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장석천이 일제 당국의 심문에 대처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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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글방 13]

장석천이 일제 당국의 심문에 대처하는 법
–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장석천의 심문 투쟁

조한성 출판팀장

1929년 11월 전남 광주에서 두 차례의 큰 학생시위가 벌어진 후의 일이다.

일제 공안 당국은 광주의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나갈까 봐 전전긍긍했다. 이들은 보도 검열을 통해 광주에서 벌어진 두 번째 시위에 대한 보도를 완전히 틀어막았다. 그 흔적이 당시 일간지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들은 이 후에도 강력한 보도 통제를 실시해 언론사들이 광주 시위 관련 기사를 싣는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동아일보』는 독자들의 요청에도 광주 시위 관련 보도를 할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남 광주 사건에 대하여 독자 제씨로부터 지금 형편이 어찌 되어 있는가를 여러 번 물으시나, 이 사건은 경무 당국으로부터 신문을 게재하지 말라는 경고가 있으므로 당분간 부득이 보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동아일보』1929.11.16)

일제가 사건의 보도를 막자 조선 사회는 크게 동요했다. 애초에 광주의 시위가 조선인의 민족감정을 건드리면서 발생한 데다가,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조선인 학생만 과도하게 처벌해 분노를 산 상태였다. 그런데 사건 보도마저 틀어막자 “일본인 의용소방대가 학생들을 학살했다더라”, “나이 어린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폭행했다더라” 같은 온갖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조선 사회의 여론은 더욱 악화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전국으로 퍼져나간 시위

1929년 12월 3일 새벽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시내 전문학교, 고등보통학교 등 각급 학교에 격문이 배포되었다. ‘조선 학생청년 대중아 궐기하라’라는 제목의 격문을 비롯한 6종의 격문이었다. 격문은 전국 각지에도 뿌려졌다. 그중 일부로 보이는 격문 8천 부가 광화문우편국과 경성우편국에서 발견돼 압수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일제 공안 당국이 가장 두려워했던 일을 실현시키고 말았다. 광주에서 있었던 학생시위가 전국 각지로 퍼져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격문이 배포된 지 이틀만인 12월 5일 제2고등보통학교에서 첫 번째 시위가 벌어졌고, 중동학교와 제1고등보통학교 등 서울 시내 학교들이 잇따라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12월 9일에는 서울 시내 각급 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대규모 연합시위였다. 시위에는 경신, 보성, 중앙, 휘문 등 서울 시내 주요 학교들이 모두 참여했다. 학생들은 “광주 학생 석방”,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일제 경찰은 이날 하루 동안 1,200명이 넘는 학생과 시민을 검거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시위운동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일제 당국은 조기 방학으로 학교 문을 억지로 닫아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사태는 진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1930년 1월 학교 문이 열리자 신의주부터 부산까지 전국 대부분의 도시에서 다시 동맹휴학과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제2차 연합시위였다. 시위 대열에는 여학생들도 용감히 함께했다. 허정숙과 박차정을 중심으로 한 근우회의 지도에 따라 이화, 숙명, 경성, 동덕, 근화 등 대부분의 여학교 학생들이 시위와 동맹휴학에 동참한 것이다.

시위는 전국 각지로 퍼져갔다. 이제 학생들의 시위는 특별한 지도세력이 없어도 학생들 스스로 운동을 조직할 정도로 발전했다. 학생들은 거침없이 “조선독립 만세”, “타도 일본제국주의”를 외쳤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이렇게 전국 각지를 거쳐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등 해외까지 퍼져나갔다. 여기에는 281개 학교, 5만 4천여 명 이상의 학생들이 함께했다. 우리는 이것을 ‘광주학생항일운동’이라고 부른다.

일제 공안 당국의 폭력적인 수사 방식

이렇듯 1929년 12월 3일 격문사건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제 당국도 격문사건을 엄중히 생각했다. 그들은 즉시 수사에 나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해 가혹한 수사를 펼쳤다. 그 수사가 얼마나 가혹했으면 동아일보가 “종로경찰서의 견딜 수 없는 취조로 그 진상이 발각되었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당시 격문 인쇄와 배포를 주도했다가 체포된 중앙청년동맹 교양부장 곽현의 경찰조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경찰 : 그대가 한 사실을 모두 숨기지 말고 남자답게 진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니 잘 생각을 하고 전후의 사실을 진술하라.
곽현 : 조금 전에 내가 말한 것은 거짓을 말하였다. 이제부터 사실을 진술하겠다.

경찰의 질문과 곽현의 대답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당시 일 제 공안당국의 수사 방식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일제의 수사는 가혹하기로 유명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일제의 수사 방식을 이렇게 밝혔다.

(일제 경찰은) 사실의 유무나 경중을 불문하고 심문하기에 앞서 악독한 형벌을 행하였다. 그리하여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인사불성으로 만들어 여러 날을 감금한 뒤에 비로소 심문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여 어떠한 증거도 없이 오직 자백만으로 죄를 성립시켰다. 평소의 행동도 반드시 낱낱이 조사하여 중죄에 빠뜨렸고, 그 증거를 수사하는 일도 모두 강제적으로 처분하였다. 증인과 감정인 또한 강박과 고문으로 범죄사실을 증언케 하였다. 물품압수 및 가택 수색도 소유자의 승낙과 입회 없이 시행하고, 비록 그 물품이 범죄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도 압수하였다. 형사피고인에게는 스무 종류 이상의 고문기구로 혹독하게 고문을 감행하여 거짓 자백으로 범죄사실을 날조하고 그 억울함을 밝히지 못하게 하였다.

