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 5 : 증언과 사료로 배우는 강제동원’ 진행
[초점]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 5 : 증언과 사료로 배우는 강제동원’ 진행 4월 21(금)~29일(토) 2주에 걸쳐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한 교원연수가 진행됐다. 주제는 최근 윤석열 정권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해법이 발표된 후 뜨거운 이슈로 부각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에 대한 것이었다. 매년 상반기, 하반기 두 차례 진행되는 교원연수는 서울특별시교육청 교육연수원으로부터 교원연수 진행 기관으로 승인을 받아야만 진행할 수 있는데,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은 2020년 상반기 교원연수 때부터 꾸준하게 승인을 얻어 진행하고 있다. 이번 교원연수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들이 대거 강사로 참여하였는데, 연구소의 풍부한 강제동원 피해자 증언 구술작업의 연구성과와 피해자 재판 지원 등 다양한 지원사업을 벌이며 얻은 현장성이 강연에 녹아들어 교원연수에 참여한 선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아울러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증언도 포함되었는데,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공동대표의 강의가 진행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강제동원된 것도 억울한 일인데, 전쟁터로 끌려가 사망한 후 사망 소식을 전해 듣기는커녕 부친의 유해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의 그 황망함, 또 이후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 합사자들의 유해 송환과 합사자 명단에서 부친의 이름을 빼 달라고 하는 청원 등이 여전히 일본 사법부로부터 기각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등을 들었을 때 연수에 참여한 선생님들은 모두 분노했고, 눈물짓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교원연수 강의에 대한 호평에 힘입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동원 특강을 준비 중이다. 줌(zoom)을 활용한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2) – 조선박람회 조감도와 박람회장 엽서
[소장자료 톺아보기 49]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2) – 조선박람회 조감도와 박람회장 엽서 조선박람회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조선의 각 도(道)의 특설관(特設館)들이 독립적으로 세워진 것 외에 내지관(內地館-일본관), 오사카관, 도쿄관, 교토관, 규슈관, 나고야관 등 일본의 지방관과 훗카이도관, 타이완관, 만몽참고관, 화태(樺太-사할린)관 등 당시 일본세력 하에 있던 식민지의 특설관이 세워졌다는 점이다. 특히 각 도의 특설관은 지방의 특색을 반영한 건축양식을 보여주었다. 충청남도관은 논산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이미지를 입구에 조성하였고 평안남도관은 평양의 현무문 이미지로 만들었다. 이와 함께 일본의 주요 도시 10개의 특설관이 설치되었는데 도쿄, 교토, 오사카 등 일본의 선진 도시 모델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경회루 뒤편에는 타이완총독부가 운영하는 타이완관과 만몽관(滿蒙館) 있었는데 중국측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여 설치하였다. 조선박람회가 ‘20년동안의 실적을 천명’하기 위해서라고 선전하였지만 일제의 대륙 침략을 미화하는 정치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일제가 개최한 박람회는 실제로 경제적인 측면보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1923년에 열린‘조선부업품공진회’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들끓는 조선의 민심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신흥만몽박람회’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만주국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주장하기 위해, ‘조선대박람회’는 중일전쟁 이후 대동아공영권의 결성을 위해 개최되었다. 박람회의 성격이 점차 정치적·군사적 목적으로 변화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강동민 자료실장
현지보고 유혈의 제주도
