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한강리(漢江里)가 느닷없이 한남정(漢南町, 한남동)으로 둔갑한 까닭
“청량리동(淸涼里洞), 상왕십리동(上往十里洞), 하왕십리동(下十里洞), 답십리동(踏十里洞), 염리동(鹽里洞) …….” 언젠가 서울 지역의 지명유래에 대한 공부도 할 겸 법정동(法定洞) 명단을 쭉 살펴보다가 조금은 이색적인 이름을 지닌 동네 몇 군데를 골라본 적이 있다. 여기에 나열한 것들은 끝자리가 모두 “무슨 무슨 리동”인 경우에 속하는데, 이를 테면, 그냥 ‘청량동’이 아니고 구태여 ‘청량리동’이라고 하여 마을이라는 뜻글자가 두 번씩이나 겹쳐 있다. 그러자니 약간 시골 냄새가 나는 ‘리(里)’라는 이름을 지금껏 그대로 꿰차고 있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에 관한 흔적을 찾아서 관련 자료를 거슬러 올라가며 훑어보았더니, <조선총독부관보> 1936년 3월 30일자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32호 「정동리(町洞里)의 명칭 및 구역(개정)」의 ‘경성부(京城府)’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리(里)’의 흔적을 품고 있는 정동(町洞) 명칭 개정 내역(1936년 4월 1일 시행) 이들 가운데 ‘염리’가 ‘염정(鹽町, 염동)’으로 되지 않고 ‘염리정’으로 바뀐 것은 ‘정동(貞洞)’이 ‘정동정(貞洞町)’이 된 것처럼 세 글자로 맞추는 방식을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청량리정’이니 ‘왕십리정’이니 ‘답십리정’이니 하는 이름이 생겨난 것도 모두 이 시기의 일이었는데, 아쉽게도 구태여 ‘리(里)’라는 것을 남겨둔 까닭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경원선 철도의 개통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청량리정거장’과 ‘왕십리정거장’이라는 이름을 익숙하게 사용하던 상태이다 보니, 짐작컨대 아마도 이런 이유로 ‘청량리’와 ‘왕십리’라는 지명을 그냥 살려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답십리정’의 경우에는 기차역의 소재지와는
신흥무관학교의 노래 (1) : 신흥무관학교 교가
2017년 연구소에서 발간한 노동은 선생님의 유작 <항일음악 330곡집>은 올해로 발간 5주년을 맞았다. <항일음악330곡집>에 다 담지 못했던 항일노래 이야기를 이번 달 <민족사랑>부터 싣는다.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리던 시기의 역사적 사실, 관련 사건이나 단체·인물 등에 관한 내용과 함께 노래가 가진 음악적 특징 등을 소개하려 한다. 노동은선생님과 편찬 작업을 함께 했던 이명숙 선임연구원과 강태구 근대음악 연구가가 원고 집필을 맡았다. 역사적으로, 음악적으로 더 풍부해진 항일노래를 만나보길 기대한다. – 편집자 주 첫 주제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독립군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다. 1911년 6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신흥강습소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무려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청산리전투 등 독립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주요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앞으로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든 노래, 부른 노래, 신흥관련 인물들이 학교 폐교 후 만든 노래 등을 <민족사랑> 지면에 소개하겠다. 내용은 본인이 쓴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로 본 항일노래의 창작·공유·전승」(<역사와 현실> 124, 2022)을 위주로 할 것이며, 곡조에 대한 해설은 강태구 선생님이 맡아 주기로 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든 노래는 교가와 두 개의 신흥학우단가가 있으며, 최근에 한 곡을 추가로 발굴 「실락원」)해 총 4개가 되었다. 항일노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작사가와 작곡가를 알 수 없는 것이듯이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들도 창작자 대부분을 알 수 없다.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도 그랬겠지만, 전파과정이
어린이까지 예비 전사로 키우는 전시 교육
침략전쟁의 파고는 한창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다니고 새로운 지식을 배워 한 단계씩 성장해 가는 어린 학생들까지도 덮쳐버렸다. 일제의 전시체제로 학교 교육은 오로지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신민’을 기르고 전쟁을 합리화하는 데 목적을 두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9월 ‘천황제’와 전체주의를 합리화하는 「교육칙어」를 식민지 교육의 기본 이념으로 활용하는 제1차 「조선교육령」을 시행하였다. 3·1운동을 계기로 문화통치를 표방하면서 제2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되었으나, 중일전쟁으로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자 1938년 3월 제3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국체명징國體明徵·내선일체內鮮一體·인고단련忍苦鍛鍊을 앞세워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41년 3월에는 초등학교령을 통해 소학교의 명칭을 아예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지칭하는 ‘국민학교國民學校’로 교체해 버렸다. 