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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중도일보] 광복 직후 형무소 지킨 의사 ‘안사영’, 대전교도소·대전의사회 ‘의료협력 결실’

2026년 4월 8일 193

교도소 직원들 안사영에 ‘혜옥(惠獄)’ 호 선물 독립운동가로서 17년간 수용자에 사랑 베풀어 대전시의사회, 의료인 충원과 장비지원 협력 기사 요약 독립운동가 출신인 안사영 선생은 광복 후 17년간 대전형무소 의무과장으로 재직하며 소외된 수용자들의 건강과 위생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대전교도소는 고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교도소에 사랑을 베풀었다’는 의미의 호인 ‘혜옥(惠獄)’을 헌정하는 추호식을 개최하며 그의 희생정신을 재조명했습니다. 이에 대전시의사회도 고인의 뜻을 이어받아 대전교도소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교정시설 내 의료 공백 해소와 환경 개선을 위해 적극 협력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광복 후 대전형무소 의무과장을 맡아 17년간 수용자를 돌본 안사영(安思永, 1890~1967)에게 후배 공무원들이 ‘혜옥(惠獄)’이라는 호를 선물했다. <중도일보 2월 23일자 8면 보도> 대전교도소는 4월 6일 청사 2층 대회의실에서 안사영 대전형무소 의무과장의 추호식을 개최했다. 이날 김재술 대전교도소장과 전병구 의료과장, 정식영 총무과장, 노순천 보안과장 등이 참석하고 임정혁 대전시의사회장과 장남식 대전시의사회 고문 그리고 심정임 필한방병원 정신의학과 전문의가 함께 했다. 안사영 선생은 광복 직후 1946년부터 1962년까지 대전형무소 수용자들의 건강 관리, 질병 치료, 보건 위생 업무를 전담하는 의사이면서 의무과장이었다. 공주 영명학교(1회)에서 수학하고 서울에서 세브란스연합 의학전문학교를 1917년 졸업한 청년의사로서, 병원을 차리기보다 가장 낮고 존중받지 못하던 당시 형무소 수형자를 돌보는 길을 걸었다. 그는 대전형무소 의무과장으로 지내는 동안 ‘대전 중촌동 1번지’에 거주했는데, 이 역시 대전형무소 내에 있었던 숙소로 파악됐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그는 1919년 초 국권회복의 뜻을 품고 중국

[경향신문] 반민특위 강제 해산 계기됐던 ‘국회 프락치 사건’ 피해자 유족들, 77년 만에 재심 신청

2026년 4월 6일 277

이승만 정권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강제해산하는 계기가 됐던 ‘국회 프락치 사건’ 피고인들의 유족이 77년만에 재심 청구에 나선다. 1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됐던 노일환, 강욱중, 김병회, 서용길 등 제헌의회 의원들의 유족은 사건에 대한 재심 청구서를 오는 2일 법원에 제출한다. 재심 청구서를 보면 유족들은 “피고인들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제헌 국회의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의 잔혹한 고문과 위법한 절차에 의해 ‘프락치’라는 오명을 쓴 채 신체의 자유와 명예를 박탈당했다”며 “이제라도 위헌적인 국가 폭력으로 왜곡된 사법 정의를 바로 세우고, 피고인들과 그 유족의 맺힌 한을 풀 수 있도록 재심 개시를 결정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청구한다”고 말했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5~8월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된 이른바 ‘남로당 프락치 의원’ 명단의 암호 문서를 발견했다며 소장파 국회의원 15명을 체포해 이 중 13명을 구속했다. 1950년 1심에서 서울중앙지법은 이들에게 3~10년형을 선고했다. 이어 같은해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울고법은 1951년 12월 전쟁 중 기록이 멸실됐다며 공소 기각 결정을 내렸다. 13명 중 서용길을 제외한 12명은 한국전쟁 중 북으로 갔다. 이들이 어떤 이유로 북으로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된 의원 대부분은 친일파 청산에 매우 적극적이거나 반민특위에 참여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출범해 활동하다 같은해 6월 활동이 중단됐고 10월 해산됐다. 이강수 반민특위 기념사업회 학술위원장은 지난해 5월 민족문제연구소에 기고한 글에서 국회 프락치 사건을 “이승만 전 대통령이 경찰, 군, 검찰,

