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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서울 거리에 오백 마리의 제주 조랑말이 무더기로 출현한 까닭은?

2023년 1월 31일 843

이른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1주년을 막 넘길 무렵, <매일신보> 1938년 7월 15일자에는 「소비절약(消費節約)의 총수(總帥) 마상(馬上)의 미나미 총독(南總督), 자동차(自動車)를 ‘넉아웃’」이라는 제목의 기사 하나가 등장하였다. 시간극복(時艱克服)의 의기에 불타는 미나미(南) 총독은 솔선하여 자동차의 승용을 절감하고 있는데 14일부터는 우천이 아닌 경우에는 언제든지 승마(乘馬)로 퇴청하기로 되었는데 금후 매일 오후에는 총독부 왜성대 관저 간에 말을 달리는 총독의 자태를 보게 될 것이다. 난다 긴다 하는 조선총독이 솔선수범하여 자동차 없이 말을 타고 통근하는 풍경을 연출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제 막 본격화하는 전시체제기 아래 총후보국(銃後報國)과 물자절약, 그 가운데 특히 ‘가솔린(gasoline, 휘발유)’의 부족사태를 이겨내는 방편의 하나로 고안된 결과물이었다. 이에따라 총독부의 관리들은 전차와 도보로 출퇴근을 하고, 총독과 정무총감 역시 승마(乘馬)와 인력거(人力車)를 이용토록 했던 것이다. 이러한 광경은 경복궁 후면에 경무대 총독관저(景武臺 總督官邸)가 완공되어 남산총독관저(南山總督官邸)에서 그곳으로 이사를 마치게 되는 1939년 9월 22일의 시점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렇다고 그 이후에 말 타고 다니는 조선총독이 길거리에 출현하는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 그것은 바로 ‘승마’ 대신 ‘마차’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매일신보> 1940년 4월 29일자에 수록된 「미나미 총독(南總督) 태우고 달릴 삽상(颯爽) 일두마차(一頭馬車), 6월부터는 통감부 시대(統監府時代) 재현(????現)」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신록이 우거지는 서울 장안 거리에는 미나미(南) 총독이 타고 다니는 일두마차(一頭馬車)가 삽상 등장하게 되었다. ‘까소린’을 절약하는 의미에서 총독부에서는 벌써 작년부터 도쿄(東京)에 있는 마차제조회사에다 마차를 주문중이더니 약 1주일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2023년 1월 31일 640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9월, 전국의 후원회원을 담당하는 연구소 기획실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영업 후원회원들을 조금이나마 돕기 위해 원하는 분들에 한해 그분들의 업체, 업종, 연락처 등을 정리하여 전체 후원회원들에게 메일링을 한 적이 있다. 그러한 홍보가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자영업 후원회원께 작은 도움과 격려를 드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 당시 홍보한 업체는 모두 30개였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누룽지 과자인 ‘서울칩’을 생산하는 ㈜서울칩 정동수 대표를 처음 만나게 되었지만 사실 정 대표는 더 오래 전부터 연구소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1998년에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처음 연구소를 알게 되었는데요. 5년 전부터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강의와 연구소가 수탁하여 운영하는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진행하는 강좌를 들으면서 연구소에 더 많은 애정을 갖게 되었어요.” 홍보 메일링 발송 이후 정동수 대표는 직접 제품을 들고 감사의 뜻으로 연구소를 찾아왔다. 정 대표에게 제품 설명을 들어 보았다. “수년간 영화나 드라마에 음식을 기획하는 푸드 디렉터(음식 메뉴를 개발하는 일부터 음식 산업 전반의 일을 기획하는 사람) 업무와 식품회사에 신제품을 개발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최근에 개봉한 영화 ‘영웅’에도 참여했는데요. 바로 독립운동가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함께 만두를 먹는 장면이에요. 1992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관부재판을 영화로 만든 ‘허스토리’에도 참여했었고 그 외에도 ‘더킹’, ‘환혼’ 등 많은 작품에 참여했죠. 그리고 국내 백화점이나 식품회사에 신제품 컨설팅을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갑자기 쉬는 시간이 많아졌죠. 때는 이때다 싶어 그동안 생각했던

