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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한 평생 일본의 부조리에 맞서 싸운 BC급 전범 이학래 회장 숨을 거두다

2021년 4월 28일 848

[초점] 한 평생 일본의 부조리에 맞서 싸운 BC급 전범 이학래 회장 숨을 거두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3월 28일 마지막 조선인 BC급 전범으로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기 위해 마지막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은 이학래 동진회 회장이 일본에서 한 많은 96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이학래는 1925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열일곱의 나이에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1942년 봄, 그는 면장으로부터 남방 포로감시원을 모집하는 데 근무기간은 2년, 한 달 월급은 50원이라는 말을 듣고 포로감시원으로 지원했다. 2년만 고생하면 징용과 앞으로 시행될 징병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학래와 같이 포로감시원으로 지원한 조선 청년들은 부산에 있는 일명 ‘노구치(野口)부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민간인 군무원 신분임에도 철저한 군대식 교육을 받았는데, 반복적으로 주입된 내용은 “포로는 동물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것 이었고,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사실은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 돌입한 뒤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의 청년들을 포로감시원으로 모집했다. 이때 ‘모집’된 조선 청년은 3,000여 명. 형식상으로는 ‘모집’이었으나, 실제는 지역별로 인원을 배정한 후 각 지역의 관리와 경찰이 할당된 인원을 동원했다.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사실상의 강제동원이었다. 이학래는 타이에서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해진 ‘죽음의 철로’, 타이·미얀마철도 건설현장에 투입된 1만 1천 명의 포로들을 대면했다.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에 소속되었으나 이등병보다 못한 일본군의 최말단 신분이었다. 그들에겐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으며, 시키는 대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다큐영화 여파(Aftermath) – 김진혁 교수의 반민특위 이야기

2021년 4월 28일 1338

성큼 들어선 봄날, 4월 9일(금) 오후에 김진혁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교수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만났다. 김진혁 교수는 EBS PD로 재직 중이던 2013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1년 넘게 제작하다 회사로부터 갑작스레 제작 중단 명령을 받고, 결국 그해 EBS를 퇴직하였다. 8년의 세월이 흐른 올해 과거취재했던 반민특위 관련자들을 다시 만나며 재구성한 다큐영화 ‘여파(Aftermath)’를 4월말에 열리는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하였다. 김진혁 교수를 만나 반민특위 다큐 제작 중단에서 ‘여파’ 출품까지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EBS 재직 당시 반민특위를 다루기 시작한 것이 언제이지요? ● 2012년부터 시작해서 2013년 초까지요. ● 아이템 선정은 본인이 했나요? 그 이유는요? ● 제가 했습니다. 해방공간에서의 일들이 궁금했어요. 1945~50년까지. 뒤지다보니 반민특위가 있더라구요. 미군정도 그렇고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반민특위가 눈에 딱 들어오잖아요. 그래서 한 번 연출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고, 연출적으로는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유대인 감독이 만든, 자신들을 반성하는 애니메이션 다큐에 몰입된 거죠. 두 가지를 섞으면 반민특위에 있었던 일을 비용걱정 안하면서도 눈에 띄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용도 좋고 연출가로서 욕심도 생기고 했어요. ● 짧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좋겠습니다. 나중에 저희와 함께 다시 한번 작업해보시죠. ● 그러면 애니메이션 감독을 따로 영입해서 해야 되는데요. 제가 총연출하고요. ● 2012년도에는 어떤 다큐들을 만드셨어요? ● 2012년에는 이거(반민특위) 하나 만들었다고 봐야 해요. 그 밖에도 지식채널, 과학다큐 만들었는데 지식채널 빼고는 그다지 유명하진 않아요. 지식채널을 만들 때 <잊혀진

기증자료

2021년 4월 29일 611

[기증자료] 심정섭 지도위원 제76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1점 보내와 • 안미정 자료실 주임연구원 • 3월 13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76회차 자료를 기증했다. 해방 이후 발행한 도서와 함께 직접 엮은 책 <(한말지사주촌심의선선생실기)노루묵의 단심가>도 함께 보내왔다. 심정섭 지도위원 기증자료 김종철 후원회원   • 3월 4일, 정용진 후원회원(광주지부)이 ‘민주장정100년, 광주 전남지역사회운동사’(총 13권)을 기증했다. • 3월 11일, 김종철 후원회원(대전지부)이 연구소에 방문해 친일파 이재곤(정미칠적)과 이두황(전라북 도 장관)의 글씨 각 1점, 일제강점기 제대기념접시 7점 등 총 9점을 기증했다. 연구소의 활동에 변함없이 지지하며 기증 자료가 친일파 연구와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유용하게 쓰이길 바란다고 전했다. • 3월 17일, 임무성 상임교육위원이 한국사, 세계사 등 교양도서 400여 권을 기증했다.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2021년 4월 29일 499

