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길을 만든 사람들, 이어가는 발걸음

332

[후원회원마당]

길을 만든 사람들, 이어가는 발걸음

김현정 후원회원

옥수수밭을 헤치고 나아가다
“여러분, 다 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직진하시면 됩니다!”

방학진 실장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크게 들려왔다.
“앞에 얼룩소가 있습니다. 다 왔습니다.”

우리는 어느 공장 외벽을 따라 수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곧이어 옥수수밭이 시작되는 곳에서 1시 방향으로 한참을 더 걸었다. 앞사람을 놓칠세라 부지런히 걸으면서 두 손으로 연신 눈앞의 이파리를 꺾어냈다. 밭고랑을 디딜 때마다 진흙이 들러붙어 발이 몹시 무거웠다. 팔에 상처가 나기는 했지만 모두 무사히 신흥무관학교 고산자 터에 도착했다.

신흥무관학교, 길을 만들다
1911년 문을 연 신흥무관학교는 3•1운동 이후 찾아오는 청년들이 크게 늘었다. 본교였던 합니하를 분교로 하고 새로 교사를 지어 확장한 곳이 바로 고산자다. 학생이 700여 명 정도로 가장 번성한 시기였다. 생도들은 역사와 지리를 배우고 군사 훈련을 받으며 독립군의 주역으로 거듭났다. 10년 동안 약 3천 5백 명이 졸업했고 해방을 맞기까지 우리나라 독립전쟁 역사의 굵은 줄기가 되었다.

고산자 터에서 제를 올리다
잎이 무성하고 풀이 우거진 여름은 다른 계절과 다르게 터를 찾기가 어렵다. 키 넘게 자란 옥수수가 특정 지형지물을 가리기 때문이다. 홀로 선 나무와 몇 그루 모여 자란 나무, 이 두 곳을 기준삼아 고산자 터를 조망할 자리를 잡았다. 햇볕을 받은 옥수수-만주 어디에 가도 끊임없이 보이는 옥수수, 옥수수밭 위로 집 한 채와 기지국 송수신탑이 올려다보였다. 우리가 선 자리를 빙 둘러 이 넓은 곳이 다 연병장이었고 언덕에 교사가 있었을 테지만 몇 동이 있었는지 남겨진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로 유명한 약산 선생도 이곳 고산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군사 기술을 배우고 의열 동지를 규합 할 목적이었다. 밀양 사람 최필숙 님이 준비하신 제수로 상을 차렸다. 술을 따르고 머리를 숙여 제를 올렸다. 졸업생 대부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나라를 되찾고자 치열하게 싸우다 산화하셨을 생각에 눈물이 났다. 코를 훌쩍이며 애국가와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부르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31명의 발걸음이 길을 찾다
생명을 바쳐 겨레를 구한 분들 덕분에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도 이를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을 살린 것은 따로 있다는 뜻이겠다. 목숨과 이름을 구걸해 민족을 없애려 했던 것들아! 자, 자… 흥분은 가라앉히고.

힘들게 찾아간 신흥무관학교 고산자 터에서 돌아 나오는 길은 편했다. 한 걸음이 서른한 번씩 다져지면서 또렷한 길이 생겼고 민족문제연구소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밀고 끌어주었기 때문이다. 4박 5일동안 방학진 실장님은 쏙쏙 들어오는 맛깔난 말솜씨로 진행을 해주셨다. 이준식 박사님의 차분하고 세련된 강의는 어디에서든 빛이 났다. 김재운 팀장님은 섬세한 더듬이로 어딜가든 우리가 발 디딜 곳을 먼저 찾아주셨다. 회원님들은 다양한 이야기로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걸음이 겹치며 잘 다져진 길이 보였다.

걸음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하다
여러 해 전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우연히 알게 돼 현장에서 후원 신청을 하고 지금까지 이어왔다. 최근에 회원 명부에 내 이름이 없는 이유를 알아보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박물관 후원이 별도라는 사실을 알았다. 연구소 후원을 이제야 시작했다.

“너, 빚진 거다.”
이번 답사 이야기를 들은 지인이 말했다. 그렇지, 지금 내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는 것은 다 그분들 덕분이니까. 그러나 이런 당연한 뜻이 아니었다.

“아니, 독립운동가들의 걸음을 이어가는 현시대 사람들한테 빚진 거라고!”

아, 맞다! 역사를 연구하고 기억하는 활동, 의미 있는 답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지금 이분들. 그렇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함께 걸어야겠다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NO COMMENTS