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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근현대사 25] 조선어학회사건과 조선인 형사들

2017년 3월 27일 3016

사건의 발단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아 인적・물적 수탈을 강화하고 일본어 상용과 창씨개명・신사참배 강요 등 민족말살정책을 펼쳤다. 더욱이 1941년 12월 일제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에서의 전시통제는 훨씬 강화되어갔다. 이듬해 홍원경찰서와 함경남도경찰부가 사소한 일을 침소봉대하여 조선어학회 회원 30여 명과 저명인사 50여 명을 피의자와 증인으로 연행하여 1년 동안 무자비한 고문과 겁박을 가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국체(國體)를 변혁하고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그 정(情)을 알고서 이에 가입한 자”를 처벌하는 치안유지법 제1조 위반 혐의를 씌웠으니 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1942년 7월 박병엽(메이지대학 졸업생)이 함경남도 홍원읍 전진역에서 친구 지창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원경찰서 후카자와 형사가 한복 차림의 박병엽을 수상히 여겨 검문하자, 홍원읍 유지의 자제인 박병엽은 퉁명스럽게 응대했고 홍원경찰서로 연행되었다. 홍원경찰서에서는 형사들을 파견하여 그의 집을 샅샅이 수색했다. 특별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으나, 야스다(安田稔, 본명 안정묵安禎默)라는 조선인 형사가 박병엽의 조카딸 박영옥의 일기장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증거로 압수해갔다. 며칠 후 야스다는 일기장에서 “국어(國語, 일본어를 말함)를 상용(常用)하는 자를 처벌하였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일제의 국어상용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한 교사를 검거하기 위해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4년생인 박영옥을 비롯해 그의 친구 최순남 이순자 이성희 정인자를 연행하여 취조하였다. 이들이 며칠 간 버티다가 형언하기 어려운 고문에 결국 김학준 정태진 두 교사를 지목하고 말았다. 김학준은 영생고등여학교의 공민 선생으로 재직중이었고, 정태진은 1941년 5월에 7년간

[시론]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2017년 3월 27일 584

훗날 역사가들은 2017년 3월 10일 촛불혁명을 1919년 3·1대혁명, 1960년 4·19민주혁명,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과 같은 반열에 놓고 역사를 설명할 것이다.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어떠한 혼란도 없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작동시켜 독재자를 쫓아내는 명예혁명을 이뤄낸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 헌법재판소(헌재)는 재판관 8명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하였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대통령 박근혜가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를 자행”하였기에,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헌법 수호의 이익을 위해 파면한다.”고 하였다. 작년 10월 29일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몰려나와 박근혜정권 퇴진의 촛불을 든 지 132일 만의 일이다. 탄핵 선고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헌재의 탄핵결정에 대해 국민의 86%가 “잘했다”고 응답하였으며 “헌재의 결정에 승복한다”는 응답이 92%에 달해, 탄핵 불복의 목소리는 극소수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박근혜 대통령은 헌정사상 첫 탄핵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박 전 대통령을 구속 수사해야”한다는 여론이 69.4%에 달해, 조만간 인신 구속될 운명에 처해 있기도 하다. 국민들은 뇌물공여 등 재벌 관련 의혹, 우병우 전 민정수석 관련 의혹, 그리고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 관련 의혹 등에 대해 철저하고 투명한 수사를 원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사회에 짙게 암운을 드리웠던 박정희 망령도 사라질 전망이다. 박정희 프레임은 한마디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중국공산당은 건국 당시의 초발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2017년 3월 27일 589

1980년대 대학가는 중국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컸다. 고래와 새우 싸움에 비견할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의 싸움에서 공산당의 승리는 엄혹했던 5공화국 군부독재 속에서 피어난 연꽃 같은 희망이었다. 숨죽여 읽었던 이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인과의 대화>, 미국기자로 대장정에 종군했던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서양 의사로 중국혁명에 참여했던 <닥터 노먼 베쑨>, 중국공산혁명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소심한 가슴을 단련시켜주던 도구였다. 역사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젊음과 열정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던지는 모습은 낭만적이고 멋졌다. 수천 년 강고하게 이어진 계급을 타파하겠다는 무모함, 계급구조에서 파생된 권력과 자본의 억압된 고리를 끊고 민중들이 주인이 되는 참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은 젊은 가슴을 타들어가게 했다. 놀랍고 두렵고 번민하게 했던 김산(장지락)의 삶과 스스로 기득권을 버리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던졌던 중국혁명가들의 삶은 오랫동안 마음의 빚으로 눅진하게 남아 있었다. 오늘날 중국은 발전했다. 발전의 의미가 경제적 풍요라면 분명 그렇다. 중국의 경제력은 세계 2위다. 군사력도 마찬가지다. 인구는 세계 1위, 1위를 달리는 상품이 6천 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제 중국은 개혁 개방 30여 년 만에 미국이 가장 겁내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중국과 가장 인접한 분단국가 대한민국은 성장한 중국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는다. 평택지역만 해도 도심 곳곳에 중국인들의 가게가 자리 잡았고 안중읍 구시가지는 벌써 중국상인들 차지가 되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사드 배치를 받아들인 박근혜정권은 한편으로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일제 삼림수탈의 척도 압록강 재감材鑑

