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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애국지사 운암 김성숙 46주기 추모재(追慕齋)

2015년 3월 30일 460

민성진 회장, “선생님의 높은 뜻 기리는 마음 준비” ▲ 한국의 유산 – 운암 김성숙에서 이미지 캡처 1969년 4월 15일 동아일보는“애국지사 고(故)김성숙 옹, 중태이르도록 병원 한번 못간 가난”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올렸다. 그로부터 46년이 흘렀다.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회장 민성진)는 광복70주년을 맞이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선사 태허스님(운암 김성숙) 의 열반 46기 추모재를 10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봉행한다고 29일 밝혔다. 평안북도 철산 출신인 운암 김성숙 선생은 만해 스님의 영향을 받아 3.1만세운동에 가담 2년 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이후 중국에서 약산 김원봉. 오성륜. 장지락과 함께 의열단 중앙집행위원, 조선의용대 군사위원회 정치부원,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한 후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귀국해 해방 후 신민당 지도위원을 맡아 정계에서 활동하시다 입적했다.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이날 거행되는 추도식은 개식사와 함께 운암김성숙선생과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내빈소개. 약사보고. 내빈추모사. 추모의식(공연). 추모가(석왕사합창단).헌화 및 분향. 조총발사 및 묵념. 폐식으로 진행되며 마지막으로 임정묘역 태허스님 묘지 참배를 하게된다. 정부는 국방부 군악대 장병들의 연주와 의장대 조총발사, 대한불교조계종 석왕사 합창단의 추모가 등이 이어진다. 주요 참석자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예정), 동국대학교 이사장 직무대행 영담스님, 전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 선학원 이사장 법진스님(예정),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 새정치연합 문제인 대표(예정), 안중현 서울보훈지청장,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 김원웅 회장, 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 사무총장(한국유공자협회), 김장희 상산김씨대종회장을 비롯 독립운동가단체장이

‘김구 선생의 벗’ 포우 김홍량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

2015년 3월 30일 579

일제강점기 말기 친일행적 드러나 (서울=연합뉴스) 이신영 기자 = 일제강점기에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농촌 계몽운동과 독립운동가 후원 사업을 벌였던 포우(抱宇) 김홍량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법원 판결로 취소됐다. 서울고법 행정5부(성백현 부장판사)는 김 선생의 아들 김대영 전 건설부 차관이 “고인을 친일행적자로 단정해 서훈을 취소한 것은 부당하다”며 국가보훈처장 등을 상대로 낸 소송의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고 30일 밝혔다. 김홍량 선생은 1906년 양산학교를 설립해 문화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1911년에는 김구 선생 등과 함께 간도 이민계획 등을 세웠다가 8년간 수형생활을 했다. 그는 이런 공적이 인정돼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러나 2010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친일행적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실리면서 논란이 일었다. 김홍량 선생이 1938년 일본군의 중국 남경 점령을 축하하는 발언을 하면서 일본 신사에 참배했고, 1939년 일본군이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해 전시체제 협력방안을 논의했으며 1941년 친일전쟁협력기구인 서울임전보국단 평의원에 선출됐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듬해 서훈이 취소되자 유족들은 김 선생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제에 강요에 의해 수탈당했을 뿐 자발적으로 협조한 사실은 없다며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비록 김 선생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친일인명사전에 적힌 행적이 객관적으로 확인된다”며 “이런 사실들은 서훈 공적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서훈을 취소한 것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유족들은 이런 행위가 일제에 의해 이름이 도용되거나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당시 내용이 신문에 객관적으로 보도된 사실 등을 고려할

[재판으로 본 현대사](25)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사건 (上)

