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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추모각 영정 교체후 `북적’-연합뉴스(07.05.08)
유관순 추모각 영정 교체후 `북적’ (천안=연합뉴스) 이우명 기자 = 유관순 열사 새 표준 영정이 안치된 뒤 충남 천안시 병천면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 관람객들이 북적이고 있다.8일 천안시 사적관리소에 따르면 지난 2월 28일 충남대 윤여환 교수(54. 회화과)가 그린 유관순 열사 영정으로 교체된 뒤 유 열사 추모각 관람객이 크게 늘었다.올 3-4월 유 열사 추모각 관람 인원은 4만5천178명으로 전년 동기 4만1천564명에 비해 8.7% 증가했다.더욱이 봄 행락철을 맞은 지난달 중순 이후에는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단체 관람객이 하루 평균 10개 팀에 이르는 등 관람객이 전년 동기보다 30% 이상 늘어난 1일 3천명을 넘는다고 사적지 관리소 관계자는 전했다.지난 어린이날 부모님과 사적지를 찾았다는 황준태(9. 일봉초 2년) 어린이는 “유관순 할머니의 모습도 보고 봉화를 올렸다는 매봉산 등산도 했다”며 ” 친구들과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다.한편 지난 2월 28일 이전에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 걸려 있던 표준영정은 1986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으로, 실제 유관순 열사의 얼굴과 차이가 나고 친일작가가 그린 작품이라는 지적에 따라 교체됐다.
정부 진상규명위 ‘친일 705명’ 이달말 추가발표
정부 진상규명위 ‘친일 705명’ 이달말 추가발표(한겨레신문, 09.11.09)
조갑제, “친일은 기본적으로 생존의 수단”
조갑제, “친일은 기본적으로 생존의 수단”(경향신문, 09.11.09)
동해 옛 명칭 ‘창해’ 고지도 발견-연합뉴스(07.05.08)
동해 옛 명칭 ‘창해’ 고지도 발견 (부산=연합뉴스) 조정호 기자 = ‘동해’의 명칭을 결정하는 국제수로기구(IHO) 총회가 7일 모나코에서 개막된 가운데 `동해’의 원래 명칭이 `창해'(滄海)였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부산외대 김문길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학을 가르쳤던 육당 최남선이 펴낸 ‘조선역사지도’에 수록된 고지도 가운데 고려중기 이후 `동해’를 ‘창해’로 표기한 지도를 발견, 이날 공개했다.친일 문인인 최남선이 직접 제작한 `조선역사지도’는 모두 16쪽으로 조선총독부의 승인을 받아 편찬돼 고등학교 지리교과서로 사용됐으며 수차례 재발행되면서 해방이후까지 사용됐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그는 또 일본 육군성이 러.일전쟁을 앞두고 1904년 출판한 고대반도부근지형도(古代半島附近地形圖)’에도 동해를 `창해’로 명명했다며 고지도를 추가로 공개했다.2천년 내지 1천년전까지 동해가 창해로 불렸다는 것을 이 고지도들을 통해 알 수 있다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김 교수는 창해는 넓은 바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옛부터 우리 선조들이 지은 고유명사며 조선시대에는 `조선해’와 `동해’를 혼용해 사용했다고 덧붙였다.그는 “일본이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 맞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가 `동해’라는 명칭보다는 옛부터 사용해왔고 국명이 들어간 `조선해'(SEA OF KOREA)라는 이름을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동해 옛 명칭 ‘창해’ 고지도 발견-연합뉴스(07.05.08)
동해 옛 명칭 ‘창해’ 고지도 발견 (부산=연합뉴스) 조정호 기자 = ‘동해’의 명칭을 결정하는 국제수로기구(IHO) 총회가 7일 모나코에서 개막된 가운데 `동해’의 원래 명칭이 `창해'(滄海)였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부산외대 김문길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학을 가르쳤던 육당 최남선이 펴낸 ‘조선역사지도’에 수록된 고지도 가운데 고려중기 이후 `동해’를 ‘창해’로 표기한 지도를 발견, 이날 공개했다.친일 문인인 최남선이 직접 제작한 `조선역사지도’는 모두 16쪽으로 조선총독부의 승인을 받아 편찬돼 고등학교 지리교과서로 사용됐으며 수차례 재발행되면서 해방이후까지 사용됐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그는 또 일본 육군성이 러.일전쟁을 앞두고 1904년 출판한 고대반도부근지형도(古代半島附近地形圖)’에도 동해를 `창해’로 명명했다며 고지도를 추가로 공개했다.2천년 내지 1천년전까지 동해가 창해로 불렸다는 것을 이 고지도들을 통해 알 수 있다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김 교수는 창해는 넓은 바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옛부터 우리 선조들이 지은 고유명사며 조선시대에는 `조선해’와 `동해’를 혼용해 사용했다고 덧붙였다.그는 “일본이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 맞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가 `동해’라는 명칭보다는 옛부터 사용해왔고 국명이 들어간 `조선해'(SEA OF KOREA)라는 이름을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친일사전’인물 유공자 대우 정부내 논란
‘친일사전’인물 유공자 대우 정부내 논란(헤럴드경제, 09.11.09)
