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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5·16쿠데타 발상지’ 문래공원 박정희 흉상 철거 비사

2017년 1월 23일 1840

국회의 박근혜 탄핵소추 의결을 5일 앞둔 지난해 12월 4일, 영등포구 문래동 근린공원의 박정희 흉상에 붉은색 스프레이가 뿌려지고 코 부분 등이 망치로 훼손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일주일 후 영등포경찰서는 흉상 훼손 당사자로 최모 씨(32·조형미술작가)를 특수손괴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기자들은 가장 먼저 ‘동종 전과 용의자’에게 전화로 사건을 친절히 설명하고 난 후, ‘혹시 이번에도 네가 한 짓 아니냐?’ 혹은 ‘이런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동종 전과 용의자는 바로 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입니다. 감시카메라의 보호까지 받고 있는 문래공원 박정희 흉상이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다시금 수난시대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번 달에는 박정희 흉상 수난사의 압권인 2000년 11월 5일 박정희 흉상 철거의 숨은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DJP연합정부를 내세운 김대중 후보는 1998년 대선을 앞두고 ‘TK의 대부’라 불리는 신현확을 만나 대통령에 당선되면 동서화합 차원에서 박정희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결과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공동여당인 새천년민주당, 자민련은 물론 야당인 한나라당까지 모두 건립에 찬성합니다. 이에 대해 270여 시민사회단체들은 2000년 9월 28일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를 결성하였고,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아 반대운동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재야 출신 국회의원들조차 박정희기념관 반대에 쉽게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민연대가 구사할 수 있는 전술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박정희기념관 반대 여론 환기를 위해서 뭔가가 필요하다고 다들 생각하던 차에 방학진 당시 조직국장이 박정희 흉상 철거를 제안합니다. 그는

독립운동 탄압의 대명사, 종로경찰서

2017년 1월 23일 2730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건물 외벽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누군가 건물을 향해 폭탄을 던진 것이다. 건물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고 게시판과 벽 일부가 파손되었다. 또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원 5명이 병원에 실려 가고 지나가던 민간인 2명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피해도 피해지만 총독부의 대표적 통치기구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경찰서가 폭탄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일제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경성 시내에는 비상이 걸려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곳곳에 경찰이 배치되고 삼엄한 검문검색이 실시되었다. 민심의 동요를 두려워 한 총독부는 사건을 취재하거나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병력을 총동원하여 범인 색출에 돌입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 제일’의 고등계 주임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경부를 선봉에 내세웠다. 그는 추적 끝에 폭탄투척을 했거나 적어도 그 배후에서 조종했을 것으로 보이는 자를 김상옥(金相玉)으로 지목하고 은신처를 알아내는데 주력하였다. 매부의 집에서 은신하던 김상옥은 주변인의 밀고로 미와에게 탐지되자 총격전을 벌이면서 도주를 시도했다. 이 와중에도 경찰 몇 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포위망을 여러 차례씩 뚫으면서 일본경찰에 많은 피해를 주게 되자 일본은 군대까지 동원하였다. 1923년 1월 22일 김상옥은 수백 명의 경찰에게 포위당해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총을 꽉 쥔 채 저항하다 순국하였다. <경성종로경찰서 사진첩>은 최근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암살〉 등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종로경찰서의 활동상과 소속 경찰의 모습을 담고 있는 희귀

기증자료소개

2017년 1월 23일 439

심정섭 지도위원 제49차 자료기증, 도서류 총 12점 보내와   지난 11월 22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49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담양군지>(2002), <완도군지>(1977), <함평군사>(1999) 등 지방사 관련 자료 12권이다. 이 중 완도군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완도군지>에서는 “새마을 지도자의 거룩한 정신과 끈질긴 노력으로 우리 마을이 발전했다”며 박정희 정권 시절의 새마을운동을 미화하고 있다.   이경숙 님, 부친의 거창공립국민학교 졸업앨범 등 귀중한 소장자료 120점 기증   지난 12월 13일, 이경숙 님이, 부친이 생전에 소장하고 있던 자료 120점을 기증했다. 1933년생인 부친은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거창공립국민학교, 거창공립농업중학교 등 그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기증 자료는 거창공립국민학교 졸업앨범(30회, 1942.3), 졸업증서 및 상장, 1950년대에 쓴 일기장, 간이세금계산서 및 영수증 등이다. 이경숙 님은 조승미 회원(전 연구원)의 소개로 연구소를 알게 되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서울 남산 꼭대기 국사당 터에 건립된 일제의 국기게양탑