2015년 3월 29일 719

ㆍ민청학련 검거 회오리… 법정에선 우박처럼 ‘사형’ 구형이 쏟아졌다 ■ 민청학련을 겨냥한 긴급조치 4호 유신헌법을 반대하면 15년 징역으로 처벌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에도 불구하고 재야 민주세력과 종교계 일부는 남산(중앙정보부)과 삼각지(비상군법회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 돌파에 나섰다. 이런 시국에 대학사회도 침묵할 리가 없었다. 실인즉, 1973년 하반기에 달아올랐던 학원가의 유신 반대운동은 겨울 방학과 긴급조치 1호로 잠시 주춤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3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자 서울대를 중심으로 전국의 대학가에 심상치 않은 징후가 드러나는 가운데 산발적으로 학생들이 연행되기도 했다. 그런 긴장 속에서 4월3일에는 서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등 서울시내 각 대학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때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로 된 ‘민중 민주 민족 선언’이 살포되었는데, 거기에는 ‘…소위 유신이란 해괴한 쿠데타, 국가비상사태와 1·8조치 등으로 폭압체제를 완비하여 언론을 탄압하고 학원과 교회에 대한 억압을 가중시킴으로써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한국적 민주주의인가? …이에 우리는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집단을 분쇄하기 위하여 숭고한 민족 민주 전열의 선두에 서서 우리의 육신을 바치려 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유신정권에 대한 대학생들의 정면 포격이었다. | 일러스트 | 박건웅 ■ ‘사형!’으로 범벅이 된 광기의 초강수 바로 그날(4월3일) 저녁 10시,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또 하나의 초헌법적인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를 발표했다. 그는 담화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배후조종하에 반국가적 행위를 전개하기 시작했음으로 이를 발본색원하기 위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한다고 했다. 모두 12개항으로

제천시 반야월 기념관 백지화 후폭풍…법정싸움 비화

2015년 3월 29일 409

“일방적 계약 취소 부당”…시공업체 6천만원대 손배소송 제기 (제천=연합뉴스) 전창해 기자 = 충북 제천시가 ‘반야월 기념관’ 건립을 백지화하자 시공업체가 손해배상소송을 제기, 결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29일 제천시 등에 따르면 S건설이 제천시를 상대로 ‘공사계약 해지에 따른 도급업체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 지난 26일 청주지법에서 첫 변론이 있었다. S건설은 지난해 12월 말 “제천시가 계약 완료된 반야월 기념관 건립 사업을 일방적으로 취소해 상당액의 영업 손실을 보게 됐다”며 시를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했다. S건설은 계약 취소 전까지 쓰인 실비와 계약을 정상적으로 이행했을 때 얻을 수 있었던 공사 이윤 등 손해배상액을 약 6천만원으로 책정해 요구했다. 제천시는 2012년부터 10억원의 예산을 들여 백운면 평동리 705번지 일원 1천650㎡ 부지에 건축 면적 200㎡ 규모의 ‘반야월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 대중가요 작사가인 고(故) 반야월은 경남 마산 출신으로, 1948년 ‘울고 넘는 박달재’의 노랫말을 써 제천 박달재를 널리 알렸다. 제천시는 이런 공로를 인정, 반야월 기념관을 세워 그의 유품 350여 점과 자료를 전시하고, 박달재도 홍보하겠다는 복안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그의 친일행적 논란이 불거지면서 지역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기념관 건립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에 제기됐고, 지난해 3월 8일 예정됐던 제2회 반야월 추모 음악회와 기념관 기공식이 모두 취소됐다. 제천시는 결국 기념관 건립을 전면 백지화하고 지난해 11월 S건설에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S건설은 제천시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한 만큼 이에 따른 손해액 전액을 보전해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배 위에서 “대한독립 만세”…3·28 운동 재현

2015년 3월 29일 626

【앵커멘트】 96년 전 오늘.고양행주나루터에서는 일본 헌병을 피해 배 위에서 독립을 외치는 만세시위가 펼쳐졌는데요. 광복 70주년을 맞아, 잘 알려지지 않은 선상 시위를 재현해 민족 의식을 높이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박성완 기자입니다. 【리포트】 일제 치하에서 울려퍼졌던 독립선언문을 학생들이 또박또박 읽어내려갑니다. 【싱크】김보연/지도중학교 2학년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독립운동은 같은 해 오늘, 이곳 행주나루터까지 번졌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날의 함성을 되살리기 위해 150명이 모였습니다. 【인터뷰】최영봉/민족문제연구소 파주지부장 “서울로 유학갔던 학생들이 이 고장으로 다시 돌아와서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선상 만세시위를 하게 됐던 것입니다.” 선창에 따라 ‘독립 만세’ 소리가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울려퍼집니다. 【싱크】 “조선 독립 만세! 만세!” 하지만 총탄을 쏘며 저지하는 일본군에 결국 만세행렬은 방향을 돌려 나루터까지 피신합니다. 어부들의 도움으로 배 2척에 올라탄 사람들. 긴박한 상황에서도 독립을 향한 꿈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붙잡고 배 위에서도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싱크】현장음 “대한독립 만세!”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선상 저항운동을 경험한 학생들은 선조들의 애끓는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인터뷰】이나원/경기도 고양시 “가짜 상황인데도 이 정도로 무서운데, 실제 상황이었으면 얼마나 더 무서웠을까…. 그 용기에 감탄하게 됐어요.” 무심코 뒤로했던, 우리의 오늘을 만든 과거를 돌아보는 뜻깊은 행사였습니다. OBS뉴스 박성완 입니다. <2015-03-29> OBS뉴스 ☞뉴스원문: 배 위에서 “대한독립 만세”…3·28 운동 재현 ※관련포토뉴스 ▲(고양=연합뉴스)