[자료소개] 현지보고 유혈의 제주도 조덕송 조선통신 특파원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신천지> 1948년 7월호에 실린 조덕송(趙德松, 1928~2000)의 「현지보고 유혈의 제주도」다. 올해 75주기를 맞이한 제주4·3항쟁에 대해 일부 정치세력들이 ‘김일성의 지시로 촉발되었다’는 등 제주4·3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4·3항쟁을 객관적으로 추적 보도한 글을 발굴 소개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4·3 당시 조선통신사 소속이었던 조덕송 기자는 이후 국제신문, 연합통신, 평화신문, 자유신문, 조선일보 간부를 역임했다. 조 기자는 제주4·3항쟁을 취재했을 뿐 아니라 반민특위 관련 필화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서울 수복 후 언론계에 복귀했다가 정국은 간첩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 편집자 주 죽음의 거리화 하는 제주의 밤 오후 8시가 제주도의 서울 제주읍의 통행금지시간이다. 해가 짧은 남방의 여름이라 할지라도 오후 8시면 아직 황혼의 안개가 어둠을 기다리는 산책의 시간이련만 이곳 제주의 거리는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진다. 동란을 모르고 옛날과 같이 우는 애상적인 물새소리가 처량하다가 점점 어둠이 칫수가 길어가면 이상한 흥분 가운데 살기가 창일(漲溢)하여가고 제주의 밤은 완전히 죽음의 장막에 뒤덮여 버린다. 4월 3일 미명(未明)에 돌발한 제주도 동란은 무척이나 치안당국을 괴롭힌 채 꺼질 줄을 모르고 요원의 불처럼 확대되어 기어코 제주 전도(全島)를 화중(禍中)에다 몰아넣고야 말았다. 이리하여 동란은 전쟁의 형태로 변하였고 평정하려는 경찰과 국방경비대 그리고 폭도들 사이에 총포는 끊임없이 교환되고 있다. 육로에서 상상하던 전장은 한라산이었고 폭도측의 습격으로 경찰지서 등이 가끔
황임성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이 된 이유
[연구실 글방] 황임성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이 된 이유 조한성 연구2팀장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 10분경이었다. 아직도 한낮에는 30도에 육박할 정도로 무덥던 초가을날, 남산 중턱에 있던 조선총독부 본관 청사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는 인근에 있는 총독관사에서도 들릴 정도로 컸다. 밖에서 총독부를 경비하던 순사들은 실수로 가스관이라도 잘못 건드렸나 했다. 당시 회계과에서 증축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은 누군가가 “폭탄이다”를 연이어 외치면서 알았다. 총독부에 투척된 폭탄은 두 개였다. 하나는 비서과에 던져졌고, 다른 하나는 회계과에 던져졌다. 비서과의 폭탄은 스즈키라는 직원의 얼굴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기 때문에 상당히 아팠지만 터지지 않았기에 그게 뭔지 즉각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회계과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누군가 ‘폭탄’이라고 했기에 그제야 폭탄인 줄 알았다. 불발탄이 아니었다면 스즈키를 비롯하여 비서과 직원들 중에 상당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반면 회계과의 폭탄은 상당한 폭발음과 함께 폭발했다. 건물 바닥에 15~20cm 정도의 구멍이 나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사무 집기가 부서지고 유리창이 깨졌다. 하지만 여기서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회계과장과 직원들이 모두 업무차 방을 비웠기 때문이었다. 두 개의 폭탄이 시간차를 두고 던져졌지만, 누가 폭탄을 던졌는지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럴 만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몇몇 있었지만,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눈을 감거나 몸을 피하느라 보지 못했던 것이다. 폭발 직후
“내가 아주 단판씨름 하러 왔소” 김상옥 의사의 의열투쟁과 관련한 몇 가지 논점 정리(2)
[김상옥의거 100주년 특집] “내가 아주 단판씨름 하러 왔소” 김상옥 의사의 의열투쟁과 관련한 몇 가지 논점 정리(2) 이순우 책임연구원 논점 3. 최후 총격전 당시의 ‘사살자’ 존재 유무는? 김상옥 의사의 의열투쟁과 관련하여 최후의 총격전이 벌어질 당시의 상황을 묘사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의 하나는 “수백 명의 일제경찰이 포위한 가운데 격렬한 총격전을 벌인 끝에 수십 명을 처단하고 마지막 한 발로 자결 순국하였다”는 식의 구절이다. 앞에서 인용했다시피 김상옥 의사의 동상에 부착된 약력사항에 “왜경 500여 명에게 포위되어 …… 수십 명의 왜경을 살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국립서울현충원의 묘비석에는 “일본군경 천 명 4중 포위, 3시간 교전 16명 처단”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1986년에 나온 <김상옥 나석주 항일실록>의 말미(213쪽)에 붙어 있는 ‘연보(年譜)’에도 “무장경관 1,000여 명이 효제동 일대를 겹겹으로 포위 …… 쿠리다 경부 외 15, 6명을 살상”이라고 적은 대목을 확인할수 있다. <김상옥평전>(2014)과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특별판)>(2019)에는 “군경 1000여 명을 동원 4중으로 포위 …… 16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일찍이 1992년 1월에 국가보훈처가 김상옥 의사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것과 관련하여 공적사항(공훈전자사료관에 게재)을 정리한 것을 보면, 여기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마침내 은신처를 탐지한 일경은 경기도 경찰부장의 총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4백여 명(천여 명이라고도 한다)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1월 22일 새벽 5시 반경 이혜수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 3시간여의 치열한
