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부천의 독립운동, 왜 1919년 3월 24일 만세운동이 벌어졌을까

141

소사독립만세운동은 이후 1927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으로 이어지다

▲부천3.1운동 재현행사2019년 3월 24일,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와 부천시민연합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시민들이 참여하는 <부천독립운동재현행사>를 진행하였다. 30여 단체와 120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하여 부천의 3.1운동이 시민들에게 알려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박종선

1919년 3월 1일,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 민족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진행했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 지쳐있던 우리 민족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3.1운동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만주와 연해주 등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해외에서도 진행되었으며, 심지어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도 진행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희생으로 진행된 3.1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큰 의미를 남겼다. 독립운동가들은 한달 후인 4월 11일 중국 상해에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때까지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군주제를 반대하며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을 지향하여 현재의 대한민국의 모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천은 왜 3월 24일 만세운동이 진행되었을까?

이 날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기 서부지역의 3.1운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통해 확산되었다. 지금처럼 방송과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으로 장날에 정보가 많이 교환되었기 때문이다.

김포지역은 1919년 3월 22일 시작하여 29일까지 8일간에 걸쳐 양촌면, 월곶면, 하성면, 고촌면 등에서 진행되었다. 인천에서는 3월 24일 계양의 황어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약 600명의 사람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진행하였는데 일제 순사들이 주도자인 심혁성을 체포하자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심혁성을 석방시키기 위해 호송순사를 공격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순사의 칼에 이은선이 사망하게 된 것이다. 분노한 사람들은 이은선의 사망원인을 밝히기 위해 밤에 계양면사무소에 모였는데 면서기인 이경응이 나오지않자 이경응 집까지 찾아가 불태웠으며, 동시에 계양면사무소도 불태워 각종 서류를 없애버렸다.

이러한 사건이 소사(素砂)까지 전해졌다. 같은날 밤에 소사 6개마을 주민들은 밤에 높은 곳에 올라가 화톳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소사역 남부에 있던 소사경찰관주재소 순사가 와서 해산시켰는데, 6개마을 주민들이 밤에 동시에 높은 곳에 올라 화톳불을 피우고 만세운동을 진행한 것을 보면 약속을 하고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만세운동의 물결은 3월 27일 다주면 문학면 관교리 산상 화톳불 시위로 이어졌으며, 28일 에는 남동면과 용유면 관청리 그리고 다주면 야간 화톳불로 이어졌다. 4월1일에는 소래면 신천리의 사천시장과 대부면 영전리, 4월7일 영흥면 내리, 4월9일 덕적면 진리로 이어졌다. 즉, 경기도 서부의 내륙 뿐만아니라 인천 도서지역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에 대한 열기가 김포, 인천 계양, 부천 소사, 시흥, 인천 남동과 문학 등을 걸쳐 영흥도와 덕적도까지 확산되었던 것이며, 그 중심에 부천이 있었다.

3.1운동 이후의 항일운동

3.1운동은 이후 부천사회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경계와 감시가 심해지자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였다. 대신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자금을 모으고, 상해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을 전파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윤응념이 있다. 윤응념은 임시정부 교통참사(交通參事)를 맡으며 1920년에 인천과 상해를 오가면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특히 1923년 1월 26일 밤에 윤도중, 이호승과 함께 벌응절리에 사는 박주순(朴周淳)의 집을 찾아가서 독립자금을 내놓으라고 하였으나 주인이 없어 빈손으로 돌아왔다. 1923년 5월 1일 다시 찾아갔으나 안타깝게도 인천경찰서의 수색에 의해 잡히고 말았다.

1927년 9월 24일에는 소사역(素砂驛)에서 하역일을 하던 노동자들이 역장의 불합리한 요구에 반대하며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이 당시 역장은 일본인으로 기차가 정차하여 빠른 시간 내에 물품을 하역해야하는데 본인 아이가 먹을 배를 사오게하여 노동자는 하역을 한 후 사온다고했는데 자기 말을 듣지않는다고하며 노동자의 뺨을 때리고 발로 구타하였다. 이에 분개한 5명의 노동자들은 소사역장의 사과를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1927년 10월 28일 소작인들은 부평농민조합을 창립하며 소작료인하 투쟁을 진행하였다. 이 당시 부천과 인천 그리고 김포까지 걸쳐있었던 부평평야에 농업용수를 대는 곳이 부평수리조합이었는데, 과도한 수세를 받았다. 과도한 수세로 인해 다수의 지주들이 갑자기 소작료를 인상하자 소작인들은 여기에 분개하며 부평농민조합을 창립하며 소작료 인하 투쟁을 진행하였다.

이연형지사는 1942년 5월 소사리에 위치한 주식회사 일흥사(日興社)에 취직하여 독립자금을 모금하였다. 하지만 1942년 6월 27일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뤘다. 1년 넘게 감옥생활을 하다 이듬해 9월 25일 가출옥하였다.

부천의 3.1운동인 소사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4일 시작되었지만 그 정신은 이후 소사역하역노동자동맹파업, 부평농민조합 창립 및 소작료 인하투쟁, 윤응념지사와 이연형지사의 독립자금 모금으로 이어졌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와 부천시민연합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2019년에 1200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부천독립운동재현행사>를 진행하였다. 예술가들은 재현행사를 기획하였으며, 시민들은 시대복을 입으며 직접 재현극에 참여하였다. 시민이 주도하여 시민이 기념하는 지역의 축제가 된 것이다. 이런 뜻깊은 날이 부천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지고, 단순한 기념이 아닌 지역의 문화예술행사로 계승발전되길 바라본다.

박종선 기자

<2026-03-2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부천의 독립운동, 왜 1919년 3월 24일 만세운동이 벌어졌을까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