[제주일보] 제주4.3 양민 학살….군경 지휘관 ‘국립묘지 안장’ 예우

2026년 4월 6일 289

집단 학살 작전 전개해도 ‘서훈.공로’ 이유로 현충원에 안장 제주4·3 당시 양민 학살에 가담한 군·경 지휘관들이 국립묘지에 안장돼 논란이 일고 있다. 2일 본지 취재 결과, 4·3당시 강경 진압 작전으로 전개했음에도 서훈·공로를 인정받거나 전몰·전상·순직 등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이들의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구체적으로 서울 현충원에 박진경·김명·문용채·최석용, 대전 현충원에 함병선·서종철·유재흥·김두찬의 묘비가 있다. 2003년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박진경은 1948년 5월 6일 육군 9연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한 후 양민을 무차별 검거·연행, 강경 진압 작전을 주도하고도 그해 6월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김명 대위는 2연대 작전참모이자 무장대(산사람)로 위장해 활동한 특수부대 부대장으로 ‘함정 토벌’로 많은 양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4·3당시 제주경찰장이었던 문용채는 일본군 헌병 소위 출신으로 도민들에게 무조건 경찰에 순종할 것을 요구했고, 1948년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최석용은 항일운동을 하다 변절한 이래 1949년 2연대(연대장 함병선) 소속 대대장으로 부임 후 서북청년회를 지휘하며 강경 진압 작전의 선두에 서서 제주도민을 학살했다.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함병선은 제2연대장 부임 후 1949년 1월 조천면 북촌리 주민 400여 명의 집단 학살을 주도하고, 두 차례 군법회의 최고지휘관으로서 재판 절차 없이 수많은 민간인을 처벌했다. 또한 11연대가 9연대로 교체되면서 9연대 부연대장을 맡았던 서종철과 민간인 학살을 명령했던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도 도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사령관으로 부임한 유재흥 대령은 선무공작으로 양민들을 귀순시켰지만, 많은 이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돼 육지

[전북일보] 친일잔재 청산 확실히 해야한다

2026년 4월 1일 251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지 작년에 80년이 됐으나 역사 청산이 크게 부진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광복회가 지난해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실시한 독립유공자 후손과 국민 대상 정체성 인식조사에서 ‘해방 이후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는 응답이 후손 78.0%, 국민 70.9%로 나타났다. 지금이라도 친일 잔재 청산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후손 83.1%, 국민 71.8%에 달했다. 미완의 과제임이 분명하다. 때마침 전북특별자치도가 친일 잔재 청산에 다소 미온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도 스스로 청산대상으로 규정한 인물들의 선양사업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전북도는 지난 2020년 ‘친일 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방안 연구용역’을 통해 도내 친일 잔재 133건을 규명했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미화하는 등 친일 행적이 뚜렷한 인물들을 명백한 청산대상으로 분류한 것이다. 하지만 올해 문화재단 지원사업에서 청산대상으로 지목된 인물을 기리는 특정 단체가 선정돼 자금지원을 받게 된 것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재단 측은 “기획안 내용이 우수하고 제자들에게까지 연좌제를 적용하기 어렵다”고 해명했으나 어쨋든 친일잔재 논란을 만든 것은 어설픈 행정이다. 군산시가 운영하는 채만식문학관은 연간 1억3000만원의 예산이 투입되는데 친일행적 논란과 관련, 비판적 시각이 없지 않다. 군산의 ‘백릉길(채만식)’이나 고창의 ‘인촌로(김성수)’ 등 친일인사의 호를 도로명주소로 고수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 시각이 있다. 물론 과거에 대한 행적에 대한 비판과 예술 창작에 대한 평가는 별개의 문제로 볼 수도 있겠으나 민족의식 고양이라고 하는 큰 틀에서 벗어나선 안된다. 지금까지도 친일잔재 청산이 완결되지 않은 것은 분명 큰