‘멜리오라’,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하미경 후원회원
[인터뷰] ‘멜리오라’,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하미경 후원회원 방학진 기획실장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는 “민주주의는 고향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민주주의의 고향은 동네 공동체이다”라고 말했다. 동네가 이렇게 거창한 곳이었나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교과서에서 우리 민족에게는 향약, 두레, 품앗이 등 공동체 전통이 강했다고 배웠지만 현실에서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이웃에게 인사는커녕 바로 옆집 사람의 이름도 모른 채 지내고 있다. 어느 학자는 우리의 끈끈한 공동체가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새마을운동, 통반장제도, 반상회 등 관제 공동체로 변질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여하튼 동네 즉 ‘마을’이 우리에게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지방자치가 부활하면서 도시빈민운동가들의 목적의식적인 풀뿌리 운동이 확산되면서부터일 것이다. 현재 전국에서 약 200개가 넘는 지역에 마을공동체 조례가 있는데 조례에서 ‘마을’은 “주민이 생활환경을 같이하며 주민 서로에 대한 이해와 소통을 바탕으로 주민 스스로의 협력을 통해 형성한 삶터(공간), 사람(조직) 및 공동체(관계)가 통합된 집단”이라고 정의된다. 이번 달에는 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열심히 마을공동체를 일궈가고 있는 ‘같이빚다’ 대표 하미경회원을 만났다. 한때 이 지역은 현재의 LH공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공기업 ‘토지금고’가 염전이었던 이곳에 택지를 조성하면서 그 위로 집들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번성했었다. 지금은 상권이 신도심으로 옮겨가면서 이 지역 상가들이 대체로 낙후되고 허름하지만, 마을공동체 ‘같이빚다’가 활동하는 공간인 ‘멜리오라’는 단연 돋보이는 건물이다. 먼저 하미경 대표에게 건물 설명을 부탁했다. “공간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를 새부대에
[후원회원 마당] 민족문제연구소 수원지부를 새부대에 이달호 전 수원지부 지부장 7년 전 불같은 성격의 신용승 선생의 뒤를 이어 수원지부장이 되었습니다. 청량리 지나 세방살이 하는 민족문제연구소에 설레는 마음으로 운영위원회에 갔던 기억이 삼삼합니다. 전국에서 친일파 청산에 힘쓰시는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영위원장의 내부 비판과 돌출적인 회의 운영으로 소모적인 회의를 장시간하고 끝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여기에 일부 부회뇌동하는 지역위위원장도 있었지요. 역경을 잘 이겨낸 것 같습니다. 그 후 지역에서 한 일이 거의 없는 죄책감이 있지만 다행히(?) 코로나로 면피할까 합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민족’이라는 특수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친일파 청산을 내세운 대표적인 연구소입니다. 오랜만에 ‘민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민족’이라는 사회적 집단은 핏줄과 언어, 지역과 문화생활의 공통성에 따라 형성되고 일정한 사회적 관계에 의하여 결합된 사람들의 사회생활 단위입니다. 민족이 형성되면서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사상이 민족주의입니다. 그렇지만 민족주의에도 두 가지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나라와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근로대중을 위하여 충실히 복무하는 참다운 민족주의, 다른 하나는 서구에서 발생한 ‘부르죠아 민족주의’로 부르죠아만의 이익을 추구하고 다른 민족을 멸시하고 적대시하는 ‘배타적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갈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친일파 청산과 이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우신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해 내었습니다. 하지만 자주독립을 위해 싸운 세력에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있었고 시회주의자들 중에도
2023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워크숍