민족문제연구소 10대 뉴스

2023년 1월 31일 510

민족문제연구소 10대 뉴스 <재일조선인단체사전> 출간과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 선정 2월, 10여 년간에 걸친 지난한 작업 끝에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편찬사업이 일단락을 지었다. 마흔 명이 넘는 한·일 연구자들이 집필에 참여해 일제시기 재일조선인단체(총 551개)를 처음으로 집대성한 1,263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출간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 책은 7월에 대한민국학술원의 ‘2022년 우수학술도서’에도 선정되었으며, 현재 일본어판 발간이 추진되고 있다. 2022년도 민간통일운동 유공 대통령 표창 수상 4월 25일 정부서울청사 통일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2022년도 ‘민간통일운동 유공 정부포상’ 전수식에서 우리 연구소가 통일운동 활성화와 통일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간 통일 관련 시민강좌를 개최하고 <일맥상통 백두대간> 사진전의 전국 순회 전시 등을 통해 통일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고양시키는 데 꾸준히 노력해왔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6월민주항쟁 35주년 기념 초대전 〈이상호, 역사를 해부하다〉 개최 이상호 작가 초대전이 8월 4일부터 10월말까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렸다. 이 작가는 1987년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 제작에 참여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이후, 역경 속에서도 치열하게 창작활동을 지속해온 대표적인 민중미술가 중 한사람이다. 이번 초대전은 작가의 대표작 중 53점을 선정, 연대기적으로 배치하여 그의 의식세계의 변화를 조명했다. 전시가 끝난 뒤 작가는 국내외에서 화제가 되었던 광주 비엔날레 출품작 「일제를 빛낸 사람들」을 연구소에 기증했다.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년 / 김창숙 선생 서거 60주년 추모 특별전 개최 강북구의 위탁을 받아

용서와 화해 그리고 진실 규명으로 희생자들의 한이 풀리길 바라며

2023년 1월 31일 839

11월 15일 저녁 7시 한국전쟁 당시 충남 태안지역에서 벌어졌던 ‘민간인학살’을 다룬 구자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태안’을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를 비롯한 17개 시민사회단체 공동 주최로 상영하였다. 작은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고향인 울릉도에서 경찰에 의해 끌려가 경북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서 희생되셨고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에서 근무할 당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조사단’ 일원으로 활동했던 나에게는 영화 ‘태안’의 관람이 남달랐다. 한국전쟁 당시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자행되었던 ‘민간인학살 사건’을 영화로 알리고 있는 구자환 감독은 2013년의 ‘레드툼’, 2017년의 ‘해원’에 이어 세 번째로 ‘태안’을 제작했다. 영화 ‘태안’은 1950년 여름 보도연맹사건을 시작으로 좌우 보복 학살을 다루고 있는데 태안유족회 상임이사인 강희권, 유민 아빠로 알려진 세월호 유가족인 김영호 씨가 출연해 태안 곳곳의 학살지역을 비추고 같은 동네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유가족이 사건 후에도 마주 보고 살아야 했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한다. 영화 ‘태안’에서 증언해 주신 유가족분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대다수가 민간인학살 당시 14살, 15살 정도의 어린 나이였고 이제 70년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응어리진 한과 슬픔을 차마 가늠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영화에 출연하신 분들은 좌우 보복 학살의 두 주체가 한 마을에서 70년이나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면서 자신의 아픔만큼 상대의 아픔도 컸음을 알고 있었고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개개인이 스스로 깨우치고 용서하며 화해의 길로 나가고 있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에서 구자환 감독은

우리의 요구는 정의와 평화다

2023년 1월 31일 427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굳게 믿는 평화시민 여러분! 전주 김판수가 인사 올립니다. 일본군 강제연행 종군‘위안부’ 성노예 피해자는 가해 전범국 일본에게 엄중하게 요구한다. 1. 침략 전쟁 범죄를 인정하라 1. 진상을 규명하라 1. 공식 사죄하라 1. 법적 배상하라 1. 책임자 처벌하라 1. 역사에 기록하여 교육하라 1. 피해자 추모시설 건립하라 1992년 1월 8일부터 이 자리에서 시작한 수요집회는 30년 동안 ‘1573차’인 오늘까지 한결같이 일본의 책임 있는 반성을 촉구한다. 이곳 평화로는 평생을 세상에서 따돌림 당한 억울하고 절통한 성노예 피해자와 평화시민들이 연대하며, 피해자의 ‘수난과 고통’ ‘상처와 아픔’ ‘수모와 치욕’을 함께 기억하며, 명예와 인권의 회복을 간절히 염원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서있는 평화의 성지입니다. 평화를 폭력으로는 얻을 수 없기에 우리는 가해 전범국 일본에게 증오와 적대로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고, 오직 가해 일본국의 성의어린 위로로 피해자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유하여 용서와 화해, 공존 평화 세상을 열자고 한결같이 호소했습니다. 이제 더는 시간이 없습니다. 일본은 피해자에게 지금 즉시 직접 사과하고 직접 용서받아 전범국 오명을 씻어버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다시 한 번 충고합니다. 정의와 평화를 끝까지 지켜내려는 평화 시민 여러분께 용기가 샘솟는 선물을 선사하겠습니다. 도종환 작 ‘담쟁이’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출판기념회 성황리에 열려