2017년 3월 27일 1004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압록강 유역에서 ‘뜻하지 않은’ 전리품(戰利品)을 얻게 된다. 강 양쪽에 산더미처럼 버려져 있던 목재가 그것이다. 일제는 이들 목재를 수습하여 군사용으로 전용하고자 1905년 11월에 청국(淸國) 안동현(安東縣) 지역에 육군목재창(陸軍木材廠)을 신설하였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삼림이 중요한 이원(利源)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한 일제는 1906년 10월 19일 한국정부를 강박하여 「압록강 두만강 삼림경영협동약관」을 관철시켰다. 이 협약에 따라 1907년 4월 1일에는 통감부 영림창(統監府營林廠)이 개설되었고, 한국 측도 허울뿐인 서북영림창(西北營林廠)을 설치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1908년 9월 청국과 합동으로 압록강채목공사(鴨綠江採木公司)를 발족하였다. 이 기관은 압록강 우안지역(右岸地域; 북쪽 연안) 모아산(帽兒山)에서 이십사도구(二十四道溝) 간의 강면에서 64청리(淸里)에 달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벌채사업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 압록강을 경계로 통감부 영림창과 압록강채목공사가 남북으로 포진하여 광범위한 지역의 삼림수탈을 가속화하는 주체로 떠올랐다. 육군목재창의 지휘관들이 그대로 통감부 영림창의 운영을 떠맡은 가운데, 해송과 낙엽송 위주로 벌채한 목재는 대부분 한국주차군의 병영지 건축,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와 통감부 통신관리국의 전신주 재료, 탁지부건축소의 건축자재 등으로 공급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영림창으로 전환된 이후에는 벌목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는 데에 몰두하였고, 그 결과 무분별한 벌채에 의한 삼림파괴가 가중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영림창으로 전환된 이후에는 벌목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하는 데에 몰두하였고, 그 결과 무분별한 벌채에 의한 삼림파괴가 가중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압록강 재감(材鑑)은 이러한 삼림수탈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유력한 증거물의 하나이다. 재감은 조선총독부 영림창에서 제작 배포한 부채모양의 목재 샘플을 말한다.

기증자료소개

2017년 3월 27일 447

심정섭 지도위원 제51차 자료기증, 도서류 총 30점 보내와 지난 1월 12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51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이번 기증자료는 <제2회 민방위대원교재> (1976), <한국의 역사>(1982) 등 도서류와 문서류다. 이 중 1976년 정읍군에서 통·리 대원용으로 발행한 <제2회 민방위대원교재>에는 민방위 대원의 임무, 신고망관리운영 등 상세한 지침이 나와 있다. 이 자료는 1975년 유신정권이 민방위기본법을 시행하여 전 국민적인동원체제를 완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2월 10일 김경현 회원(서울북부지부)이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2016) 등 총 3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군국가요 40선〉 제작에 얽힌 사연을 듣다