학교는 이러한 전쟁의 광기 속에서 마치 종교집단이 되어 갔다. 학교에 ‘천황’을 위해 기도하는 제단으로 가미다나神棚를 만들고 황국신민서사를 비치하여 국가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애국일, 신사참배일, 메이지절 등 온갖 기념일이 되면 조선의 어린 학생들을 예비 소년전사로 육성하고자 오로지 한 사람, ‘천황’에게 기도하며 싸우러 나갈 것을 교육했다. 그리고 중등학교의 수업 연한을 5년에서 4년으로 단축하여 조금이라도 일찍 군인이 될 수 있게 제도화하였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활동의 목표는 강건한 병사양성이었고, 이를 위해 학생의 체력 단련과 군사훈련이 강제되었다. 1944년 이른바 ‘결전교육 실시’라는 명목으로 전시교육비상조치로 학생들에게 군사훈련과 강제노동을 실시했다. 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면 군사교육을 받게 해 유사시 한반도 내에서 조선 학생들을 최후의 총알받이로 동원하려 했다. 학교가 ‘전쟁’에서 가장 멀리 있어야 할 어린이들을 ‘천황’을 위한 ‘예비 전사’로
‘돌모루 동네배움터’ 5개월의 대장정 마쳐
[초점] ‘돌모루 동네배움터’ 5개월의 대장정 마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6월 13일부터 10월 24일까지 16주에 걸쳐 매주 월요일마다 돌모루 동네배움터를 진행하였다. 돌모루 동네배움터는 연구소와 박물관이 주민 참여와 소통을 이끌기 위해 마련한 강좌와 답사이다. ‘우리 동네 박물관 둘러보기’와 ‘독립운동을 활용한 문화 콘텐츠 제작사례’, ‘우리 동네 역사 문화 자원 활용하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라’ 등 다양한 주제의 행사를 진행했는데 일반 주민들과 후원회원들이 꾸준히 참여해주었다. 1강은 ‘우리 동네 박물관 둘러보기-마을역사해설사 양성’으로 강동민, 안미정, 김슬기 연구원의 강의로 박물관 상설전시실의 유물과 기증 자료들을 직접 보면서 진행되었다. 유물 하나하나의 사연 속에 우리 민중의 애환이 깃들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의 본질을 체득하게 한 ‘대한독립쌍륙 체험실습’은 참가자들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낸 주요한 사례 중 하나였다. 2, 3강은 ‘독립운동을 활용한 문화 콘텐츠제작 사례’로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강사들이 이끌었다. 최성욱 그라피티 작가, 김은총 위세임 대표(피규어 제작), 강효숙 디자인가안채 대표, 김동우 다큐사진 작가, 노관우 음악교사, 박찬우 일러스트레이터 등이다. 강사들은 구체적이고 상세한 문화콘텐츠 제작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 참석자들과 적극 소통하였다. 친일청산과 독립운동이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문화콘텐츠의 사례들을 보며 참석자들은 친일청산의 의지를 한층 더 심화시켰다. 4강 ‘우리 동네 역사 문화 자원 활용하기’는 실내 강의와 답사로 구성되었고, 방학진 기획실장이 맡았다. 답사 코스는 효창원에서 이봉창의사 집터, 옛 국군 보안사 서빙고 분실터,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옥순 할머니 별세
[초점]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옥순 할머니 별세 10월 16일 새벽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옥순 할머니가 향년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1929년 7월 24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나 해망동에서 자랐다. 부친을 일찍 여읜 후 어머니, 오빠, 세 식구가 살던 중 군산국민학교 6학년 때 후지코시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한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6학년 때였는데 남자반과 여자반이 있었고, 한 반에 60명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반에서 50명을 뽑아 일본에 일하러 가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와 제비뽑기를 해서 자신이 뽑혔다. 그 길로 부산으로 내려가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내려 다시 기차로 도야마에 있는 후지코시공장에 갔다’고 한다. 그 후 할머니는 후지코시 사업장 내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항공기 부품과 탄피를 만드는 일을 했다. 성인용 공작기계로 작업했기 때문에 고되고 위험한 일이었다. 해방을 맞은 후에 회사에서 마련한 배편을 타고 귀국했다. 김옥순 할머니는 2015년 4월 7일 가해자인 주식회사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이 사건은 2019년 1월 18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원고가 승소했으나 2019년 2월 1일 피고 후지코시가 상고하여 3년 8개월째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최종 판결을 보지 못한 채 타계한 김옥순 할머니의 명복을 간절히 빈다. 현재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1차, 2차, 3차 소송의 원고(피해 당사자) 총 23명 중에 13명이 사망하였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앞으로도 일제강제동원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힘쓸 것을 다짐한다. • 김진영 대외협력실 선임연구원