2023년 1월 31일 555

[초점]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출판기념회 성황리에 열려 • 편집부 함세웅 이사장의 저서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출판기념회가 1월 14일 오후 2시 광화문 교보빌딩 컨벤션홀에서 열렸다. 이책은 ‘해방에서 촛불까지 기억하고 기리고 소망하다’라는 부제에서 보이듯, 민주화운동 인권운동‧노동운동‧통일운동의 역사를 한 권에 응축시킨, 불의와 독재에 항거한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체험적 증언록이자 민족의 바람직한 미래를 열어갈 지혜를 담은 이정표라 할 수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공식 추천사를 실어 함세웅신부의 삶과 투쟁에 경의를 표했다. 이날 출판기념회는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안병욱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유시춘 EBS 이사장,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김상근 목사, 문정현 신부 등 저자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이들의 축하 말씀에 이어, 저자가 출간 소회와 감사의 뜻을 밝힌 뒤 붓글씨 스승인 이동천 박사와 출판 관계자들을 일일이 소개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참석해 진심어린 축하와 함께 개인적 각오도 밝혀 행사장을 가득 메운 내빈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출판기념회가 끝난 뒤 교보문고 매장에서 진행된 사인회에는 수백 명이 줄을 서 기다려 평생을 민주화와 역사정의 실현에 헌신한 저자에 대한 한국 시민사회의 존경을 가늠하게 해주었다. 함세웅 이사장은 행사 후 “인권회복과 민주화, 남북평화공존의 역사현장에서 만난 선후배동지들과 사랑하는 모든 형제자매 교우, 수도자, 사제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인권의학연구소,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정의구현사제단 회원들과 가족 모든분들께 동지적 사랑과 일치 안에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전해왔다. 

국사편찬위원회 주관 교원연수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려

2023년 1월 31일 535

[초점] 국사편찬위원회 주관 교원연수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려 • 김승은 학예실장 지난 1월 11일과 18일 양일간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교원연수가 열렸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주관한 이번 연수에는 초등교원 30명, 중등교원 40명이 참가하였다. 작년 8월 식민지역사박물관 상설전시 해설 관람과 특별전 관람으로 진행했던 교원연수에 이어 두 번째로 진행한 연수이다. 이번에는 이순우 책임연구원이 용산의 역사에 대한 특강을 맡았다. 그리고 김승은 학예실장과 조한성 연구원의 해설로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이 이어졌다. 특히 과거사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 인권회복의 단계를 거쳐 기억과 기념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과거청산의 역사를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관람객과 어떤 공감을 나누고 있는지를 둘러싸고 교사들과 대화도 이어졌다. 박물관에서 오전 특강과 오후 관람을 마치고 교사들은 효창공원 답사와 백범김구기념관 관람을 이어갔다. 용산과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중심으로 근현대사의 역사를 되새기는 교사들의 발걸음이 더 많은 학생들의 단체관람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또한 생생한 교육의 현장으로서도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더욱 많이 활용되기를 바란다. 

식민지로 전락한 도시 풍경

2023년 1월 31일 1390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에는 ‘청일전쟁 전의 경성日淸戰役前の京城’의 모습을 시작으로 조선총독부, 총독관저, 경성시가, 남대문, 경복궁 등 경성의 모습 44장과 인천, 개성, 평양, 압록강, 부산, 수원, 목포, 군산 등 지방 명소와 고적 사진 86장이 실려 있다. 이 사진들은 강제병합 직전에 촬영된 이미지가 아니라 한반도 곳곳의 모습을 길게는 20여 년에 걸쳐 담은 것이다. 일제의 조선 ‘보호국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조선에 대한 체계적인 사진기록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병합기념첩>, <일한병합기념 대일본제국조선사진첩> 등 여러 종류의 ‘병합’을 ‘기념’하는 사진첩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사진첩에는 ‘대한제국’은 ‘조선’으로, 황도皇都 ‘한성’은 ‘경성’으로 전락한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침략자의 시선으로 담아내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학교이름에 도(道), 방위, 숫자 명칭의 흔적이 성행했던 시절 내선일체 완성을 위한 식민교육제도의 변경이 빚어낸 부산물

