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단양역 앞으로 다시 옮겨진 ‘경경선 전통지지 기념비(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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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8]

반도종관철도인 ‘중앙선’이 막바지에 ‘경경선’으로 이름이 바뀐 연유는?
단양역 앞으로 다시 옮겨진 ‘경경선 전통지지 기념비(1942년)’

이순우 특임연구원

생각건대 본선(本線)은 반도중앙부(半島中央部)를 종관(縱貫)하여 자원개발(資源開發)에 기여(寄與)하고 또 부산경성간(釜山京城間)의 보조간선(補助幹線)으로서 경부본선(京釜本線)의 수송(????送)을 완화조절(緩和調節)하여써 대륙경로(大陸經路)를 증강(增强)할 뿐 아니라 반도(半島)의 철도망 완성(鐵道網 完成)을 촉진(促進)하고 나아가서는 대동아권내(大東亞圈內)에 있어서 조선(朝鮮)의 지위직능(地位職能)을 확립확충(確立擴充)케 하는 것으로 실(實)로 조선교통사상(朝鮮交通史上)에 일신기원(一新紀元)을 획(畫)하는 것이라 할 수 있어 본선(本線)의 사명(使命)이야말로 매우 중대(重大)하다.

이것은 1942년 4월 1일에 경북 안동역 구내에서 거행된 경경선(京慶線, 통칭 ‘중앙선’) 전통식(全通式)에서 미나미 총독(南總督)이 고사(告辭)를 통해 설파한 내용이다. 여기에는 이른바 ‘조선반도 제2의 종관선(縱貫線)’이라 일컫는 경경선을 개설하여 이를 경부선 철도의 보조 선로로 활용하고자 했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또한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에 걸친 내륙 오지(奧地) 쪽의 자원개발을 촉진함과 아울러 장차 내선만지간(內鮮滿支間; 일본, 조선, 만주, 북중국 사이)의 최단첩로(最短捷路)를 형성하는 조선 철도의 위상과 기능을 크게 강화한다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반도의 내륙을 종단(縱斷)하여 관통하는 철도를 부설하려던 구상은 일찍이 이른바 ‘총독정치’가 막 개시되던 1910년대 초반부터 구체화하던 것이었는데, 『매일신보』 1912년 8월 31일자에 수록된 「중앙선(中央線)의 계획(計劃)」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마산(馬山)을 기점(起點)으로 하고 대구(大邱)로부터 충주(忠州)를 경(經)하여 경성(京城)에 지(至)하는 도(道) 중앙선(中央線)은 기(旣)히 철도국(鐵道局)의 예정선(豫定線)인데 차등(此等) 부설(敷設)의 완급(緩急)은 대구(大邱)는 물론(勿論)이오 각지(各地)에 다대(多大)한 영향(影響)이 보급(普及)하고 조선계발상(朝鮮啓發上) 중요(重要)한 문제(問題)인 고(故)로 신일(晨日) 대구상업회의소연합회(大邱商業會議所聯合會)에 제의가결(提議可決) 하였고 차(且) 일층(一層) 이해득실(利害得失)을 연구(硏究)하여 대구상업회의소에서는 과반래(過般來)로 재차(????次) 실지(實地)를 답사(踏査)하여 실제적 재료(實際的 材料)를 수집(蒐集)할 계획중(計劃中)인데 마산상업회의소(馬山商業會議所)에서도 대구(大邱)와 동양(同樣)의 의견(意見)을 포지(抱持)하여 연합실행(連合實行)하기로 목하 협의중(目下 協議中)이라더라.