[경향신문] 대통령도 호응한 ‘고문 수사관’ 상훈 취소···7년 전 시민사회도 “정부가 나서야” 주문

2026년 4월 1일 284

북한 공작원에 포섭돼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1986년 2월 체포된 김양기씨(76)는 그를 지하실에 묶어두고 발가벗겨 고문하던 육군본부 505보안대 지휘관들의 이름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지휘관들은 공을 인정받아 상훈을 받았다. 김씨의 끈질긴 요구로 2018년 지휘관 3명의 보국훈장과 대통령 표창이 취소됐다. 그는 30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자신을 고문한 일을 공적 삼아 떵떵거리며 사는 가해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속이 쓰렸다고 말했다. 김씨는 “1994년 이들을 고소했지만 담당 검사가 ‘내가 무슨 힘이 있어요. 법을 고치세요’라고 할 뿐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25일 사망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씨의 상훈 대부분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정부가 뒤늦게 고문 수사관 등의 상훈을 전수조사해 취소하는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김씨처럼 억울한 목소리는 어제오늘 나온 게 아니었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고 상훈 박탈을 주장하던 시민사회의 움직임은 예전부터 계속돼 왔다. 2019년 12월 홍익표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현 청와대 정무수석)이 ‘역사정의실천연대 과거사특위’에 의뢰해 작성한 ‘과거청산 입법 현황과 과제’ 문건에는 국가폭력 가해자 상훈 취소가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이를 입법화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특위는 2012년 민족문제연구소 등 422개 단체가 모인 단체로 친일·독재 잔재 청산과 역사정의 실현을 위해 상훈 취소 등을 추진해왔다. 특위는 이 문건에서 당시 행정안전부가 2018·2019년 간첩조작사건 및 광주민주화운동 등 관련자 61명의 서훈 취소 결정을 한 것에 대해 “소극적·수동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인권침해 사건 238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했고, 79개

민족사랑 2026년 3월호

2026년 3월 27일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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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잔혹하게 폭행하고 사회적 불구로… 가해자의 이름 공개합니다

2026년 3월 24일 376

[1980 사북, 늦은 메아리] <왕사남> 천만 넘는 나라에서 46년간 방치된 이 사건 [기자말] 특별기획 ‘1980 사북, 늦은 메아리’는 박봉남 감독의 영화 <1980 사북> 전국 상영을 계기로 공론화한 사북 사건을 단지 과거사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국가의 대응, 공동체와 시민 사회의 변화 과정을 추적 기록해 국가 폭력의 기억과 치유 과정을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S’의 이야기 그는 46년을 살았다. 태어나 자라고 학교 들어가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다시 자녀를 낳아 그 아이들이 성인의 문턱에 와 있을 시간. 46년이면 ‘세월’이라는 말이 붙어도 좋을 만큼, 누구에게든 삶 전체가 완성되기에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에게 지난 46년은 마치 존재할 가치가 없었던 것 마냥 삶 전체가 송두리째 부정 당하고 파괴되어 온 시간이었다. 그동안 그는 부당하게 덧씌워진 누명과 낙인 속에서 불명예를 안고 숨죽이며 살아왔다. 가장 가까운 이웃들이 제일 먼저 그를 멀리했고, 심지어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직장을 잃고 변변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해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지도 가르치지도 못했고, 몸은 나이보다 더 늙고 병들었다. 어디 가서 높은 분들에게 좀 이야기를 하자고 해도 본체 만체,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들은 체 만 체다. 왜곡된 과거 때문에 어디 가서 당당히 말하기도 힘들었던 그의 이름을 그냥 S라고 하자. ‘K’라는 두려운 이름 S는 누구 때문에 삶이 이렇게

[오마이뉴스] 부천의 독립운동, 왜 1919년 3월 24일 만세운동이 벌어졌을까

2026년 3월 24일 284

소사독립만세운동은 이후 1927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으로 이어지다 1919년 3월 1일,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 민족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진행했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 지쳐있던 우리 민족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3.1운동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만주와 연해주 등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해외에서도 진행되었으며, 심지어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도 진행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희생으로 진행된 3.1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큰 의미를 남겼다. 독립운동가들은 한달 후인 4월 11일 중국 상해에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때까지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군주제를 반대하며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을 지향하여 현재의 대한민국의 모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천은 왜 3월 24일 만세운동이 진행되었을까? 이 날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기 서부지역의 3.1운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통해 확산되었다. 지금처럼 방송과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으로 장날에 정보가 많이 교환되었기 때문이다. 김포지역은 1919년 3월 22일 시작하여 29일까지 8일간에 걸쳐 양촌면, 월곶면, 하성면, 고촌면 등에서 진행되었다. 인천에서는 3월 24일 계양의 황어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약 600명의 사람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진행하였는데 일제 순사들이 주도자인 심혁성을 체포하자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심혁성을 석방시키기 위해 호송순사를 공격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순사의 칼에 이은선이 사망하게 된 것이다. 분노한 사람들은 이은선의 사망원인을 밝히기