[후원회원 마당]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김순흥 광주지부장(전 광주대학교 교수) 당신들이 군사독재 밑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압니다. 당신들이 겪고있는 군부의 폭력과 학살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들이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낼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내일 아침에 갑자기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다음 주나 다음 달이나 내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는 여러분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자유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꿈과,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여러분 앞에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갑니다. 손에 손을 잡고 모두 함께 갑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여러분을 지지합니다. 세계만방의 모든 인민들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결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자유를 위해 나아갑시다. 민주주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갑시다.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미얀마 만세 !!! 민주주의 만세 !!! ※ 위 시는 김순흥 광주지부장이 4월 10일 광주광역시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매주 토요일 열리는 ‘미얀마 민주주의를 응원하는 광주시민’ 6차 딴봉띠 집회에서 직접 영어로 전달한

노을에 그리는 얼굴

2021년 4월 29일 391

[후원회원 마당] 노을에 그리는 얼굴 최홍이 전 서울시 교육위원장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산 천부의 아들 아무나 낯익은 타향 누구도 낯선 고향 노을에 약지 자른 왼손 낙관 그 유묵 그리며 마음 숙인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순국 111주년 오늘에 2021. 3. 26

일본의 침략전쟁 비용까지 강제한 ‘국방헌납’

2021년 4월 28일 2347

[소장자료 톺아보기 25] 일본의 침략전쟁 비용까지 강제한 ‘국방헌납’ – ‘애국기’ 헌납 “여러분의 적성으로 된 애국 제10호기 조선호가 도착하였습니다. 아울러 무사히 오게 된 것은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올립니다.” – <매일신보>, 1932년 4월 15일자 2면 1932년 4월 14일 정오 무렵, 경성 하늘에 이와 같은 오색(五色) 선전문을 뿌리는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 식민지 조선 ‘최초의 헌납기’ 조선호가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선호는 경성 상공을 한 번 돌더니 조선군사령부 수뇌부와 체신국 간부들의 환영을 받으며 여의도 비행장에 곧 착륙을 하였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년) 후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하기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는 한편, 부족한 전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국방헌납운동’이라는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애국기 헌납’이다. ‘애국기’는 지역민이나 기업, 단체 그리고 개인이 낸 국방헌금으로 생산한 군용 비행기를 일컫는데 육군용은 애국기(愛國機), 해군용은 보국기(報國機)라 불렀다. ‘애국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기종에 따라 1대에 최저 6만 원(현재 약 6억 원)에서 20만 원에 이르는 거액이 필요했다. 따라서 부호 몇 명의 힘으로 충당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역 조직과 단체를 동원한 모금운동이 조선 전 지역에 벌어졌다. 일본인 유력자와 행정기관장이 나서서 ‘애국기 헌납 운동’을 시작한 후 ‘1군(郡) 1기(機) 헌납운동’을 주도한 문명기를 필두로 조선인 헌납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37년 중일전쟁 발발후에는 애국기 헌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김연수, 문명기, 최창학, 김용주 등 조선인 부호들을 비롯해 부·도·군민 등의

일제가 경성(京城) 지역에만 두 곳의 감옥을 만든 까닭은?

2021년 3월 25일 3540

일제가 이른바 ‘만세소요사건(萬歲騷擾事件)’이라고 불렀던 거족적인 삼일만세운동의 여운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절인 1921년의 어느 늦은 가을날, 이른 아침부터 4, 5백 명이 훨씬 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삐 아현(阿峴, 애오개)을 넘기 시작했다. 누구는 전차로, 누구는 자동차로, 누구는 직접 걸어서 각기 도착한 곳은 먼저 온 이들로 꽤나 혼잡해진 어느 감옥의 문 앞이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잔뜩 모여든 까닭은 바로 ‘독립선언사건(獨立宣言事件)’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이날 한꺼번에 만기출옥(滿期出獄)을 하는 16명의 인사들을 맞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날의 광경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21년 11월 5일자에 수록된 「악수(握手)하고 감루(感淚)만 종횡(縱橫), 경성감옥 문밖에는 5, 6백 명의 고구 친척이 산 같이 모였다, 작조(昨朝) 감옥(監獄)에서 출감(出監)된 17인(人)」 제하의 기사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작(昨) 4일 오전 9시로부터 아현리(阿峴里) 경성감옥(京城監獄) 앞에는 남녀 합하여 4, 5백 명의 인원이 감옥으로 들어가는 전차길 옆으로부터 감옥 문 앞까지 사람이 피하여 다닐 수 없이 섞기여 섰고 자동차 7, 8대는 감옥 들어가는 어구에서 누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 사람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그리웠던 사람을 일 분 일 초라도 얼른 좀 보았으면은 하는 빛이 나타난다. 이 일은 다른 일이 아니라 이미 본지로 보도되었던 바와 같이 손병희 일파 중에 2년 징역의 언도를 받고 장구한 사이에 춥고 더운 것을 참아가면서 또는 엄밀한 옥칙을 지키여 가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살이를 하다가 금월 3일까지가 만기되어 작