이러한 철도예정선에다 ‘중앙선’이라는 노선명칭을 달아놓은 것은 암만 봐도 일본 본토의 내륙경유철도인 ‘츄오우센(中央線, 1911.5.1일 완전개통)’에서 명명방식을 그대로 따온 모양이다. 아무튼 이로부터 다양한 예정선로의 후보지가 검토되는가 하면 경유지 주변의 각 지역마다 정거장 유치운동이 왕성하게 벌어진 흔적을 알 수 있다. 이 와중에 시발역(始發驛)의 선정대상지가 ‘청량리’로 귀결된 것은 대략 192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신문???? 1927년 2월 5일자에 수록된 「청량리(淸涼里)를 기점(起點)으로 중선(中鮮)의 개척(開拓), 중앙선 건설(中央線 建設)의 경제조사(經濟調査) 근근 착수(近近 着手)」 제하의 기사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 기점(起點)에 대해서는 종래(從來) 구구(區區)한 논의(論義)가 있었고 지금도 역시 미정(未定)에 속(屬)해 있지만 철도정책(鐵道政策)의 대국(大局)에서 보아 장래(將來) 대경성(大京城)을 완성(完成)했을 때를 예상(豫想)하면 흡사 도쿄(東京)의 양국역(兩國驛, 료고쿠역)과 같은 관계(關係)에 두는 것이 최량(最良)의 책(策)이 되며 또한 이상(理想)이기도 하다는 의견(意見)이 유력(有力)해지게 되면, 금월 중순(今月 中旬)부터 착수(着手)하여 6, 7월(月)에 완료예정(完了豫定)인 경제조사(經濟調査)에서도 청량리(淸涼里)를 기점(起點)으로서 조사(調査)할 것이라 하므로 청량리(淸涼里)를 기점(起點)으로 하는 것은 어쨌든 움직이지 않는 바라고 보여지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수십 년을 끌어오던 중앙선 철도의 개설공사가 마침내 구체적으로 현실화한 것은 1936년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었다. 1936년 5월 1일에 개회된 제69회 제국의회(帝國議會)의 협찬(協贊)을 거쳐, 신규계획선으로 동해중부선의 영천을 기점으로 하여 의성, 안동, 영주, 죽령, 단양, 제천, 치악, 원주, 양평을 거쳐 청량리에 도달하는 총연장 345.2킬로미터의 중앙선 건설경비(6,513만 4천여 원; 이후 532만 8천여 원 증액)가 확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1936년 12월 이후 남북 양쪽의 기점에서 공사를 동시에 개시하는 한편 가장 난공사구간이었던 중앙부의 죽령수도(竹嶺隧道, 죽령터널)와 치악수도(雉岳隧道, 치악터널) 부근도 함께 건설에 착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가장 먼저 선로부설공사가 완료된 중앙선(경경남부선) ‘영천~우보 구간’의 운수영업이 1938년 12월 1일에 개시되었고, 나머지 구간들도 그 이후 3년 5개월이라는 시기에 걸쳐 남북 기점에 가까운 쪽부터 공사를 마치는 족족 차례대로 개통이 이뤄진 바 있었다.