극동민족대회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초점] 극동민족대회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우사김규식연구회(회장 김수옥. 김규식 선생의 손녀)는 9월 30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다목적실에서 ‘극동민족대회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 우사 김규식과 극동민족대회’를 주최했다. 이날 학술회의는 우리 연구소와 국가보훈처, 청풍 김씨 대종회등이 후원했다. 극동민족대회는 코민테른의 주도로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반제국주의자대회로,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워싱턴회의)에서도 약소민족, 특히 한국문제가 논의되지 않은 것에 실망하고 극동민족대회에 대거 참여하였다. 대회에는 조선·중국·일본·몽골·자바·러시아의 대표 144명이 참가했는데 한인대표단은 23개 단체에서 이동휘·박진순·여운형·박헌영·김단야·임원근 등 52명이 참가하여 참가국중 최다수였고 김규식은 한인대표단의 단장이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코민테른과 극동민족대회’(발표자 :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극동민족대회와 김규식’(발표자 :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와 홍범도’(발표자 :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가 각각 주제 발표를 했으며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종합토론 좌장을 맡았다. 심지연 교수는 발표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실망했던 독립운동가들과 조선의 젊은이들은 식민지와 약소국의 민족해방투쟁을 적극 지원했던 소비에트 러시아정부가 코민테른을 결성하자 이에 매력을 느끼고 호응’하였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정부가 조선 등 피압박민족을 지원했던 이유는 제국주의의 간섭에서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세계혁명 추진이라는 공산주의 이념에 내포된 국제주의적 요소가 작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임경석 교수는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와 구미위원부 경험을 통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동시대 다른 많은 조선 사람이 그랬듯이, 극동민족대회는 김규식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그가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2022 개정 교육과정 과목별 공청회(역사과)에서 수구우익단체들이 물의 일으켜
[초점] 2022 개정 교육과정 과목별 공청회(역사과)에서 수구우익단체들이 물의 일으켜 • 김종욱 기획위원 9월 30일 오후 3시, 청주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박물관 소강당에서 2022 개정 교육과정 과목별 공청회(역사과)가 진행됐다. 이미 이틀 전엔 9월 28일 같은 장소에서 진행된 도덕과목 공청회가 수구우익단체의 난동으로 엉망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였고, 전국역사교사모임의 연대 요청에 따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4명의 상근자들이 공청회에 참석하였다. 오후 2시경, 공청회가 열릴 교육박물관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공청회 장소인 교육박물관 주위는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민주주의’란 표현 대신 ‘자유민주주’로 기재하라고 요구하는 피켓을 든 수구단체 회원, 이에 반해 ‘역사교육 과정에 대한 교육부의 부당한 개입을 중단해 주십시오’라고 적힌 피켓을 든 전국역사교사모임의 한 교사가 나란히 옆에 섰다. 공청회가 시작되기 20분 전 입장을 시작한 소강당의 분위기가 험악했다. 실내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은 노인 한 명은 ‘자유대한민국만세!’를 외치는 한편 ‘너희들이 보릿고개를 알아?’, ‘이 빨갱이 새끼들 죄다 고소할거야’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까지 했다. 이런 소동은 공청회가 진행되는 시간 내내 계속되었다. 교육과정 개정안을 설명하는 연구진에 대해 “왜 실명을 공개하지 않느냐?”, “우리들은 교육과정 개정안 내용에 대해 관심이 없다. 질문할 시간을 보장하라!”라는 무리한 요구로 소란을 피우기 일쑤였고, 이를 제지하기 위한 교육부 관계자에게도 “너도 한패냐 이 새끼야, 저리 꺼져” 등의 발언으로 공청회 장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2022 역사과목에 대한 교육과정 개정안에 대한 발제가 모두 끝난 후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질문을 준비해서
병참기지 조선반도를 관통해 달린 성화(聖火) 계주행렬의 정체는?