2017년 3월 27일 936

인터뷰 –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 이준희 부회장 정리 :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 인터뷰이는 〈군국가요 40선-일장기 그려놓고 성수만세 부르고〉 제작을 함께한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 부회장 이준희 씨다. 이 부회장은 한국 대중음악 전공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관련 논저를 발표해왔으며 <친일인명사전> 편찬과정에서 음악분야(군국가요) 편찬위원으로 참여했다. 또한 유정천리의 〈남인수 전집〉 〈이난영 전집〉 등 음반을 기획・제작했고, KBS 〈가요무대〉 등 방송 프로그램에 자문하고 있으며 대중음악 및 대중문화를 강의하는 겸임교수이기도 하다. – 편집부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 부회장 이준희 씨   문 : 이번에 발매된 〈군국가요 40선〉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옛가요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가 함께 기획, 제작했습니다. 먼저 유정천리에 대해 소개해주시죠. 답 :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는 2009년 11월 옛 가요를 사랑하는 사회인사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점차 일반인들도 참여하는 대중모임으로 발전했습니다. 유정천리는 뿔뿔이 흩어진 소중한 옛 가요를 하나 둘씩 찾아 모으고 정리해서 가수별 음반을 복각판 CD로 발간하는 일을 1차적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남인수전집〉(2012) 〈이난영전집〉(2016) 등 해마다 다수의 음반을 제작했고, 가요사 유적지 답사, 대중가수의 평전 및 대표곡집 발간, 노래비 건립, 축음기음반 감상회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회장은 영남대 국문과 이동순 교수(시인)입니다. 문 : 군국가요의 정의와 성격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답 : 군국가요는 1930~4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직간접적으로 부응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노래 가운데 상업적인 대중가요의 생산·유통 과정을 거쳐 유포된 것을 말합니다. 일각에서는 친일가요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는데,

[소사 22] ‘항심’을 지키기 위해 뛰어든 부업 전선

2017년 3월 27일 475

<맹자> 등문공편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 ‘무항산자 무항심’(無恒産者 無恒心)이 있습니다. 항산이 없는 자는 항심도 없다는 뜻으로 즉,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지조를 꺾은 사례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어느 단체든 창립 초기에는 그 기세와 의욕이 하늘을 찌르고 바다를 덮을 만합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것보다는 기르는 것이 더 어렵듯이 단체를 만들기는 쉬우나 유지하기는 훨씬 더 힘듭니다. 연구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창립 이후 오랫동안 회원들의 회비만으로는 한달치 월세도 충당할 수 없었던 극히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상근 연구원들과 활동가들이 어쩔 수 없이 부업 전선에 내몰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번 달에는 항심을 지키기 위해 항산에 나섰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993년 여름 연구소 소식지에 ‘김정문알로에’ 광고가 실립니다. 연구소 발기인 중 한 분이 평소 안면이 있는 김정문알로에 관계자에게 부탁하여 광고비를 2~3차례 받아 회보 발행비 등에 보탠 것입니다. 당시 회보는 발행부수도 미미하여 회사 입장에서는 광고효과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 후 연구소의 어려운 처지를 전해들은 몇몇 회원들이 연구소에 몇 가지 수익사업을 제안합니다. 이때부터 장사와 이재에는 문외한에다 잼병인 상근자들이 부업 전선에 뛰어들게 되는데 실제로 몇 달 만에 접은 사업도 있고 몇 년간 지속했던 사업도 있었습니다. 1995년경에 시작한 먹는 샘물 판매업은 연구소가 일종의 대리점 역할을 했고 당시 김재운 조직담당 상근자(현 서울동부지부장, 민주주의국민행동 사무국장)가

근현대사기념관 제98주년 3·1절 기념행사 개최

2017년 3월 27일 451

  근현대사기념관(관장 이준식)은 제98주년 3·1절을 맞아 지역 주민과 함께 ‘1919년 3월 1일, 그날의 꿈’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날 행사는 오전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상설 전시실 관람, 독립민주기념비 헌화, 대형 태극기에 손도장 찍기 체험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학예사와 강북구 역사동아리 청소년 도슨트의 전시 해설이 있었다. 강북구 역사동아리 청소년 도슨트로 활동하는 중학생 10명이 직접 작성한 원고를 토대로 해설하여 관람객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전시 해설은 오전 10시, 오후 2시 두 차례 예정되어 있었으나, 관람객들의 요청으로 오전, 오후 각 1회씩 추가하여 총 4회가 진행되었다.   상설전시실 관람 후 강의실에서 심산김창숙기념관의 후원을 받아 참가자 전원이 심산 김창숙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심산 무궁화’를 만들었다. 참가자들은 무궁화를 손에 들고 시민들의 모금으로 세워진 ‘독립민주기념비’에 무궁화를 헌화한 후 경건한 자세로 묵념하였다. 마지막으로 한국광복군이 서명한 태극기를 본떠 만든 가로 4m, 세로 3.5m의 대형 태극기에 참가자들이 손도장을 찍으며 대형 태극기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광복군의 기개를 되새길 수 있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이번 행사를 통해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유,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만세를 외쳤던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애국지사의 정신이 담긴 강북구 지역을 재조명하며 지역 주민과 함께 공감하는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이날 관람 인원은 평소 주말 관람객의 2배를 넘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기념관의 역점사업인 청소년 도슨트 양성과정과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문의도 계속 들어오고 있다. ∷