[연합뉴스] “야스쿠니 합사,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 두 번 죽이는 행위”

2026년 3월 24일 235

日서 ‘합사 철회 소송 제기’ 희생자 손주 세대 “젊은 세대에도 굴욕” (도쿄=연합뉴스) 경수현 특파원 = “일본 야스쿠니신사 합사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이고 할아버지가 합사돼있다는 것은 저 같은 젊은 세대에도 매우 불명예스럽고 굴욕적인 일입니다.”. 야스쿠니 신사에 무단 합사된 희생자의 손주 세대 6명이 지난 9월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지방법원)에 제기한 소송의 2차 구두변론이 23일 열렸다. 원고 중 한 명인 박선재 씨는 재판소에 낸 진술서에서 “할아버지를 강제 동원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에 그치지 않고 가족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야스쿠니 신사에 무단 합사한 것은 우리 집 전체에 치유할 수 없는 피해를 주고 있다”며 이처럼 강조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합사를 취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씨의 할아버지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동원돼 중국에서 억울하게 숨졌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태평양 전쟁 때 숨진 자국 군인뿐만 아니라 강제로 끌려가 참전한 한국인 전몰자 명부도 야스쿠니신사에 제공하는 바람에 태평양전쟁 A급 전범과 함께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있다. 그는 이날 재판 후 일본 시민단체 등의 지원으로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열린 2차 구두변론 보고 모임에도 참석해 “잘못된 역사 문제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고 빨리 해결되기를 바란다”며 “일본에서도 많은 분이 도와준다는 것을 직접 보고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번 소송을 지원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은 작년 12월 23일 한국 법원에도 야스쿠니신사 합사 취소 소송이 제기됐다며 일본 정부가 재판에 응하지

[오마이뉴스] 고향 구미에 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바라는 이유

2026년 3월 24일 207

지난 14일, 서울역 근처 민족문제연구소를 처음 찾았다. 과거사 청산을 연구하는 시민모임 ‘즐기게’에서 ‘네팔의 이행기 정의’를 발제하기 위해서였다. 서울로 가는 길에 마침 식민지와 이행기 정의에 관한 논문을 읽었다. 이행기 정의란 독재나 전쟁, 식민 지배 등 과거의 불의를 청산하고 사회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제도적 노력을 뜻한다. 발제를 하러 도착한 곳이 민족문제연구소였으니, 그 우연이 어쩐지 필연처럼 느껴졌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5주년을 맞아 기획전으로 ‘세상을 바꾼 시민, 함께 만든 역사’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발제 전에 이들 전시물을 천천히 둘러보며 오래전부터 품어온 생각들이 다시 떠올랐다. 민족문제연구소 하면 임종국 선생이 먼저 떠오른다. 평생을 친일파 연구에 바친 학자로,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연구소가 완성한 <친일인명사전>은 우리 사회가 외면해온 불편한 진실을 기록한 귀중한 문헌이다. 창립 35주년, 사람으로 치면 장년에 접어든 이 연구소가 걸어온 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전시물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법학을 공부하면서 <친일인명사전>을 여러 차례 참고했다. 사전에 등재된 법학자로는 전봉덕, 유진오, 홍진기 등이 있다. 전봉덕은 일제강점기 고위직 경찰이었고, 유진오는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홍진기는 일제 판사로 복무했다. 이들은 광복 이후 친일 행적을 지운 채 법조계와 학계, 언론계의 사회지도층으로 행세했다. 그들의 후학들 중에 이들을 여전히 찬양하는 행태가 남아 있으니, 무지의 소치인지, 아니면 그 삶을 은근히 동경하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씁쓸하기는 마찬가지다. 고향 구미로 눈을 돌리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