2016년 12월 20일 1646

3·1만세사건이라는 민족적 저항의 여파가 아직 거세게 지속되고 있던 1919년 7월 18일, 일제는 이러한 혼돈상태를 서둘러 봉합하려 함인지 관폐대사 조선신사(官幣大社 朝鮮神社)의 창립을 공표하였다. 여기에는 이른바 ‘식민지 조선의 수호신’으로 천조대신(天照大神)과 죽은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을 제신(祭神)으로 삼는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6월 27일에 개칭)의 건립을 통해 자기들의 영구적인 식민통치가 무탈하게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조선신궁이 들어선 자리는 익히 알려진 대로 서울 남산 중턱이었다. 처음에는 신사의 배치가 남면(南面; 남쪽을 바라보게 배치하는 것)이어야 하고 숲이 우거진 곳이라야 좋다는 조건에 따라 경복궁 신무문 후면의 백악산 중턱과 남산 왜성대 남쪽의 경성신사(京城神社) 인접지가 후보지로 고려되었으나, 결국 경성 시가지가 한 눈에 조망되는 명승지라고 하여 남산 위 한양공원(漢陽公園; 1910년에 개설) 터가 신궁조영 터로 최종 낙점되었다. 이에 따라 남산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리던 한양도성의 흔적은 말끔히 제거되었고, 신궁 영역에 포함된 이런저런 시설물들도 잇달아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져야 했다. 우선 1913년 정초 이래 한양공원 내에 자리했던 오포대(午砲臺)는 그들만의 신성한 공간이 되어야 할 자리에서 감히 대포소리를 울릴 수 없다는 이유로 1920년 5월에 효창원(孝昌園)과 인접한 선린상업학교의 뒤편 언덕으로 이전되었다. 그리고 남산 꼭대기에 자리한 국사당(國師堂)도 그 대열에 포함되었다. 고종 때의 문헌자료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목멱신사(木覓神祠)’ 항목에 “목멱산 정상에 있으며 봄과 가을에 초제(醮祭)를 행하였으나 지금은 폐지되고 다만 사당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 등장하는데, 이곳이 곧 국사당을 가리킨다. 원래 조선 태조 때 남산을

우리나라 최초의 위조지폐사건과 이관술

2016년 12월 20일 2461

소공동의 위폐범 1946년 5월 15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희대의 위조지폐사건을 발표했다. 사건의 개요는 서울시 소공동에 있던 정판사(精版社)라는 인쇄소에서 일단의 무리가 900만 원 이상의 조선은행권 위조지폐를 찍어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정판사는 해방 전 조선은행 지폐를 찍어내던 곳이었다. 수사당국은 정판사 직원들이 조선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정판사에 있던 조선은행권 지폐원판을 가지고 위폐를 찍어냈다고 발표하였다. 위폐사건의 주범은 의외로 손쉽게 잡혔다. 정판사가 있던 근택빌딩에는 조선공산당의 기관지 <해방일보>를 발행하는 해방일보사가 입주해 있었다. 당시 사장은 권오직(權五稷), 편집주간은 조일명(趙一明)으로 모두 공산당원이었다. 장택상은 조선공산당이 남한의 경제를 교란시키기 위해 대량으로 위조지폐를 찍어 유통시켰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수사당국은 백원권 원판 9개, 옵셋트 인쇄용 원판 3개, 잉크 3종을 증거로 제시했다. 명색이 희대의 위폐사건인데, 위조지폐가 한장도 안 나온 희한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해방일보사 사장 권오직, 정판사 사장 박낙종(朴洛鍾)을 포함해 정판사 직원 15명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조선공산당의 거물급 인사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의 이름은 이관술(李觀述)로, 당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겸재정부장이었다. 체포령이 떨어진 이관술은 도피 중 7월 7일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8월 12일 검사국에 송치되어 8월 21일 정식으로 기소되었다. 그는 공판과정에서 자신은 사건 당시 북한을 여행 중이었다며 무죄를 주장하였다. 권오직과 조일명은 도피에 성공해 월북했다. 재정부장은 공산당의 자금을 관리하는 총책임자라 한시라도 비워둘 수 없었다. 이관술이 체포된 후 재정부장을 맡은 인물은 경남 창녕의 만석꾼집 종손 성유경(成有慶)이었다. 도쿄외국어대학에서 유학한 성유경은 일본에서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벨 디브 대규모 체포 사건 70주년 추모 연설