[뉴스펀딩] 5화. 누가 이 청년을 전범으로 만들었는가

2015년 3월 29일 2741

“너무나도 분주한 일생이었다. 26년간 거의 꿈속에서 지내왔다. 불꽃처럼 사라져버렸다. 이 짧은 일생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전혀 자신을 잊고 있었다. 모방과 허무함의 연속, 왜 좀 더 살지 못했는가. 비록 어리석고 불행한 삶일지라도 나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더라면 좋을 것을.. 친구여. 형제여. 자신만의 지혜와 사상을 가지시오. 지금, 나는 자신의 죽음을 앞에 하고, 내 것이라곤 거의 없음에 실망해 있다. 다시 한 번, 고향 생각을 해 보지만, 잘 정리되지 않는다. 아니, 부모님과의 끈이 점점 끊어져가고 있는 듯하다. 내 인생, 최상 최대의 고난이다. 이 방을 나갈 때까지다. 그것도 이제 거의 끝나고, 그리 얼마 남지 않았다. 자, 힘내자. 9시를 알리는 타종, 느긋하게 유유히 종이 울린다..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누님, 아우야, 행복하기를 바란다. 1번 열차 출발! 장하다. 장하다. 나도 그렇게 하리라. 앞으로 2, 3분이다. 나도 저렇게 만세를 외치리라. 왔다. 때가 된 것 같다. 이것으로 이 기록을 마치려 한다. 세상이여, 행복 있으라.” 1947년 2월 25일. 싱가포르의 창이형무소에서 생의 마지막 아침을 맞은 조문상은 밤새 써내려온 유서의 마지막을 이제 막 끝냈다. 곧이어 철창문이 열렸다. 동료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사형수방인 p홀의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걸음, 한걸음, 죽음의 문턱으로 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연합군 포로를 학대했다는 이유로 전범이 되어 교수대에 선 조문상. 개성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美역사학자들 “집단성명 철회없다”…하버드대 지일파교수도 가세

2015년 3월 27일 476

렉시스 더든 “역사는 편한대로 기억하는 것 아냐” (워싱턴=연합뉴스) 노효동 특파원 =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과거사 왜곡시도에 반대하는 집단성명을 주도한 미국 코네티컷 대학의 알렉시스 더든 교수는 5일(현지시간) 연합뉴스·연합뉴스TV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역사란 취사선택해 필요한 것만 기억하는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알렉시스 더든 미국 코네티컷 대학 교수 제공) 알렉시스 더든 교수, 일본 보수학자들 ‘위안부 수정’ 요구 비판 맥그로힐 출판사 “역사학자들 지지”…日극우 추정세력들 ‘협박이메일’ 소문도 (워싱턴=연합뉴스) 노효동 특파원 =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역사왜곡 행태를 비판하는 미국 역사학자들의 집단성명을 주도한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 대학 역사학과 교수는 25일(현지시간) “일본 극우세력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며 “우리는 성명을 철회하거나 수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더든 교수는 최근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니혼(日本)대 명예교수 등 일본 보수학자 19명이 미국 교과서에 나온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술을 수정할 것을 요구한 것과 관련해 연합뉴스에 이메일을 보내 이같이 강조했다. 더든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는 국가가 후원한 시스템에 갇혀 인권을 유린당한 역사적 사실 자체이며 우리 역사학자들은 이와 관련한 연구와 저술, 강의 활동을 하는 이들의 학술적 자유를 지지하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하타 교수 등은 지난 17일 도쿄(東京) 주일외국특파원클럽(FCCJ)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 출판사 맥그로힐사 교과서의 군위안부 기술 중 8곳에 대한 수정을 공식으로 요구했다. 하타 교수는 지난해 고노(河野)담화 작성 과정 검증에 참여한 인사이고 일부는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나 일본 최대 규모의

