중론. 가사는 번안이지만 곡은 김순남의 창작. 김순남은 1948년 월북. 가사 첫 대목을 따서 ‘聞け万国の労働者’로도 불리는 ‘メーデー歌’의 곡조는 1899년에 발표된 일본 군가 ‘小楠公’. 민족음악연구회 노래(1990년 ‘백두산’ 수록). 3.독립 행진곡 박태원 작사, 김성태 작곡. 1945년 10월 3일 ‘예술통신’ 수록. 박태원은 1950년 월북. 일본 군국가요 ‘滿洲行進曲’과 유사하다는 얘기가 있는데, 왜 그러는지 알
[오마이뉴스] 습관성 탄핵이라고? 100년 전 이승만 탄핵을 위해 분투한 독립투사들이 있다
아주 긴 일주일을 보내고 있다. 많은 이들의 전망처럼 만약 이번 주 대통령 윤석열이 파면된다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격언을 실로 믿지 않을 수 없겠다. 100년 전인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 면직안을 통과시켰으니 말이다. 박정희조차 ‘눈이 어두운 독재자’라며 손절했던 이승만에 대해 윤석열은 이승만기념관에 성금을 내는가 하면, 3.1절 기념식장에 이승만 사진이 없다고 질책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제 윤석열은 자신이 그토록 존경한 이승만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 .다 국힘은 야당에 대해 ‘습관성 탄핵’, ‘줄탄핵’, ‘탄핵 남발’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1919년 9월 임시대통령 이승만 선출 당시부터 1925년 3월까지 5년 6개월 동안 줄기차게 이승만 탄핵을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100년 전 이승만 탄핵을 위한 분투를 되새겨 봄으로써 100년 후 지금 윤석열 파면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헌신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드리고자 한다. 신채호 “이승만은 생기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사람” 이승만 탄핵을 가장 먼저 제기한 이는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3.1운동 직전 이승만이 위임통치를 주장한 사실을 듣고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생기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사람”이라면서 1919년 4월 10일~11일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도 ‘이승만은 위임통치 및 자치문제를 제창하던 자’이니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절대 독립’을 주장했던 이동휘 역시 이승만을 ‘썩은 대가리’라고 부르며 위임통치 청원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결국 1919년 9월 11일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