2016년 12월 20일 1013

번역자 주 – 민족문제연구소는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11월 24일부터 12월 13일까지 서울 시민청에서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전시회를 개최했다. 벨 디브 사건은 나치 강점기 프랑스의 비시정부에 의한 유대인 박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1942년 7월 16일 프랑스 경찰이 13,152명의 유대인을 대량 체포하여 벨 디브 경륜장에 감금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 대부분은 뒤에 아우슈비츠 등지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1995년 7월 16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연설에 이어 2012년 7월 22일 올랑드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는 두 번째로 사죄연설을 했다. 원문은 Discours du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François Hollande à l’occasion de la 70ème commémoration de la rafle du Vél d’Hiv; http://www.elysee.fr/declarations/article/discours-du-president-de-la-republique-a-l-occasion-du-70eme-anniversaire-de-la-rafle-du-vel-d-hiv/. 파리13구의 블로그에 있는 번역문(http://egloos.zum.com/kk1234ang/v/2881137)과 “The New York Review of Books”에 실린 영문 번역문(http://www.nybooks.com/daily/2012/08/18/france-hollande-crime-vel-d-hiv/)을 참고해 전문을 번역 소개한다. 총리님, 국회 의장님, 각국 대사님들, 파리 시장님, 프랑스 유대인단체대표자협의회 의장님, 대 랍비님, 종교 대표자 여러분,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아침 우리는 어떤 범죄의 공포를 기억하고, 비극을 체험한 사람들의 슬픔을 드러내고, 우리 역사에서 대독협력(la collaboration)의 어두웠던 시기와 그에 따른 프랑스의 책임을 상기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쇼아(Shoah), 즉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전승하고자 합니다. 그 첫 단계로 유대인 대량체포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망각에 맞선 투쟁에 앞장서고, 야만이 무엇을 저지를 수 있는지와 인간성 자체가 야만을 이기기 위한 수단들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꿈을 함께 꿉시다!

2016년 12월 20일 486

오늘(2016년 10월 11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시는 박한용 교육홍보실장님과 김승은 자료실장님의 발표, 그리고 영상을 통해서 박물관 건립의 진척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해 일하시는 상근자 분들과 자료를 기증하신 분들, 그리고 모금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이시는 분들이 그 꿈을 이야기하는 표정, 많은 분들이 모으고 있는 마음이 실현되어 가는 상황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 개관한 것은 11년 전인 2005년 8월이었습니다. 준비를 시작한 것은 2002년 12월, “여성들의 피해와 일본군의 가해를 전하는 활동의 거점을 만들어 달라”라는 유언을 남긴 마쓰이 야요리 씨(1934~2002, 전 아사히신문 기자, 여성인권활동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여성국제전범법정(2000)에 참여한 이들이 건립위원회를 조직했고, 저도 건립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준비에 분주했습니다. 도쿄 한복판에 4층 건물을 세워 전시실, 회의실, 도서실, 그리고 지하 1층에는 상영실을 만들자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도쿄의 현실은 냉엄했습니다. 건물보다 ‘활동의 거점을 만든다’는 목적을 우선시하여 2005년에 개관했습니다. 지금도 도쿄 신주쿠에 있는 빌딩 안의 작은 공간에서 뮤지엄 활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같은 것과 다른 것 제가 민족문제연구소를 처음 방문한 것은 『친일인명사전』이 출간된 직후였을 겁니다. 사실은 ‘민족문제’라는 명칭만 봤으면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을 수도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 보고, 저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전하는 저희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세우려고 하시는 여러분과 ‘같은 것’과 ‘다른 것’을