[초점] 2023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워크숍 • 김무성 기획실 회원사업부팀장 4월 1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천안 신불당아트센터 3층 VIP 세미나실에서 2023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워크숍이 열렸다. 이번 워크숍은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최근 재개되고 있는 지역위원회 개편에 관한 경과보고와 연구소의 현황에 대한 공유를 위한 자리였다. 코로나19로 인해 오랜만에 전국 각 지역 운영위원장이 대면으로 만나는 시간이었다.이날 워크숍에는 전국에서 모이는 운영위원들 이동에 최기섭 충남지역위원장과 홍남화전 아산지회장이 도움을 주었다. 이민우 운영위원장을 비롯해 각 지역위원장 17명이 참석했다. 특히 새롭게 지역위원장으로 선출된 변량근 부산지역위원장, 박찬문 구미지역위원장, 한명철 안산시흥지역위원장이 참석해 인사를 나눴다. 워크숍은 먼저 방학진 기획실장이 연구소 현황과 정세에 관해 발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 후 운영위원들은 후원회원 조직 활성화 방안에 대해 열띤 논의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양한 의견으로 지역조직을 강화할 방법과 후원회원 확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각 지역위원장은 다양한 노하우를 나누고, 지역에서 필요한 지원을 요청하는 시간이 있었다. 열띤 논의 후 민족미술작가 신학철 화백의 전시를 관람하였다. 신불당아트센터 2층 M갤러리에서 ‘신학철展’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 기간은 전날인 3월 31일까지였지만 특별히 신학철 화백의 안내로 운영위원들은 관람할 수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으로 시작되는 신학철 화백의 작품주제는 근현대 역사를 관통하는 절규이자 역사 정의를 향한 격렬한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시간 관계상 30분가량 관람한 후 기념촬영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아산지회가 깊이 관여한 아산 성재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현장으로 이동해 홍남화,
심산 김창숙 서거 60주기 추모 특별전 연계 강좌 및 답사
[초점] 심산 김창숙 서거 60주기 추모 특별전 연계 강좌 및 답사 • 이현아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사 근현대사기념관은 심산 김창숙 서거 60주기 추모 특별전과 연계하여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강좌 및 답사를 3월 25일부터 4월 15일 매주 토요일 총 4회에 걸쳐 진행하였다. 강좌는 1강 심산 김창숙 일생과 사상(김시업 성균관대 명예교수), 2강 심산의 항일독립운동(홍윤정 심산김창숙기념관 학예실장), 3강 해방 후 김창숙의 활동(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교수)을 개설하였다. 4강은 심산 관련 서울 유적지 답사(홍소연 심산김창숙기념관 전시실장)를 진행하였다. 심산 서울 유적지 답사는 심산의 친손녀 김주 여사가 참석하였다. 성균관과 심산 옛집 터를 시작으로 나석주 의사 동상 및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터 그리고 근현대사기념관 장원석 학예실장의 특별전 해설과 심산 묘소 탐방을 끝으로 답사를 마무리하였다. 앞서의 독립민주시민학교 강좌는 4월 22일부터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1) – 조선박람회 사진엽서
[소장자료 톺아보기 48] 식민통치의 화려한 선전장이 된 경복궁(1) – 조선박람회 사진엽서 • 강동민 자료실장 조선박람회 홍보엽서 조선총독부 주최로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의 홍보엽서로 경성협찬회(京城協贊會)가 발행하였다. 조선박람회를 후원하고 보조하는 관변단체인 경성협찬회가 그림엽서와 안내도서 등의 제작 판매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박람회 관련 기념엽서는 대다수가 이곳에서 배포한 것으로 보인다. 엽서의 도안은 박람회 회장의 주요 건물 모습과 벼, 곡괭이, 공구, 생선, 뱀 등 전시된 생산물품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선박람회 정문 박람회장의 매표소 기능을 한 정문. 입장료는 성인 30전, 아동 15전, 군인 20전 등 싼 가격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통치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를 조직하고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 ‘조선박람회’를 개최하였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조선총독부가 직접 박람회를 주최한 경우는 딱 두 번뿐인데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가 첫 사례이고, 다른 하나는 1929년에 열린 ‘조선박람회’였다. 개최 장소는 모두 경복궁이었고 개최 기간도 거의 같다. 두 박람회의 관람객이 각각 100만 명을 넘었는데 조선총독부의 위세에 각 지역에서 동원된 인원도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 명목은 대한제국을 강점한 후 5년 동안 조선을 통치한 실적을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박람회도 ‘20년 동안 관민이 일치하여 힘들여 쌓아 올린 실적을 내외에 천명’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개최 취지 역시 조선물산공진회와 다르지 않다. 굳이 찾자면 일본의 조선통치 기간만 늘어났을 뿐이다. 경복궁의 전각과 수목들은 조선총독부가 조선물산공진회 개최 때 이미 훼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