흔히 성화봉송(聖火奉送)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올림픽 대회의 사전행사 또는 개막식의 한 장면이 퍼뜩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언젠가 이것의 영어식 표현이 궁금하여 뒤져보았더니, ‘Olympic flame’, ‘Olympic fire’, ‘Olympic torch relay’ 등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근데 암만봐도 여기에 ‘성스럽다’거나 ‘신성하다’거나 하는 부가적인 뜻이 담긴 것 같지는 않고 이건 단지 화염(flame), 불꽃(fire), 횃불(torch)이라거나 하는 단어로 읽혀질 뿐인데 어쩐 일로 이것의 번역어는 애당초 ‘성화(聖火)’로 둔갑하여 정착된 것인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올림픽 성화의 유래는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마라톤 타워(Marathon Tower)를 설치하고 이곳에 불을 밝히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그 이후 1932년 제10회 로스엔젤레스 대회에서도 동일한 방식의 점화가 이뤄졌다고 알려진다. 그러다가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 때 그리스에서 채화한 불꽃을 직접 계주방식으로 옮겨와 경기장 성화대를 밝히도록 한 것이 성화봉송 릴레이의 첫 사례가 되었다. 이에 따라 1940년으로 예정된 제12회 도쿄 올림픽 당시에도 성화봉송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6월 9일자에 수록된 「동경(東京)의 오륜대회(五輪大會)에 성화계주(聖火繼走)를 제창(提唱), 해로는 일본군함이 옮기라고, 희랍측 위원(希臘側 委員)의 소론(所論)」 제하의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와루소 6일 발] 올림픽 백림대회에서 각국에 가장 감명을 준 성화(聖火) ‘리레-’는 동경대회에서는 거리 ‘코-스’의 문제로 일단 중지가 되었는데 그 전부터 성화 ‘리레-’의 거행을 열망하여 일본조직위원회에까지 그 안을 제시하고 있던 희랍 IOC ‘호라낫치’ 씨 등은 이 희망을
굿즈(Goods)에 역사를 담다
[후원회원마당] ‘독립운동가로 키링(Keyring : 열쇠고리)을 만들어 보자.’ 광복절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내가 입사한 ‘디자인가안채’ 대표님도 그에 발맞춰 상품을 출시해 보자고 말씀하시던 무렵에 우리디자인팀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정한 아이템이 키링이었다. 키링을 선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침 출근길에 만난 학생들의 책가방에는 모두 한 개 이상의 귀여운 캐릭터나 아이돌 키링이 매달려 있고, 퇴근길에 만난 이삼십대 청년들의 가방에도 마찬가지일 정도로 청년층의 키링 수요는 높았다. 저마다 저 작은 소품 하나로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고 다녔다. 저렇게 가볍게 소지할 수 있으면서 나의 개성과 취향을 나타내는 소품이 또 뭐가있을까? 그런 소품에 독립운동가를 녹여내면 청년들이 조금 더 쉽게 독립운동사에 접근할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부터 그런 제품을 갖고 싶었다. 다양한 문화콘텐츠 산업이 흥행하면서 만화·드라마 캐릭터나 좋아하는 아이돌의 세계관에 이입하고, 그 내용을 다양한 제품으로 소비하는 문화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다. 그런 제품을 굿즈(Goods : 상품·재화를 뜻하는 용어이지만, 한국 아이돌에 관련된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문화에서 파생되어 지금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상품을 제품으로 디자인한 물품을 통칭한다)라고 한다. 심지어 그 세계관을 확장하여 또 다른 창작물이 나오기도 한다. 그 작용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에도 대입하고 싶다. 독립운동가를 담은 멋진 제품이 있다면 자신에게 울림을 주는 역사 속 인물들에 이입하여 그들을 좋아하고, 더 나아가 역사가 담긴 소품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돌 굿즈를 넘어
K-컬쳐시대, ‘청년백범’의 홍소연, 조선동 님을 만나다
지난 9월 12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의 배우와 감독이 미국 에미상 남우주연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아시아 배우가 주연상을 받은 것도, 비영어권 드라마가 감독상을 수상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번 시상식에서 오징어게임은 6관왕을 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하는 한국의 뉴스 콘텐츠와 인터넷 커뮤니티들에는 이런 댓글이 올라왔다. ‘김구 선생님 보고계십니까?’, ‘김구 선생님 저는 실시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국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인터넷 ’(인터넷 유행어) 중 하나다. 이른바 ‘국뽕’이 차오르는 뉴스와 이야기에 김구 선생이 ‘소환’되고 있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남긴 ‘부강한 나라보다는 아름다운 나라, 한 없이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가 되길 바란다’는 소망도 함께 회자된다. 바야흐로 K-컬쳐의 시대, 9월 16일에 ‘어린이 백범학교’를 30년 동안 운영해온 ‘청년백범’의 조선동, 홍소연 님을 만났다. ● ‘청년백범’에 대해서 소개해 주세요. ○ 1985년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주관으로 ‘백범강좌’가 열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강사가 좋으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요. 그때 임종국 선생님도 오시고, 리영희, 송건호, 강만길, 조동걸, 이만열 선생님 등 명사들을 모셔서 강좌를 열었어요. 거기에서 서로 알게 되고,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 민족문제연구소 모습하고 비슷해요. 처음에는 제대로 된 공간도 없고, 혼자서 접이의자를 깔고 행사 준비하니까, 강좌에 온 청년들이 의자를 나르고, 차를 대접하는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가까워지게 된거죠. 그렇게 함께 행사를 도우면서 공부모임을 하던 청년들이 ‘우리 공부만 하지 말고 뭔가 좀 해보자’ 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