2022년 12월 26일 3450

[식민지비망록 88] 학교이름에 도(道), 방위, 숫자 명칭의 흔적이 성행했던 시절 내선일체 완성을 위한 식민교육제도의 변경이 빚어낸 부산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여러 해 전에 박완서(朴婉緖, 1931~2011)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1992)를 아주 흥미롭게 읽다가 일제강점기의 학교생활과 관련한 내용에 눈길이 끌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목에 따로 책갈피를 꽂아둔 기억이 퍼뜩 떠오른다.   (22~23쪽) …… 오빠는 면 소재지에 있는 사년제 소학교를 졸업하고 송도로 가서 이 년을 더 다녀 그때 개정된 학제로 육년 동안의 초등교육을 마쳤다. 숙부들은 다 사년제 소학교만 나왔는데도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학문을 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오빠가 송도에서 이년 더 배운 걸 굉장한 고학력으로 여기셨다. (60쪽) …… 문안에 있는, 엄마 마음에 드는 학교 중에서 다시 나의 통학거리를 감안해서 골라잡은 학교가 매동국민학교였다. 현저동에서 그 학교엘 가려면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인왕산 자락이었다. 현저동 중턱에서 성터가 남아있는 근처까지 더 올라가면 사직공원으로 통하는 꽤 평탄한 길이 나 있었다. (82쪽) …… 국민학교 입학식은 4월이었다. 나는 또 수단 두루마기를 입고 엄마 손잡고 산을 넘어 학교에 갔다. 점잖은 동네아이들이라 과연 우리 동네 아이들하고는 달라 보였다. 예쁘장하고 깡똥한 양복으로 차려입은 애가 대부분이었다. 학부형은 일주일 동안만 따라오라고 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일제 때의 초등학교는 당초 4년제였다가 6년제로 바뀐 것이라든가 그 당시 입학식을 거행하는

제82주년 부산항일학생의거를 기념하며

2022년 12월 27일 751

[후원회원마당] 제82주년 부산항일학생의거를 기념하며 이상국 부산동구문화원 전문위원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 출처 <조선부산명소>(1928) 1940년 11월 23일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가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부산·경남지역 18개 남녀중등학교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대회는 학생체육대회가 아닌 군사훈련을 모방한 이상한 대회이다 보니 경기규정도 조악했다. 경기종목은 ‘수류탄던지기, 모래운반, 비상소집, 환자 들것 운반, 무장 행군’ 등 15개 종목이었다. 특히 심판관인 일본군 학교배속장교들이 한국인 학교인 동래공립중학교(현 동래중·고등학교)와 부산제2공립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중·고등학교)에 대해 편파적인 경기판정을 일삼아, 일본인 학교인 부산공립중학교(현 부산중·고등학교와 다름)에 우승을 안겨 줬다고 판단한 1천여 명의 한국인 학생들이 폐회식에서 일본인에게 폭행과 폭언으로 경기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또한 의분이 격화된 200여 명의 한국인 학생들은 야간에 대회심판장인 경남지역 학교배속장교 총책임자인 ‘노다이 켄지’(乃臺兼治) 육군대좌[현 대령]의 관사로 몰려가 돌팔매질로 기물을 크게 파손하는 등,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을 물리적으로 토해내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일제는 중일전쟁 등의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한국인 학생들에게 식민지교육을 통한 동화정책과 아울러 우민화·황민화 정책을 펼쳐, 향후 한국인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려고 중등학생들에게도 군사 집체훈련을 강화했었다. 그리고 일본제국의 군인으로서 일왕을 위해 영광스러운 목숨 바치기를 세뇌화시켰으며, 애교심을 앞세운 학교 간의 군사훈련 경쟁을 통해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학생들은 이날의 국방경기대회를 통해 일제 식민정책의 기만성을 깨우침과 동시에 민족차별에 대한 잠재적 저항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한국인 학생 15명(동래중학 9명, 부산제2상업 6명)을 ‘폭력행위 등의 죄’로 재판에 회부시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