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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으로 읽는 70년](2) 찬탁과 반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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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신탁통치는 미국 제안… 언론 “소련 제안” 오보에 미군정 모른 척 이용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소식이 알려진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4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새로운 국가를 스스로의 손으로 건설한다는 희망에 부풀었던 한국인들에게는 절망의 소식이었다. 1945년 12월27일자 동아일보의 1면 톱기사였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 기사의 제목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미국, 소련, 영국의 외상들이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에 합의했는데, 특히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내용이었다.


이튿날부터 정당, 사회단체의 반탁성명이 잇따랐다. 이후 10일간 한반도는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동아일보의 보도가 나간 지 3일 후 동아일보 사장이자,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였던 송진우가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그가 신탁통치안을 지지한다는 소문이 난 직후 과거 자신의 경호원이었던 사람들에게 암살된 것이다.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튿날인 12월31일 임시정부는 포교령인 국자 1호, 국자 2호를 발표했다.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기 위한 총파업을 통해 정권을 접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라 전체가 마비되었다. 화가 난 미군정 사령관은 1946년 1월1일 김구를 소환했고, 총파업은 하루 만에 끝났다. 1월3일 또 하나의 소동이 벌어졌다.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은 동대문운동장에서 ‘3상회의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 결정을 내렸다. 신탁통치 반대 모임으로 알고 나갔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틀 후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 박헌영은 이 결정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은 좌익세력에게 독(毒)이 되었다. 박헌영이 소련의 일국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있으며, 한국이 소비에트 연방의 하나로 편입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보도된 것이다. 박헌영 본인과 소련 타스 통신이 반박했음에도, 보도 내용은 사실로 각인되었다. 이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에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매판 세력이 되었다.


ㅣ 미 국무부에서 파견된 윌버 장군이 1947년 3월13일 김구 반탁독립투쟁위원장(오른쪽)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ㅣ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란 제목의 1945년 12월27일자 동아일보 1면 톱기사. 정용욱 서울대 교수는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이란 글에서 동아일보는 3상회의 결정이 나오기 전 왜곡된 보도를 했고, 미군정은 오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지적했다.


■ 남북분단, 좌우가 아닌 찬반탁 분단


신탁통치가 보도된 지 열흘이 지나면서 정치권은 잠시 이성을 되찾기도 했다. 1월8일 4개 주요 정당 지도자들이 시내 모처에서 회합을 가졌다. 우파의 한국민주당과 국민당, 좌파의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의 대표가 모였다. 이들은 합의문을 발표했다. 첫째로 모스크바 3상회의의 조선 문제에 대한 결정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신탁통치안은 추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둘째로 정치적 테러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송진우의 암살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합의는 이틀도 지나지 않아 무효가 되었다. 정치인들에게 합리적 선택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우파에서 합의를 깼다. 신탁통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3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반탁운동은 곧 소련을 반대하는 운동이며, 이는 곧 반공운동이 되었다. 3상 결정을 지지하는 좌파는 신탁통치를 원하는 소련의 비밀 지령을 받았다고 규정되었다.


반탁운동 진영은 3상 결정을 찬성하는 좌파를 찬탁(신탁통치 찬성) 진영이라고 불렀다. 반탁운동은 민족주의 애국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찬반탁 논쟁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고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명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반탁운동 세력이 대한민국의 수립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우익 중에서도 3상 결정을 지지한 인사들은 남한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야당을 이끌었던 유진산이나 이철승도 모두 반탁 청년단체 출신이었으며, 사회 원로들도 마찬가지였다. 남북분단은 좌우익 분단이 아니라 찬반탁 분단이었다.


1980년대까지 30년이 넘도록 찬반탁 논쟁에 대한 반탁운동 세력의 해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진실이 영원히 묻히는 법은 없다. 1980년대 이후 찬반탁 논쟁은 그 진실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신탁통치안의 성격에 대한 분석이 시작된 이래 ‘역사비평’은 기존의 찬반탁 논쟁의 해석을 뒤집었다. 그 시작은 동아일보의 오보를 밝히는 것이었다. 특히 정용욱은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이라는 글을 통해 동아일보의 보도가 3상회의 결정이 나오기도 전에 왜곡된 보도를 했고, 미군정은 이러한 오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3상회의 결정의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되기 시작했다. 결정안이 곧 신탁통치안은 아니었다. 전체 4항 중 3항에 신탁통치와 관련된 내용이 있지만, 1항과 2항은 한국인들의 대표를 구성원으로 하는 단체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공동위원회를 설립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신탁통치안도 미소공동위원회와 한국인들이 구성한 단체 사이의 협의를 통해 구체적인 사항을 정하도록 규정하였다. 전체 4항 중 미국이 주장한 신탁통치안은 3항에만 포함돼 있었고, 1항과 2항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소련의 주장이 수용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미국이 찬탁이고, 소련이 반탁이었던 것이다.