일제를 빛낸 사람들 – 이상호 화백이 들려주는 작품 해설

2021년 3월 25일 2453

전남 영암 출신인 이상호 화백은 조선대학교 서양학과 4학년이던 1987년, 조선대학교 미술패 후배들과의 공동 작품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를 제작해 미술인 최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됐다. 악명 높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받아 출감 후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 이상호 화백은 불교를 주제로 한 그림에 몰입하면서도 동학혁명, 4·19, 5·18, 통일 등 역사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당초 작년에 개최 예정이던 제13회 광주비엔날레는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4월 1일부터 5월 9일까지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열린다. 광주비엔날레에 초청받은 이상호 화백은 친일파를 주제로 한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라는 대작을 출품해 주목받고 있다. 이 작품은 연구소와 광주지부 회원들과 광주시민들의 후원으로 완성되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이상호 화백과의 인터뷰를 광주지부에 부탁하였다. 인터뷰를 기꺼이 맡아준 이지훈 사무국장과 인터뷰에 응한 이상호 화백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 편집자주 ●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 잘못된 역사가 시작된 곳이 궁금했어요. 부정한 권력 앞에 왜 다수의 민중들이 희생되는 시대가 계속되는지. 저는 그 잘못된 역사의 뿌리에는 ‘친일’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친일의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니까 계속해서 굴절된 역사가 이어온 것입니다. 저는 이 잘못된 역사가 후세까지는 연결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 그림 그리는 데에는 얼마나 걸렸나요? ● 작품에 대한 구상은 2019년도에 처음 했구요. 본격적으로 붓을

연구소가 참여한 KBS 단독 보도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방영

2021년 3월 25일 812

연구소가 참여한 KBS 단독 보도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방영 박광종 선임연구원 KBS는 지난 3·1절 저녁 9시 뉴스에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사실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KBS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일제가 1921년 6월에 작성한 <간도사건에 관한 공적조서 보고>라는 제목의 문서 철에서 한국인 경찰 48명의 공적명세서를 확인하고, 1920년 간도참변 당시 한국인 경찰들이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한 일제의 만행에 적극 가담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KBS가 입수한 <간도사건에 관한 공적조서 보고>는 <응원경찰관 공적조서>(재간도일본영사관), <간도사건 공적명세서> (두도구분관과 용정촌총영사관), <간도사건 공적조사서>(국자가분관) 등 4종류, 600여 쪽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중 한국인 경찰 48명의 ‘공적서’가 상세하게 담겨있다. 이 문서들은 간도참변을 지휘한 일본군 부대장들이 ‘토벌’에 참여했던 일제 경찰(한국인·일본인)들에 대한 공적서를 작성하고, 간도총영사관이 이 공적서를 취합해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것이다. 연구소는 각종 사료(자료)를 조사해 간도참변에 참가한 한국인 경찰 48명 가운데 조선총독부 소속 순사로 간도로 파견된 ‘응원 경찰’ 9명이 일제로부터 종군기장(從軍記章)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종군기장은 일본이 대외침략을 기념하며 전쟁에 참전한 이들에게 수여하던 일종의 상훈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했던 이들 역시 종군기장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은 주로 첩보 수집 및 보고, 길 안내, 통역, 독립운동가에게 변절을 강요하는 귀순 업무 등을 맡았는데 독립운동가 체포와 민간인 마을 ‘초토화’에도 직접 가담했다. 48명 중 간도참변 당시 간도총영사관경찰서에 근무하던 일본 외무성 경부

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2)

2021년 3월 25일 957

[돌려보기] 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2)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 편집자주 4. 국립서대문대학 빙고동 호텔에서 원 스타가 된 우리 다섯 별들은 그 계급에 걸맞게 따로따로 지프차로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1월 25일 서대문구치소로 이송, 수감 당했다. 이 날은 내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세 가지 추억이 겹쳐져 있다. 내가 등 따시고 배부른 편안한 고향의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 두고 상경한 날(1961.1.25.)이자, 맏아들의 생일(1972)인데, 여기에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서대문구치소로 넘어간 날이 추가되었다. 이 대학 면접은 까다로웠다. 이미 밤이 저물어 각 경찰서에서 보낸 일반수들은 다 입방해버린 뒤여서 덩그런 넓은 방에는 몇몇 교도관들이 난로 가에서 한담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 대뜸 일반사범이 아님을 알아보고는 직업을 묻기에 대학 강의도 하고 글도 쓴다니까 무슨 과 교수냐기에 국문과랬더니 “보나마나 민족문화예술이 어떻고 하다가 들어왔겠군요!”하고는 “안 됐구만요. 몸이나 조심하시오. 여기선 건강이 제일이니…”라고 하자 요시찰 담당 교도관이 나타나 “잡담 하지 마시오! 따라오시오!”라고 윽박질렀다. 널직한 방에 죄수는 나 혼자였다.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나를 홀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