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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이 히로유키 日 시민활동가
<인터뷰> 타카이 히로유키 日 시민활동가(연합뉴스, 10.08.30)
경북도의회 독도수호특위 재구성
경북도의회 독도수호특위 재구성(연합뉴스, 10.08.30)
‘녹천정’과 ‘통감관저’ 사이
장호철 회원 ▲ 통감관저 터 표석 제막식. 서울시의 동의를 얻지 못해 이 표석은 ‘무허가’가 될 수도 있다. ⓒ <한겨레> 어제는 꼭 1백 년 전에 나라를 빼앗긴 날이었다. ‘경술국치’라는, 저 20세기 초엽의 민족적 결기가 묻어나는 이름에 배어 있는 겨레의 분노와 한은 쉽게 잴 수 없다. 그러나 일백년 이쪽의 현재는 무심하고 심상하기만 하다. 한때는 청소년들이 ‘마이클 잭슨의 생일’로 기억하던 이날은 일요일이었고 전국 각지에서 철늦은 여름비가 내렸다. 그 빗속에서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모여 ‘식민주의 청산과 평화실현을 위한 한일시민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고 뉴스는 전한다. 뒤늦었지만 양국 시민들이 ‘강제병합’이 무효임을 밝히는 공동선언을 발표한 것은 뜻 깊은 일이다. ‘통감관저 터’ 표식 제막 이날 공동선언에 앞서 양국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한일 강제병합조약이 맺어진 서울 남산의 통감관저 터에 ‘통감관저 터’라는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 편지와 문자 메시지가 날아온 대로다. 표석은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관련 사실을 새겼다. 통감관저터 일제 침략기 통감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표석을 세운 곳은 일본공사관, 한국통감 관저, 조선총독 관저 등 시기별로 명칭은 달리했지만 일제침략과 식민통치의 수뇌부가 위치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일본공사관이 자리 잡았으며,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1906년 2월부터 통감관저로 사용되었다. 1910년 8월 22일 월요일 오후 4시, 일본의 3대
[100年 편지] 항일 음악가 한형석 선생님께
항일 음악가 한형석 선생님께 [ 독립정신 답사단 대학생 김건우 씨의 편지 ] 우리는 한국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우리는 한국 광복군, 악마의 원수 쳐 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진주 우리나라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해메고 있다.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고향에,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 앞에 밟힌 꽃 포기 있다.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 총 어깨 매고, 피 가슴에 뛴다. 우리는 큰 뜻 품은 한국의 혁명청년들.민족의 자유를 쟁취하려고 원수 왜놈때려 부시어, 희생적 결심을 굳게 먹은 한국 광복군 제 2 지대.앞으로 끝까지 전진, 앞으로 끝까지 전진!조국 독립을 위하여,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압록강 행진곡> 한형석 선생님 ▲ 한형석(1910.2.21~1996.6.14).일제강점기 광복군에서 활약한 독립운동 음악가. 상하이 신예예술대학에서 작곡 등을 공부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예술조장,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 등으로 복무했으며,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자 <광복군가집>1,2집을 발간하고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을 작곡했다. 당신이 작곡한 초등학교 4학년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는 압록강 행진곡입니다.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 마다 타국에서의 고난의 삶을 살다간 독립군 선배님들을,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저의 뒤에서 빙긋이 웃고 계실 당신을 생각합니다. 제가 당신을 처음 알 게 된 것도 바로 이 노래를 통해서였습니다. 히스토리채널의 다큐멘터리 ‘일제문화잔재 60년(1부)-우리가 부르는 황국의 노래’에서 처음으로 독립군가가 우리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한 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반쪽 독립운동사 복원 중
반쪽 독립운동사 복원 중 3·1절 이어 8·15에도 사회주의계열 서훈 분단으로 왜소해진 반쪽의 항일투쟁 역사가 더디지만 꾸준히 복원돼가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3·1절에 이어 광복절 포상에서도 사회주의계열 인사 47명을 서훈했다. 이로써 정부가 인정한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는 1백1명이 됐다. 독립운동가 포상은 건국훈장과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으로 나뉜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의 5등급으로 세분되어 전체 포상등급은 총7개 등급으로 이뤄져있다. 사회주의계열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을 받은 이는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여운형 선생이다. 광복60년을 맞아서야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에 대한 복원이 시작된 만큼 아직까지는 공적이 매우 뚜렷한 인사 몇 명에게만 서훈이 주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계열 인사는 포상등급의 상위에 주로 포진돼있다. 