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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01] 스티븐슨 암살, 테러인가? 의열인가 2
▲라디오백년전쟁 : 스티븐슨 암살, 테러인가? 의열인가 2 ☞ [팟빵]: http://www.podbbang.com/ch/6647?e=21672978 ☞ [다운]: http://down-cocendn.x-cdn.com/data1/guitarkirk/150401nrh1.mp3
분단의 원인 외인론인가, 내인론인가
ㆍ(1) 분단체제 ▲ ‘계급갈등의 화약고’ 한반도 미국·소련 간 냉전으로 ‘점화’ 전범 미처리… 극우·극좌 공존 1945년 한국인들은 큰 희망을 얻었지만, 미군과 소련군의 분할점령으로 불안 속에서 해방의 큰 걸음을 시작해야 했다. 왜 한국이 분할점령됐어야 했는가? 해방은 그런 억울함 속에서 시작되었고, 그 억울함은 70년이라는 독립의 나이와 함께 또 다른 숙명이 되었다. 분단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든 논쟁의 중심에 있다. 지난 70년간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분단되었는가’와 ‘어떻게 분단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였다. 그렇기에 1980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해방전후사의 인식> 시리즈나, 그로부터 27년이 흐른 2007년 그에 대응해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큰 파문을 던졌다. 해방 전후의 많은 사건들을 분석하고, 논의하는 것은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찾기 위한 작업이었다. 70년 동안 진행된 분단에 관한 연구는 크게 외인론(外因論)과 내인론(內因論)으로 나뉘었다. 분단의 원인이 미국과 소련의 정책,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체제의 형성이었는가, 아니면 국내 정치세력 사이에서의 갈등과 분열이었는가가 핵심 논의사항이었다. ▲1945년 9월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 군함 미주리호에서 우메즈 요시지로 일본군 참모총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 분단논쟁, 1980년대 이후 답보 분단을 둘러싼 논쟁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통해 심화됐다. 식민지 시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한반도에서의 지주와 소작인 간의 계급적 갈등은 해방 후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한반도는 ‘점화만 하면 폭발할 화약통’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분단에 대한 연구는 주로 내적 요인에
한국사회 70년 지배한 분단체제
▲ 시민사회 안에 분단 의식 심어 선거 때만 되면 북풍·남남갈등 ‘분단체제 논쟁’ 현재도 진행형 광복 70년의 우리 현대사에서는 숱한 학술적 논쟁이 진행됐다. 인문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어떤 논쟁이라 하더라도 현실과 무관한 논쟁은 없다. 지난 70년간의 학술적 논쟁 가운데 첫 번째로 검토해보려는 것은 ‘분단체제 논쟁’이다. 1990년대 중반 백낙청과 손호철이 주도한 이 논쟁을 가장 앞서 살펴보려는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1945년 8월15일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광복을 이루자마자 한반도는 분단됐다. 70년간 분단 상태가 한국 사회 전반에 미쳐온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분단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광복 70년의 우리 역사와 사회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분단체제 논쟁이 갖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 논쟁은 이렇게 진행됐다. 영문학자 백낙청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초반까지 분단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해 그것을 분단체제로 개념화했다. 이에 정치학자 손호철이 1994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게재한 ‘분단체제론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비판을 가하자, 백낙청이 반비판으로 대응(‘분단시대의 최근 정세와 분단체제론’)하고, 다시 손호철이 재비판으로 응답(‘분단체제론 재고’)한 것이 논쟁의 줄거리를 이룬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국민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신탁통치 절대반대’ 현수막을 들고 시위에 나서고 있다. ■ 백낙청-손호철, 분단체제 논쟁 백낙청이 제시한 분단체제론의 핵심적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분단된 남북한의 관계는 한반도 전체 및 남과 북 각각의 역사와 현실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둘째, 분단체제는 월러스틴이 말한 근대 세계체제의 하위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내용 개선 필요”
[한국NGO신문] 최정윤 기자 = 4.16 세월호참사 특별대책위원회(이하 특위) 이석태 위원장은 31일 오후 3시, 중구 저동 소재 환경재단 1층 강당에서 시민사회단체대표와 사회원로들을 만나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문제점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 ? 최정윤 함세웅 신부는 “시행령이라는 게 법을 무시하면서 오히려 제재를 가하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한다”며 “지난 해 청와대가 기자회견에서 가족들을 만나면서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것을 보여줘야한다”고 말했다. 최영도 전 국가인권위원장은 “시행령 내용은 국가적 재난을 넘어선 세월호 참사를 은폐하고 방해하려는 행태”라며 “이 사건은 시민이 중심이 돼서 조사해야 마땅하고, 어려운 사태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묘안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윤배 흥사단 이사장은 “한 마디로 법안이 통과됐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 않는 다는 것은 정부의 소통이 아래까지 전달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어 “시민단체가 힘을 모아 목소리를 전달할 때”라며 “앞으로는 젊은이, 언론과 힘을 합쳐 더 많은 목소리가 나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김영오씨는 “저희 가족들은 지금 많은 루머로 고통받고 있다”며 “보상금, 위로금을 많이 받지 않았냐는 루머가 있지만, 정말 단 한 푼도 받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보상금을 받기위해 언제까지 할 것이냐’는 오해를 풀어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시행령의 내용 중 기획조정실이 모든 업무를 장악하는 것은 특조위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라며 “기획조정실에서 서류결제를 미루게 된다면 진상규명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세월호 가족은 이 시행령을 받아들일 수 없고, 시행령을 제대로 처리할
[취재후] 애국가 작사자는 도대체 누구?