[2015.3.25] 스티븐슨 암살, 테러인가? 의열인가 1

2015년 3월 26일 596

▲ 라디오백년전쟁 : 스티븐슨 암살, 테러인가? 의열인가 1 ☞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645926 ☞ [다운]: http://down-cocendn.x-cdn.com/data1/guitarkirk/150325nrh1.mp3

친일인사 ‘이달의 스승’ 선정위원, 줄줄이 사퇴표명

2015년 3월 25일 407

[발굴] 황우여 장관, “선정위에 맡겨 사업 계속하겠다”라고 했지만… <img width="570" height="360" style="text-align: justify;"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5/0325/IE001812203_STD.jpg" ▲ 지난 3월초 정부 세종청사에 설치됐다 철거된 ‘3월, 이달의 스승-최규동’ 입간판. [기사 수정 : 25일 오후 4시 11분] ‘이달의 스승’ 사업이 친일 논란을 빚자 선정위원회 소속 위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사퇴했거나 사퇴할 예정인 것으로 처음 확인됐다. “선정위에 모든 일을 맡겨 사업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9명 선정위원 가운데 상당수가 사퇴했거나 사퇴 의사” 25일, ‘이달의 스승’ 선정위원에 따르면, 전체 9명의 위원 가운데 많게는 4명이 그만둘 예정인 것이다. 교육부는 선정위 명단을 기자들은 물론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 소속 의원들에게도 일절 공개하지 않아 왔다. (관련 기사 : ‘천황 위해 죽자’는 이가 민족의 스승? 교육부, 최규동 초대 교총회장 선정 논란) 이날 한 선정위원은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명은 이미 선정위에서 나갔고, 나머지 위원 2~3명도 사의를 표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선정위원은 “교육부가 ‘이달의 스승’ 선정을 2월부터 재촉하는 바람에 시간에 쫓겨 큰 실책을 저질렀다, 우리도 답답하다”면서 “가장 큰 문제는 뽑힌 분들(이달의 스승 12명)에게 망신만 준 형태였다는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이후 교육부는 결국 기존 계획대로 올해 ‘2월의 스승’ 발표는 하지 못했다. 대신 ‘3월의 스승-최규동’을 1순위로 내세웠지만 ‘친일 선정’ 논란에 휘말렸다. 이어 이 선정위원은 “이미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명은 1차 회의만 참석하고

[재판으로 본 현대사](24)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 (下)

2015년 3월 25일 740

ㆍ대폿집서 “유신 나빠” 말했다 징역 10년… “그렇지” 공감했다고 징역 3년… ■ 큰 사건에 가려진 서울대 의대생들의 수난 흔히 ‘긴급조치 1호 사건’ 하면 앞서 살펴본 세 사건처럼 재야 지도자나 종교인이 구속된 큰 사건만 거론한다. 그러나 이 밖에도 긴급조치 1호로 처벌받은 사람은 많았다. 여기에선 당시의 판결문 등 기록과 자료에서 확인되는 ‘피고인’들의 저항과 수난에 대해 잠시 살펴봄으로써 큰 사건의 그늘에 가린 그들의 고난을 ‘다시 보기’하기로 한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이근후(23), 김영선(23), 김구상(24)은 1974년 1월18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 의대 도서관에서 ‘새해가 되면 지난날의 모든 어려움을 씻어줄 새 날이 올 것을 기대했건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더 굵은 쇠사슬과 더 큰 자갈뿐이 아니었던가?’로 시작해 1·8 긴급조치는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독재적 탄압조치라며, 그 조치의 철회를 요구하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생 일동 명의로 된 격문(檄文)을 낭독하였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는 학우들과 1·8 긴급조치의 철회와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8 긴급조치를 즉각 철회하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라.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적극 지지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작성하여 학생들에게 널리 알렸다. 위의 세 학생은 곧 검거되었고, 헌법 개정의 청원을 선동하고 긴급조치 1호를 비방하였다는 이유로 이근후는 징역 10년, 김영선·김구상은 각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74 비보군 형공 제6호 사건 판결).  | 일러스트 | 박건웅 ■ 민주통일당 간부들의 징역 15년, 그리고 민초도 정치권에서는 민주통일당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