조선인 최초의 종로경찰서장·황해도경찰부장, 윤종화 “일사순국一死殉國의 뜻을 뼈에 새겨 최선”

2017년 2월 22일 1729

고등관이라는 욕망의 열차 고위 행정공무원의 등용문인 행정고시, 판검사라도 될라치면 약관 20대에도 일약 ‘영감님’ 소리를 듣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사법고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외교관의 관문인 외무고시는 국가공무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출세의 지름길이다. 통상 이 세 개의 고급공무원을 뽑는 시험을 ‘고등고시(高等考試)’라고 부르는데, 그 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의 고등고시는 머리 좋고 출세욕에 불타는 식민지 청년에게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입신양명의 사다리였다. 물론 그것은 친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일제로서는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불가불 조선인의 힘을 빌어야 했고, 이 식민통치의 하수인에게 “너희도 충성을 다하면 출세할 수 있다”고 던져준 값비싼 고깃덩이의 하나가 고등문관시험 따위였던 것이다 고등문관시험(지금의 행정고시)에 합격한 조선인의 경우 3년 동안 고등관시보(高等官試補)를 거쳐 주임관(奏任官)이 된다. 요즘으로 치면 5급 사무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주임관급 이상을 고등관이라 불렀고, 6급 주사 이하는 판임관(判任官)이라 불렀다. 그런데 5급과 6급의 경계는 ‘명박산성’보다 높고 견고한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9급이나 7급으로 시작한 행정관료들의 경우 평생 근무해야 6급 주사로 끝났다. 특별한 예외가 아닌 한 5급 주임관은 될 수 없었다. 주임관을 시작으로 한 고등관의 세계는 고등고시 합격자들에게만 주어진 황금 사다리였던 것이다. 식민지의 머리 좋은 청년들 가운데 조국의 독립이야 어떻든 이 황금 사다리를 오르고자 몸부림치는 부류들이 있었고,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 군수를 거쳐 마침내 조선인 최초로 ‘공안 1번지’ 경성부(서울)

[초점] 교육현장에서도 탄핵당한 국정교과서

2017년 3월 27일 433

국정 역사교과서가 결국 교육현장에서도 거부당했다. 교육부가 당초 국정교과서를 보급하기로 계획했던 전국의 5,249개 중·고등학교 가운데 ‘연구학교’를 신청한 곳은 경북 경산시의 문명고등학교 한 곳이다. 경북 구미의 오상고는 연구학교 신청을 했다가 교사와 학생들의 반발이 커지자 하루 만에 철회했고, 경북 영주의 경북항공고는 학교운영위원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신청해 연구학교 지정 심의과정에서 탈락했다. 국정교과서를 사용할 연구학교 지정을 위해 ‘교원 승진 가산점’과 ‘1,000만원의 예산 지원’을 내걸었음에도 교육현장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것이다. 교육부는 앞서 전국 국립학교 12곳 교장들을 불러 간담회를 열며 독려했지만 신청한 학교는 없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국정 역사교과서 연구학교로 지정된 문명고는 재단과 교장이 교육주체의 의사를 무시하고 편법으로 연구학교 신청을 밀어붙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 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는 대책위를 구성하고 연구학교 철회를 요구하며 교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신입생이 입학을 포기했으며, 결국 입학식도 열리지 못했다. 역사 교사들은 국정교과서 사용을 거부했다.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국정교과서저지넷)는 2월 24일 논평을 통해 “문명고 사태는 교육부와 경북교육청, 문명고 재단이 결자해지하라”고 촉구했다. 이준식 교육부장관은 지난 2월 10일 연구학교 신청이 저조하자 신청 마감을 닷새 연장하고 급기야 “학교의 자율 선택을 방해하는 외부의 부당한 압력이 있을 경우 모든 법적 조치를 강구하겠다”는 협박성 담화문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국정교과서저지넷은 같은 날 서울 정부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교과서가 학교 현장에서 외면받는 까닭은 친일-독재를 미화하는 반헌법적인 내용을 담은 날림-불량 교과서이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교육부는 탄핵당한 ‘박근혜 교과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