이번 광복절 포상에서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은 6명 가운데 5명이 사회주의계열 인사이다. 3·1절 1주기를 맞은 1920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태극기를 들고 조선인들이 만세기념 시위를 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포상실무에 따르면 건국훈장 독립장 이상은 “8년이상 독립운동을 했거나 독립운동으로 인해 8년 이상 옥고를 치른 분”이라고 돼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훈격은 획일적인 기준이 아니라 독립운동에의 참여정도, 당시 직위,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정해진다. 관련 기사 좌파계열 47명 서훈(시민의신문, 05.08.05)여전한 반쪽 독립운동사(시민의신문, 05.07.08)가짜 독립운동가 판친다?(시민의신문,05.07.03)나라 독립한 것 맞나”(시민의신문, 05.06.24) 이번 포상에서 독립장을 받은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공적이 화려하다. 상해파 공산당의 핵심활동가로 국내 사회주의세력 초기형성에 참여한 고 김철수 선생은 1921년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재무담당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EBS 8일부터 방영
파이낸셜뉴스 장승철 기자 도올 김용옥 선생이 출연, 연출, 편집, 내레이션을 혼자 도맡아 제작 당시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아왔던 다큐멘터리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가 오는 8일부터 EBS TV를 통해 방영된다.총10부작으로 방영되는 ‘도올이 본…’는 일제 강점기 시절을 포함한 한국 근대사를 중국 간도와 하얼빈, 러시아 연해주 등을 잇따라 돌며 잊혀진 한민족의 정체성과 독립정신을 고취해가는 교양 다큐멘터리다. 도올이 직접 출연해 우리나라 근대사의 현장을 직접 소개하고 이와 관련된 그의 해박한 지식을 들어보는 방식 으로 프로그램은 진행된다. EBS측은 그의 다큐멘터리 제작에 일절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프로그램은 그러나 결코 상투적이며 지루한 열거형식의 여타 다큐멘터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언제나 사회를 향해 거침없는 쓴소리를 내뱉어 온 도올이기에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는 한국 근대사에 대한 ‘무지’를 깨우려는 강한 메세지를 담고 있다. 2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도올은 “이완용, 송병준 등처럼 친일을 한 사람은 당시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1%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는 당시 독립운동에 투신한 나머지 99%에 대해선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도대체 의식있는 역사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나라의 민족정신은 당시 민족주의 개념이 채 성립되지 않았던 중국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켜줄 만큼 매우 위대했다”며 “우리는 이같은 분명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역사는 오래되어야만 가치가 있다는 그릇된 믿음이 우리의 소중한 근대사를 버리고 있는것”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경술국치 100년 극복하는 표석 세웠다
서울시 무성의로 경술국치 현장 통감관저 터 표석 무허가 상태로 세워져 대자보 김영조 기자 ▲ 비가 오는 가운데 통감관저 터 표석 제막식을 하는 모습 ⓒ 김영조 “경술년 추팔월 이십구일은조국의 운명이 떠난 날이니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여라 갈수록 종설움 더욱 아프다”위 노래는 어제 경술국치 100년, “통감관저 터” 표석 제막식에서 가수 전경옥의 목소리를 통해 울려 퍼진 국치추념가이다. 경술국치를 잊지 말자는 피맺힌 외침이다. 어제(8월 29일) 일본제국주의 강요에 의해 ‘병합조약’이 조인된 100년 만에 서울 남산 ‘통감관저 터’에서는 ‘경술국치’ 현장임을 알리는 표석 제막식이 강제병합100년공동행동 한국실행위원회(상임대표 이해학, 이하 ‘한국실행위’) 주최,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 주관으로 있었다. 아침부터 하염없이 내리던 비는 행사 시간이 다 돼서도 그칠 줄 몰랐다. 아니 그날의 치욕을 통곡하듯 더욱 세차게 내렸다. ‘강제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일본의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 조인되었으며, 8월 29일 일본군이 서울에 집결한 삼엄한 분위기 아래 순종의 조칙으로 공포되었다. 이 조약은 체결과정의 강압성은 물론 황제 칙유(勅諭)에 순종의 서명과 대한제국 국새(國璽) 날인이 없는 등 최소한의 인준 요건을 갖추지 못해 불법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으나, 일본은 지금까지도 “국제법상 합법적”이라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 일제가 ‘강제병합조약’의 근거로 내세우는 순종의 포고문, 이 포고문에는 서명도 없고, 국새는 위조라고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가 밝혔다. ⓒ 민족문제연구소 ▲ 데라우치의 조선 통치방침을 상세히 알리는 포고문. “전 한국원수의 희망에 응하여 그 통치권의 양여를 수락”한다고
수원시 ‘경술국치 100년’ 특별사진전
수원시 ‘경술국치 100년’ 특별사진전(수원일보, 10.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