행안부 “친일파 훈포장 취소될 수도”
행안부 “친일파 훈포장 취소될 수도”(정경뉴스, 09.11.09)
[사설]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과 친일언론-미디어오늘(07.05.10)
[사설]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과 친일언론 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이 최근 내려졌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 9명이 일제에 의해 소유권을 인정받은 토지를 국가에 귀속토록 결정했다. 해방 이후 최초로 본격적인 친일 청산이 시작된 것이다. 이 위원회가 역사적인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을 보면서 언론의 친일 범죄에 대한 청산 작업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돌이켜 보면, 일제 치하에서 친일 언론의 반민족적 폐해는 자심했다. 일제는 3·1운동 뒤 한국인에게 신문 발행을 허가하는 조치 등을 취했다. 이는 당시 팽배한 반일의식을 탄압일변도로 봉쇄하는 대신 그것을 신문에 발산시킴으로써 폭발을 방지하려는 술책이었다. 또한 3·1운동 뒤 나타난 지하신문의 위력을 줄이고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일제의 한반도 점령정책에 동원된 국내의 지주, 토호, 매판 자본가들에 의해 조선·동아일보 등이 등장했다.조선·동아일보는 출범 당시부터 합법지로 살아남기 위해 체제언론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들 신문은 일제로부터 독립을 실현한다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기사나 논평은 외면했다. 대신 일제의 구체적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제도언론적 차선책만을 앞세웠다. 이 신문들은 외세로부터 독립이라는 민중의 정치적 요구에 침묵하면서 일제 총독부 통치를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의 비판 언론 역할을 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기능적으로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협력한 반민족적 언론행위다.만주사변이 발생한 1931년부터 일제의 언론 통제가 강화되면서 한반도에서 발행된 모든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와 다름없게 된다. 어느 신문도 일제의 통치정책을 비판하지 못했다. 1936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동아일보의 일제에 대한 ‘언론보국’은 경쟁적으로 심화되었다. 징용과
[사설]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과 친일언론-미디어오늘(07.05.10)
[사설]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과 친일언론 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이 최근 내려졌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 9명이 일제에 의해 소유권을 인정받은 토지를 국가에 귀속토록 결정했다. 해방 이후 최초로 본격적인 친일 청산이 시작된 것이다. 이 위원회가 역사적인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을 보면서 언론의 친일 범죄에 대한 청산 작업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돌이켜 보면, 일제 치하에서 친일 언론의 반민족적 폐해는 자심했다. 일제는 3·1운동 뒤 한국인에게 신문 발행을 허가하는 조치 등을 취했다. 이는 당시 팽배한 반일의식을 탄압일변도로 봉쇄하는 대신 그것을 신문에 발산시킴으로써 폭발을 방지하려는 술책이었다. 또한 3·1운동 뒤 나타난 지하신문의 위력을 줄이고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일제의 한반도 점령정책에 동원된 국내의 지주, 토호, 매판 자본가들에 의해 조선·동아일보 등이 등장했다.조선·동아일보는 출범 당시부터 합법지로 살아남기 위해 체제언론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들 신문은 일제로부터 독립을 실현한다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기사나 논평은 외면했다. 대신 일제의 구체적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제도언론적 차선책만을 앞세웠다. 이 신문들은 외세로부터 독립이라는 민중의 정치적 요구에 침묵하면서 일제 총독부 통치를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의 비판 언론 역할을 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기능적으로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협력한 반민족적 언론행위다.만주사변이 발생한 1931년부터 일제의 언론 통제가 강화되면서 한반도에서 발행된 모든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와 다름없게 된다. 어느 신문도 일제의 통치정책을 비판하지 못했다. 1936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동아일보의 일제에 대한 ‘언론보국’은 경쟁적으로 심화되었다. 징용과
[사설]진정성 있는 사과와 용서로 사회통합 이루자
[사설]진정성 있는 사과와 용서로 사회통합 이루자(뉴스천지, 09.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