■ 60년 동안 작사자 미상…왜? 애국가의 작곡가는 여러분도 익히 아시는 것처럼 안익태 선생입니다. 애국가 악보 오른쪽 상단에 작곡가 안익태란 이름이 정확하게 적혀 있습니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게 끝입니다. 작사자의 자리는 여백으로 텅 비어 있습니다.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틀림없이 누군가 노랫말을 썼을 텐데 왜 대한민국의 국가인 애국가는 작사자가 빈 칸으로 존재하는 걸까요? 정확하게 60년 전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를 꾸려 애국가 작사자가 누군지 공식 조사를 했습니다. 당시에도 꽤 논란이 많았던 듯 애국가 작사자 후보로 여러 명이 등장했는데요. 그 중에서 최종 후보가 된 인물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의 정치인·외교관·언론인·교육자이자 개혁·민권운동가·기독교운동가였던 좌옹 윤치호(1865~1945)입니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는 윤치호를 작사자로 확정할 건지 말 건지를 표결에 부쳤는데, 11대 2라는 우세한 결과가 나왔음에도 만장일치가 아니란 이유로 ‘미확정’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바로 이 결정이 기나긴 논란의 발단이 됐습니다. ■ 흥사단이 제기한 안창호 작사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도로 설립된 흥사단은 2012년 8월 ‘애국가작사자규명발표회’를 열어 애국가 가사를 쓴 사람이 안창호 선생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 근거로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해 여러 인물들의 증언을 담은 구술과 신문기사, 잡지, 단행본 기록 등을 내세웠습니다. 흥사단이 수집한 증언들은 꽤 다양하고 양도 풍부합니다. 그리고 지난달 31일 흥사단이 주최하는 두 번째 ‘애국가작사자연구발표회’가 국회도서관에서 열렸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새롭고 획기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안창호 작사설은 구술에
‘좌파 사관’ 논란 KBS ‘뿌리깊은 미래’ 중징계 받을 듯
여당 추천 심의위원 “80년대 사관 천착, 참전용사 모독해”… PD연합회 “레드콤플렉스로 프로그램 재단” 6·25 한국전쟁을 다루는 과정에서 역사왜곡 논란에 휘말렸던 KBS 특집 다큐멘터리 ‘뿌리깊은 미래’가 결국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중징계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1일 오후 열린 방통심의위 방송심의소위원회(김성묵 위원장)에서는 지난 2월 7일 방송된 KBS <광복70주년 특집 ‘뿌리깊은 미래’> 2부작 중 1부 내용에 대해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 1항과 제14조(객관성)를 위반했다는 다수 ‘경고’ 의견으로 전체회의에 회부했다. 해당 방송은 KBS가 광복 70주년 기획으로 제작한 2편의 다큐멘터리로 6·25 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 사실을 제대로 다루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정에 대한 부정적 묘사, 공산군 피해 누락 등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며 방통심의위에 민원이 제기된 안건이다. ▲ KBS 광복70주년 특집 ‘뿌리깊은 미래’ 1부 <生의 자화상> 특히 이날 회의에서 여권 추천의 함귀용 심의위원은 ‘뿌리깊은 미래’ 1부 방송 내레이션 중 국군의 서울 수복 후 “정확한 죄명도 모른 채 사형당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달한 부분과 흥남 철수 작전 과정에서 “유엔군이 기름과 탄약 포탄을 폭파해 살고 싶으면 미군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나야 했다”고 한 부분을 강하게 문제 삼으며 “내가 이 프로그램을 두 번 보면서 느낀 감정은 80년대 사관에 천착한 게 아닌지 우려가 들었고, 내 기준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법정제재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함 위원은 “전쟁 당시 수없이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하고 납북되는
[문화와 삶] 봄날 마곡사와 김구 선생
마곡사에 갔다 왔다. 태화산의 기운과 봄날의 공기, 바람, 햇살이 모두 좋다.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있듯이 봄날 마곡사 운치가 제법이다. 투명한 녹색의 새싹들이 가시처럼 박혀 있는 모습이 그저 경이롭다. 꽃을 보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노란 산수유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마곡사 대광보전 앞에서 강세황의 필세를 유심히 보다가 그 옆에 자리한 작은 건물에 들렀다. 김구 선생이 머물던 곳인 백범당이다. 개화기와 일제 사이의 만 3년을 민족의 영원한 사표인 백범 김구가 입산하여 그의 청년시대의 은신처로 삼았던 곳이 이곳 마곡사다. 그는 하은의 상좌가 되어 입산한 그 다음날 득도식을 마치고 원종이라는 법명을 받고 머리를 깎았다. 1898년 그의 나이 23세 때 일이다. 