한편, 최초의 구간 개통에 앞서 새로운 철도선로의 명칭이 그간 ‘중앙선’이라 불러왔던 것을 ‘경경선(京慶線; 경성~경주의 머리글자)’으로 변경토록 하였는데, 알고 본즉 이는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가 주최한 ‘이름짓기’ 현상모집을 통해 선별한 결과를 다시 철도국 당국에서 받아들인 결과물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경성일보』 1938년 11월 26일자에 수록된 「신선명(新線名)은 ‘경경선(京慶線)’, 현상추천 제일석(懸賞推薦 第一席)을 채용(採用), 철도국 공표(鐵道局 公表), 당선자(當選者) 내일 지상(紙上)에 발표(發表)」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대망(待望)의 동경성(東京城) — 경주(慶州)를 잇는 반도종관철도(半島縱貫鐵道)는 경북 영천(慶北 永川)과 우보간(友保間) 40천(粁, 킬로미터) 1분(分)이 완성(完成)된 것으로 마침내 오는 12월 1일부터 일반운수영업(一般運????營業)을 개시(開始)하기로 되었고, 역사적 개통(歷史的 開通)의 일(日)을 맞이하여 본사(本社)에서는 신선(新線)의 ‘이름짓기(名づけ親)’를 모집(募集)했던 바 의외(意外)의 반향(反響)을 불러 응모(應募) 1만 5백여 통(通)을 웃돌았고, 심사(審査)의 결과(結果) 수백종(數百種)이 넘는 선명(線名) 가운데 경경(京慶), 경경(慶京), 경앙(京央), 영남(嶺南), 성산(城山), 선앙(鮮央), 성경(城慶), 선중(鮮中), 성남(城南), 태백(太白), 남중(南中), 영동(嶺東), 동경(東慶)이 선출(選出)되었다.
다시 엄선(嚴選)의 결과(結果), ‘경경선(京慶線)’을 제일위(第一位)로 미는 것으로 결정(決定), 본사(本社)에서는 24일 오후(午後) 곧바로 철도국(鐵道局)에 우(右) 13의 선명(線名)을 추천(推薦)했던 바 25일 조(朝) 안동(安東)에서 귀임(歸任)한 쿠도 국장(工藤局長)을 중심으로 관계수뇌자(關係首腦者)가 신중협의(愼重協議)한 끝에 ‘경경선(京慶線)’으로 명명(命名)하는 것으로 결정(決定), 철도국장 고시(鐵道局長 告示)로써 공표(公表)했다. 모집규정(募集規定)에 따라 채용(採用)된 선명(線名)은 1등(一等) ‘경경(京慶)’, 2등(二等) ‘성경(城慶)’, 3등(三等) 1석(一席) ‘태백(太白)’, 동 2석(同 二席) ‘선앙(鮮央)’으로 결정(決定), 동선명(同線名)을 투표(投票)했던 자(者)가 많은 탓에 25일 추첨(抽籤)한 뒤 26일 조간지상(朝刊紙上)에 입선자(入選者)를 발표(發表)하기로 되었다.
이리하여 가칭(假稱) 중앙선(中央線)은 24일 한(限)으로 작별하고, 그 이름도 빛나는 ‘경경선(京慶線)’으로 삼아 반도(半島)의 보고개발(寶庫開發)과 대륙교통(大陸交通)의 중요사명(重要使命)을 띠고 맥진(驀進)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곧이어 그 이듬해에는 최대 난공사 구간이던 4.5킬로미터 길이의 죽령터널이 관통되었고, 이때 터널 남쪽 입구와 북쪽 입구에 각각 미나미 총독이 휘호한 ‘일시동인(一視同仁)’과 쿠도 철도국장이 쓴 ‘죽령(竹嶺)’이라는 편액이 내걸리게 되었다. 이로부터 다시 3년 남짓의 세월이 흘러 마지막 공사구간인 영주와 제천 사이의 철로부설공사가 완료되면서, 특히 1942년 2월 7일에는 남과 북에서 이어온 경경선의 철로가 충북단양역(忠北丹陽驛)의 동남쪽 620.57미터 지점에서 서로 맞닥뜨리는 순간이 연출되었다.

이에 따라 전통식을 코앞에 두고 그해 3월 26일에는 이곳에서 마지막 스파이크를 박는 연결기념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매일신보』 1942년 3월 28일자에 수록된 「전통(全通) 앞둔 경경선(京慶線)의 역사적(歷史的)인 연결식(連結式), 26일(日) 단양역(丹陽驛)에서 성대(盛大)히 거행(擧行)」 제하의 기사에는 이 당시의 광경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제천(堤川)에서 본사특파원 조풍연 발전(本社特派員 趙豊衍 發電)] 경경선(京慶線) 전통의 최후의 공사인 영주 제천(榮州―堤川) 사이 62키로 3의 공사가 완료되어 이제 드디어 4월 1일의 개통식도 목전에 박두하였는데 26일 정오 단양역(丹陽驛)에서 정식의 연결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새로이 반도 제2의 종관철도의 혈관(血管)이 서로 연결된 것이다. 식은 신식(神式)으로 거행되었는데 본국으로부터는 국장대리로서 에자키(江崎) 건설과장 이하 노가미(野上) 공사계장, 코바(木庭) 안동(安東)건설사무소장, 쿠스모토(樟本) 경성건설사무소장 등이 참렬하고 내빈으로서 충북 내무부장이 임석하여 안동신사 신관의 지휘 아래에 식을 거행하고 동 0시 20분경 에자키 건설과장이 선로를 연결시키는 못(釘)을 엄숙하게 내리박아 역사적인 행사를 마치었다.

이와 함께 이곳 단양역 구내에 남겨진 것이 바로 ‘경경선전통지지(京慶線全通之地) 기념비’이다. 원래 이 비석이 처음 세워진 때는 1942년 중춘(仲春, 음력 2월)이었으며, 그 이후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충주댐 건설의 여파로 수몰예정지역에 포함된 중앙선 철길을 이설할 때인 1985년 11월 7일에 1차적으로 150미터 가량의 위치 이동이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2019년 6월 10일에 이르러 중앙선 복선전철화 사업의 여파로 기존 선로가 폐선되면서 종전의 단성역(丹城驛) 구내에서 지금의 ‘단양역(충북 단양군 단양읍 증도리 산1-1번지)’ 역전광장으로 재차 이설된 상태이다.