박은식에 의하면 일제 경찰은 심문하기 전에 ‘악독한 형벌’로 정신이 없게 만든 후 심문했다. 심문 과정에서도 대개 가혹한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냈고, 그렇게 받은 자백만으로 다른 증거도 없이 죄를 성립시켜 처벌했다고 했다.

다음은 3·1운동 당시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어느 여학생의 증언이다. 그녀의 증언에서도 일제 경찰이 심문 전부터 얼마나 많은 폭력을 행사하였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순사는 나의 머리를 잡아끌어 종로경찰서로 연행했다. 경찰서 입구에 줄지어 서있던 20여 명의 일본인 경찰들이 나를 구타했다. 잔인이 너무 지나쳐, 나는 때로 그들이 나를 때리는지, 다른 사람을 때리는지 깨닫지 못했다. (…) 얼마 후 우리는 한 사람씩 심문을 받았다. 심문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는 내 힘에 벅차다.

이 여학생은 심문 과정에서 자신이 당한 고문과 폭력의 내용을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1919년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몸으로 겪은 고문과 폭력이 그녀에게 얼마나 가혹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다음은 박헌영의 회고이다. 그의 경험에서도 일제 경찰의 폭력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일제 경찰은 연행된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냉수나 혹은 고춧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 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어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 8명의 경찰들이 큰 방에서 벌이는 축구공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장석천의 빛나는 심문 투쟁자,

그럼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돌아가 이 사건을 전국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석천의 경우를 살펴보자. 장석천은 어떻게 일제 공안 당국의 수사를 받았을까? 일제 경찰은 그가 사건을 전국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판단하고 강도 높게 추궁했다. 그의 혐의는 광주에서의 시위를 지휘한 혐의 외에도 12월 3일 격문사건에 관여한 혐의, 12월 9일 제1차 서울연합시위에 관여한 혐의, 비밀결사 조선공산청년회에 가담한 혐의 등이 있었다.

장석천은 경찰의 추궁에 “본인이 한 것은 전부 진술하겠다”고 답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이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이자 광주청년연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술술 털어놨다. 서울에 올라와서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이름도 모두 말했다. 조선청년동맹의 간부인 차재정, 황태성 등이나 신간회 간부 허헌 등이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그가 진술한 건 모두 다 일제 경찰이 쉽게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장석천은 격문사건에 어떻게 관계했냐는 경찰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학교에 격문이 살포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그에 관하여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경찰은 그가 서울에서 만난 이들과 어떤 협의를 했는지도 추궁했다. 그러자 그가 답했다.

“아무것도 협의한 사실이 없다”고.

자신에 대한 주요 혐의를 완전히 부인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알고 있다. 장석천이 이렇게 모든 혐의를 부인할 때 경찰이 그에게 가했을 고문과 물리적 폭력이 얼마나 심했을지를. 그러나 장석천의 심문조서에는 더 이상의 내용이 실리지 않았다. 그가 일제 경찰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모든 혐의를 부인한 결과였다.

경찰은 경고했다. 그가 부인해도 다른 피의자가 진술할 거라고. 그랬다. 조사는 그만 받는 것이 아니기에, 누군가는 경찰의 고문과 폭력에 굴복해 털어놓을 수 있었다. 장석천이 부인한다고 해서 모든 사실을 은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경찰의 심문이 거듭될수록 장석천도 자신이 한 일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경찰의 일방적인 고문과 폭력을 줄이고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피의자가 진술한 사실에 교묘하게 거짓을 조금씩 섞었다. 거짓말이 진짜처럼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진실에 거짓말을 아주 조금 섞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진실을 알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경찰은 장석천이 서울로 올라올 때 가지고 왔다는 150원의 출처에 대해 맹렬히 추궁했다. 인쇄배포를 책임졌던 곽현이 장석천이 준 50원으로 격문을 인쇄했다고 진술했으므로, 이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게 되면 배후조직을 밝혀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장석천은 경찰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않았다. 그는 첫 번째 심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의 돈을 훔쳤다고. 그는 자신의 도덕성을 약간 해치는 방법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 진술을 한 것이다. 두 번째 심문에서 경찰이 다시 돈의 출처를 추궁하자 이번엔 원래부터 자기 돈이었다고 우겼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네 번째 심문에서 지금까지의 진술을 모두 뒤집었다. 격문을 인쇄하는데 쓴 돈은 신간회에서 나온 돈 100원 중 일부였고, 인쇄배포 책임자 곽현에게 전달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조선청년총동맹 간부 차재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그는 왜 150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얘기한 걸까? 장석천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김성수에게 간청해서 얻은 돈 100원으로 서울에서 생활했는데, 차재정이 인쇄비 50원을 자기가 곽현에게 준 것으로 해달라고 해서 부득이 처음부터 150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자, 그럼 진실은 무엇일까? 알 수 없다. 이렇게 거듭 말을 바꾸고 진실에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 말하니 어느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진실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들 중에는 일본 경찰과 검사, 예비판사와 판사도 있었다. 결국 장석천은 이 방법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혐의 대부분을 벗었다. 광주지방법원에서 있었던 1심 재판에서 그는 광주 시위를 지휘한 혐의만 인정되어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서울에서의 격문 배포에 관여한 혐의, 서울연합시위에 관여한 혐의, 비밀결사 조선공산청년회 가담한 혐의는 전혀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 공안당국을 향한 그의 심문 투쟁은 이렇게 빛나는 성공을 거뒀다.

이후 장석천은 2심 재판에서 1년 6개월형으로 형량을 줄이는 데 성공해 1931년 12월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냐고? 장석천은 감옥에서 나온 후 고향 광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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