청년회가 서야 연구소가 산다

2016년 12월 20일 469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청년이 있는 한 우리 민족의 맑은 정기는 더욱 굳게 이어질 것이며 우리들 젊음의 기백이 꺾이지 않는 한 친일파 청산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비장감마저 감도는 위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청년회 출범 선언문(1998년 12월 29일)의 일부입니다. 많은 회원들이 ‘연구소에 청년회가 있었나’ 하고 의아해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위 선언문에서 보듯이 연구소 청년회는 ‘얼산이’(얼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순우리말)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연구소 대외 활동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청년회의 시작은 1998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회원이 겨우 200명 정도였으니 지부 모임은커녕 회원들 모임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IMF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여하튼 회원 관리가 거의 안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해 8월 군대를 막 제대하고 연구소 상근활동을 시작한 방학진 당시 조직부장이 연구소 인근에 거주하는 20~30대 회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고 그 결과 9월 29일 연구소 사무실에서 한호석, 유현도, 김훈식 회원이 모였는데 이것이 청년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청년회는 의외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 이유는 이화여대가 김활란상을 제정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청년회가 가장 발 빠르게 반대운동의 중심에 섰기 때문입니다. 청년회는 이화여대 앞에서 김활란상 제정 반대 집회를 열었을 뿐 아니라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 PC통신상에서도 열심히 반대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99년 5월 이화여대가 김활란상 제정을 포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에 앞서 4월에는 일본 오자와 이치로 자유당 당수가 과거사에 대한

낙락장송 쓰러뜨리는 도끼자루는 되지 말자

2016년 12월 20일 612

나라가 ‘박근혜 퇴진’ 목소리로 가득한 가운데 11월 9일 박기서, 홍소연 두 분을 연구소로 모셨다. 20년 전 사건의 전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조선동 회원(예원학교 국어교사)이 10년 전 어느 신문에 기고한 글을 소개한다. 1996년 10월 23일. 박기서는 안두희에게 물었다. “네가 안두희냐?” 도피와 병마에 지친 늙은 안두희는 소리 나는 쪽으로 겨우 고개를 돌렸으나, 자신이 안두희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못했다. 박기서는 ‘정의봉’을 꺼냈다. 순간 종교적인 번뇌가 스쳐갔다. 버스 운전으로 겨우 꾸려가는 가정형편과 고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결국 박기서는 정의봉을 휘둘렀다. 그는 “겨레와 조국에 죄를 지은 자가 하늘이 주는 수명을 다하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었다. 이 땅에서 ‘정의’가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안두희는 허망하고 처참하게 숨졌다. 육군 소위이던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백범을 암살하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헌병 지프에 실려가서 무기형을 받았다. 그의 수감생활은 고기, 술, 담배가 원없이 제공되는 호화판이었다. 다음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대령까지 초고속 승진했고, 전역 후에는 검은 세력의 비호 아래 군납업에 손을 대 한때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만큼 큰돈을 만졌다. 자유당 붕괴 후, 그는 이름을 바꾸고 부인과 위장이혼하고 가족을 외국으로 빼돌렸다. 자신도 이민을 시도했다. 그는 백범 암살에 관한 일들에 대해 끝내 거짓과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죽음은 삶의 단순한 종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