이 과정에서 원형은 대부분 사라지고 마치 이를 재현한 형태의 기념물로 남아 있는데, 지금은 거의 새것이나 다를 바 없이 변신한 모습이 역력하다. 아쉽게도 누구의 휘호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전면의 표제 글씨는 — 옛 사진자료로 확인되는 것처럼 원래 ‘밝은색 재질의 돌에 검은 글씨’로 새겨져 있던 것이 — 오석(烏石)에 음각(陰刻)한 것으로 바뀌어 있다. 짐작건대 지난 1985년에 기념비를 1차로 이설할 당시에 원본 편액을 탁본(拓本)하여 그것으로 글씨만 옮겨 새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후면에 부착되어 있는 건립기(建立記)도 필시 일본어로 되어 있었을 테지만, 이를 우리말로 옮기고 일제의 연호(年號)라든가 ‘경경선’이라는 표현 등을 새로 고쳐 단 것이 눈에 띈다. 그 아래쪽에는 2019년 6월 10일에 단성역에 있던 기념비를 이곳 단양역으로 재이전한 사실을 간략히 적은 돌판이 추가되어 있다.

지금은 사라진 일본어판 건립기의 원문을 자세히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 대신 『매일신보』 1942년 4월 1일자에 수록된 「[제천(堤川)에서 영주(榮州)까지 경경선 죽령답파기(京慶線 竹嶺踏破記)] 시간(時艱)과 천험(天嶮)을 극복(克服) ② 과학(科學)의 극치(極致)인 죽령수도(竹嶺隧道)」 제하의 탐방기사에 개략적인 내용을 채록한 것이나마 남아 있으므로 그 내용을 참고삼아 여기에 덧붙여 두기로 한다.

[본사특파원 조풍연 발(本社特派員 趙豊衍 發)] …… 삼곡도담의 조그만 정거장을 지난 다음 단양역에 닿으니 이곳은 경경선이 남북으로부터 뻗어 나와 맞닥뜨린 곳이다. 역 구내에는 이 역사적인 철도건설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석비가 있다. 가까이 가보면 ‘경경선전통의 따[땅]’라 표제하고 대략 다음과 같은 비문이 아로새겨 있다.
“소화 17년(1942년) 2월 7일 경성선의 선로는 이 따[땅]에서 남북이 서로 접촉하여 그 전통을 봄에 이르렀다. 대저 경경선은 그 대부분 즉 영천 동경성 간을 중앙건설선으로 하고 소화 11년(1936년) 기공한 이래 시간(時艱)과 천험(天嶮)과를 극복하고 공사를 진행시키어 남북 양방면에서 차례로 운수영업의 개시를 보았다. 그리하여 최종의 건설구간인 영주 제천 간에서 선로는 본비 전면의 지점에서 전통을 이루운 것이다”
맵시를 보지 않은 수수한 글이지마는 종사원들의 ‘건설혼’을 찬연히 빛내이고 남음이 있다. 선로가 마침내 악수를 하게 된 지점에는 지난 26일 거행된 감격의 연결식에 붓박은 여덟 개의 ‘스파이크(釘)’가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하략)

해방이 되어 일제가 물러가고 ‘경경선’은 이내 ‘중앙선’으로 그 명칭이 환원되었는데, 지금은 ‘경경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도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단양역 앞의 한쪽을 지키고 있는 저 ‘경경선 전통지지 기념비’는 일제가 비상시국에 대비하여 경부선 철길을 우회하거나 대체하는 용도로 건설했던 제2의 종관철도, 즉 ‘경경선’의 존재를 상기시켜주는 사실상 유일한 흔적이 아닌가 한다.

지금에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중앙선’이라는 이름이 늘상 자연스럽게 오르내리지만, 그렇더라도 그 명칭 자체가 일본의 내륙경유철도인 ‘츄오우센(中央線)’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니만큼 애당초 그리 탐탁지 않은 이름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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