그는 1년간의 출가생활을 끝내고 환속하였다. 오늘날 그가 거처했던 곳은 문이 굳게 잠겼고 다만 벽면에 사진 몇 장과 그의 글이 액자로 걸려 있다. 한쪽 벽면에는 사진을 복사해서 흡사 동상처럼 기대어놓았다. 그 형색이 조악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김구 선생의 동상은 1969년에 김경승에 의해 제작된 것이 최초의 것이다. 김경승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돌아온 이로 전형적인 구상조각, 이른바 아카데미즘에 충실한 작가였다. 그러나 그는 대표적인 친일 미술인이기도 하다. 그런 이가 김구 선생의 동상을 제작했다는 사실이 너무 아이러니하다. 결코 반성을 모르고 부끄러움을 잊고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우가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된다. 1936년 8월에 제7대 총독으로 미나미 지로가 경성에 부임했다. 만주사변을 거친 후 중일전쟁과 향후
“나는 전범 아닌 피해자” 60년 간의 ‘긴 싸움’
<앵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전범으로 처벌받은 한국인이 148명에 이릅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서는 징용피해자로 인정받았지만, 일본은 아직 이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오늘(1일) 도쿄에서 이들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최선호 특파원입니다. <기자> 1942년, 17살 때 일본군으로 징용됐던 이학래 씨, 태국 포로수용소에 감시원으로 배치됐다가 전쟁이 끝나자 전범으로 분류돼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감형돼, 11년 동안 옥살이까지 했던 이 씨는 왜 자신이 전범이냐고 되묻습니다. [이학래/전범 피해자 모임 ‘동진회’ 회장 : 왜 죽어가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 죽어야 하는가. 꼭 명예회복을 시켜줘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남은 나로서의 책무이고.] 이 씨는 ‘동진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60년 동안,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왔습니다. BC급 일본군 전범으로 처벌받은 한국사람은 모두 148명, 이 가운데 현재 불과 5명만이 생존해 있습니다. 23명은 종전 직후 사형수로 처형됐습니다. 오랜 기간, 조국으로부터도 친일 부역자라는 눈총을 받아 오다, 지난 2006년에야 비로소, 강제징용 피해자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외면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쓰미/동진회 지원단체 대표 : (일본이) 곤란할 때는 외국인으로 (분류했습니다.) 한국과 일본 정부 모두 못 본 척 했습니다.] 일본 시민사회와 일부 국회의원들은 지난 2009년 중단된 한국인 전범 명예회복 법안을 즉각 재추진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영상취재 : 한철민·박용준) <2015-04-01> SBS뉴스 ☞기사원문: “나는 전범 아닌 피해자” 60년 간의 ‘긴 싸움’
김창룡 암살현장-원효로 1가…이승만 독재 하수인을 응징하다
59년 전 <경향신문> 3면에 한 사건의 약도가 실렸다. 워낙 중요한 사건이었으니 현장 약도까지 실었을 것이다. 위치는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가 21번지, 자혜병원 앞이다. 약도에는 120m 언덕 위 자택에서 점선으로 내려오는 표시가 있다가 자혜병원과 미장미장원 중간에 엑스표, 즉 ‘사건 현장’이 표시돼 있다. 지금은 그 자택도, 자혜병원도, 또 미장미장원도 없다. 그러나 2015년 3월 59년 전 신문의 약도를 들고 다시 찾은 현장의 골목은 신문에 실린 약도 그대로이다. 단지 자혜병원은 용산경찰서로, 미장미장원은 ‘OK전산’이라는 컴퓨터 복사기 매장과 고시텔로, 자택은 빌라로 바뀌었을 뿐이다. 심지어 범인이 숨어 있다가 뛰쳐나온 좁은 골목과 숨은 전봇대까지 그대로이다(물론 전봇대는 콘크리트로 바뀌어 당시 전봇대는 아닐 것이다). ▲1956년 1월 30일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된 현장. 지금은 용산경찰서 민원실 앞으로 당시 왼쪽 좁은 골목과 전봇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일본 헌병에서 국군 정보군인으로 변신 하지만 이곳에서 과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현대사에서 무슨 의미를 가진 현장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고, 또 알지도 못한다. 무심히 사람만 오갈 뿐, 용산경찰서 정문에 서 있는 전경도 이곳이 어떤 사연을 간직한 곳인지 모른다. 이곳은 1956년 1월 30일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소장이 암살된 현장이다. 김창룡 암살사건은 단편적인 육군 내부의 파워게임에 의한 일개 육군 소장의 죽음을 넘어서 현대사에서 적잖은 의미를 가진 사건이다. 김창룡 암살이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알기 위해선 먼저 그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