■ ‘3상’ 결정안, 신탁통치안 아니다


좌익은 물론 우익의 민족주의자들 중 일부도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했는데, 이들이 신탁통치를 찬성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따라서 ‘찬탁’이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그렇다면 찬반탁 논쟁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으며, 찬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력은 국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내용은 역사 교과서에도 반영되었다.


오히려 과거 반탁운동의 정통성에 반하여 반탁운동이 분단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정치운동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만약 3상 결정에 대해 국내 정치세력들이 모두 동의했다면 분단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반탁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전쟁 정책에 협력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민족주의자로 포장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좌익이 갖고 있던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돌려놓고자 한 정치적 시도였다고 분석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완범은 좌익의 3상 결정 지지가 소련의 비밀 지령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좌익의 음모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반박했고, 이영훈은 1945년 10월부터 5도행정국을 만들고, 1946년 2월에는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소위 민주개혁을 한 북한이 남한보다 먼저 분단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3상 결정의 내용을 곧 신탁통치안으로 볼 수 없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1945년 12월28일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대립구도를 재편했다는 사실이다. 해방이 된 한국 사회에서 민족운동을 한 세력과 일본 제국주의와 그들의 전쟁을 지지한 세력 사이의 대립구도가 3상 결정으로 인해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재편된 것이다. 1946년 2월 38선 이남에서 민주의원(우익)과 민전(좌익)의 수립은 그 출발점이었다. 3상 결정을 둘러싼 논쟁, 즉 소위 찬반탁 논쟁은 1980년대 이후의 연구를 통해 그 실체와 성격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수정주의 역사학의 가장 큰 성과였다. 그러나 논쟁을 통해 만들어진 좌우 대립의 정치구도는 분단으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 ‘3상회의’ 결정의 본질

유럽 확보가 급한 미·소, 신탁이든 독립이든 한국에서 빨리 발을 빼야 했다

미국은 왜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려고 했는가? 소련은 왜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이른 시간 내에 한국에 독립정부를 세우고자 했는가? 방식은 다르지만, 미국과 소련은 한국에서 가능한 한 빨리 손을 빼고 싶었다. 미국과 소련의 우선적 관심은 한반도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과 소련은 고민에 빠졌다. 과거 유럽과 일본에 의해 분할돼 있었던 세계를 미국과 소련이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세계대전을 통해 유일하게 본토가 피해를 보지 않은 국가였고, 소련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냉전 체제 아래에서 공산권의 큰 형님 역할을 해야 했다. 문제는 미국과 소련이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컨트롤타워였다고 하더라도 그 힘이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제국을 이끌어본 경험도 없었다. 식민지가 없었던 소련은 차치하더라도 미국은 1945년 이전 유일한 식민지인 필리핀마저도 직접 통치할 힘이 없어 신탁통치를 실시했다.

대외정책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냉전정책의 창시자인 케난은 미국이 세계대전을 일으킬 능력을 갖추고 있는 영국과 독일, 그리고 일본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 집중한 뒤 이들과 함께 세계를 경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1947년 제출된 미 군부의 문서에서 미국이 원조해야 하는 16개 국가 중 한국의 순위는 13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미국 정부의 재정을 아껴야 했다. 소련의 우선순위는 동유럽이었다. 소련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통해 독일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모두 서부전선이었다. 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의 스탈린그라드는 2차 대전 최고의 격전지였다. 소련으로서는 동유럽이라는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게다가 한반도는 공산주의자들이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하는 대로 두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미국과 소련의 이러한 핵심적인 정책 목표를 읽지 못해 자기들끼리 이전투구에 빠졌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인들의 몫이 됐다.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았던 당시 정치인들의 실수를 지금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5-04-07> 경향신문

☞기사원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2) 찬탁과 반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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